||<-2> '''한태유 (韓泰酉 / Han Tae-You)''' || || 생년월일 || [[1981년]] [[3월 31일]] || || 국적 || [[대한민국]] || || 출생 || [[울산광역시]] || || 포지션 || [[수비형 미드필더]], [[센터백]] || || 학교 || [[전하초등학교]][br] [[울산학성중|학성중학교]][br][[학성고등학교]][br] [[명지대학교]] || || 신체 조건 || 186cm || || 프로입단 || [[2004년]] [[FC 서울]] || || 소속팀 || '''[[FC 서울]] (2004~2014)''' [br] [[광주 상무 불사조]] (군 복무) (2007~2008) || || 국가대표 || 3경기 || || 등번호 || 20번 || [목차] == 소개 == 한태유는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선수이다. [[FC 서울]]에서 데뷔하여 군 복무를 제외하면 서울에서만 활약한 원클럽맨이다. == 선수 시절 ==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에서만 청소년 선수 시절을 보냈다. 이후 2004년 명지대를 졸업하고 서울로 연고 이전한 [[FC 서울]]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가 됐다. 등번호는 15번. 본래 팀에 입단할 때까지만 해도 공격수였으나, 김은중, 정조국 등 치열한 공격진에서의 경쟁을 우려한 당시 [[조광래]] 감독이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 변경을 권유했고, 신인 시절부터 수비형 미드필더로 적극 중용을 받았다. 특히, [[김성재(축구)|김성재]]가 떠난 뒤 팀의 미래를 책임질 수비형 미드필더로 성장하며 주목받았다. 2006년을 앞두고 '''등번호를 20번'''으로 옮겼다. 2007년 [[광주 상무 불사조]]에 입대했다. 광주에서도 공격수로 잠시 나서기도 했다. 2008년 말 군복무를 마치고 FC 서울에 복귀했다. 이 시기에 [[허정무호]]에 선발되기도 했다. 2009년을 앞두고 본래 번호인 '''등번호 20번'''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투박한 스타일인 한태유는 [[세뇰 귀네슈]]의 중용을 받지 못하며 [[김한윤]]에게 밀렸다. 이후 [[넬루 빙가다]], [[황보관]] 체제 아래서도 [[최현태]]에게 밀리는 등, 중용받지 못하며 그저 그런 선수로 잊혀져 갔다. 그러나, [[최용수]] 감독이 정식 감독이 된 2012년 반전이 일어났다. [[하대성]]과 [[고명진(축구선수)|고명진]]의 수비력을 보완해 줄 적임자로 한태유가 중용받기 시작했다. 26경기를 뛰며 K리그 기준으로 데뷔 최다 출전 기록을 세웠다. 또한 개인 커리어 세 번째 우승이자, 주전 선수로서 첫 리그 우승을 기록하게 됐다. 시즌이 끝나고 팀과 2년 재계약을 맺었다. 2013년에는 [[최현태]]과 번갈아 출전했다. 그러나, [[최용수]] 감독이 수비형 미드필더를 아예 두지 않는 전술을 택하고, 스리백에 빠지며 한태유는 스리백으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다 시즌 후반기에 시즌 아웃을 당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부상의 여파인지, 2014년에는 리그에서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며 팀과 계약이 끝났다. 아무리 주전 선수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오직 서울에서만 10년을 넘게 뛴 선수가 은퇴식이나 어떤 작별 인사 없이 팀을 떠난 건 다소 아쉬운 부분. == 플레이 스타일 == 큰 피지컬, 태클, 거칠음, 활동량 등 수비형 미드필더로써 갖춰야할 부문은 갖춘, 수비력이 돋보이는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팀의 궂은 일을 맡아가며 팀에 헌신했다. 그러나, 발밑이 좋지 않고, 지나치게 거칠다는 단점이 있었다. == 근황 == 한동안 근황이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울산 남구의 생활축구팀인 청파 FC 소속으로 뛰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다른 생업이 있는 것인지는 불명. [각주] [[분류:1981년 출생]][[분류:대한민국의 축구선수]][[분류:FC 서울/은퇴, 이적]][[분류:상무 축구단/전역]] [[분류:학성고등학교 출신]] [[분류:명지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