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한필동}}}'''[br]'''韓弼東'''}}}}}}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한필동.jpg|width=100%]]}}} || || '''본관''' ||[[청주 한씨]][* 공안공파(恭安公派) 32세 동(東) 항렬.] || ||<|2> '''출생''' ||[[1921년]] [[1월 20일]] ||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홍성)|금마면]] 부평리 254번지 || ||<|2> '''사망''' ||[[1993년]] [[1월 14일]] (향년 71세) || ||[[미국]]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군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받았다. [[독립유공자]] [[유중권]]은 큰외할아버지, [[이소제]]는 큰외할머니, [[유예도]]는 어머니이며, [[유우석]]은 외당숙, [[유관순]]은 당이모이다. == 생애 == 1921년 1월 20일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홍성)|금마면]] 부평리 254번지에서 아버지 한철유(韓哲裕, 1888. 2. 8 ~ ?)와 어머니 [[유(성씨)|고흥 유씨]](高興 柳氏) [[유예도]]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큰아버지 한서우(韓瑞禹, ? ~ 1894)에 입양되었다. 어머니 유예도는 1919년 4촌 동생인 [[유관순]]과 함께 [[경기도]] [[경성부]] [[종로2가|종로2정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파고다공원]]과 충청남도 [[천안시|천안군]] [[병천면|갈전면]](現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병천리 아우내장터에서 [[3.1 운동]]에 참여했고, 해당 공적을 인정받아 아들 한필동과 함께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오사카대학|오사카외국어대학]]에 입학해 [[영어]]를 전공, [[중국어]]를 부전공으로 하며 공부했으나, 1944년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이후 중국어 능력을 인정받아 [[후난성]] [[창사시]] [[일본 제국 육군]]0 제64부대 소속 중국군 포로 감시병으로 근무하다가 탈출하였다. 포로 감시병 근무 당시 포로로 있던 주시영(朱始榮) [[국민혁명군|중국군]] 상교의 부탁으로 중국군 지하조직과 연결해 1944년 11월 중국군 유격대의 도움으로 집단 탈출을 계획해 주시영 상교 및 중국군 장교 12명과 사병 5명을 구출하고, 창사 감옥을 탈출해 별동군 제4종대 제3대대가 있는 철부항에 도착했다. 탈출 후 중국군 중위 계급을 받고 일본군 정보 수집 및 분석, 포로 심문, 심리전 전개 등의 업무를 맡다가 1945년 2월 [[충칭|중경]] 광복군 총사령부로 후송되어 광복군에 입대했다. 광복군 입대 후 토교대 간부로 근무하며 임정요인 호위, 총사령부 지시에 의한 공작 수행 및 향후 국군 간부 양성을 위한 군사학, 정치학 교육을 받았다. [[8.15 광복]] 후 대한민국 육군 헌병 장교로 임관하였고, 1949년 6월 육군 [[제1보병연대]] 헌병대장으로 근무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부평구|부평]]지구 헌병대장으로 적군의 남하를 막고 도주하는 병사들과 그 들이 도주 중 버린 무기들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5020400239106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5-02-04&officeId=00023&pageNo=6&printNo=13468&publishType=00010|수습하였다]].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협정]] 직전인 1953년 6월 18일 마산 포로수용소 36경비대대장으로 재직 시 [[원용덕]] 국군 헌병총사령관의 명으로 [[송효순]] 육군 헌병부사령관, [[홍구표]] 헌병사령부 작전처장과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기획하여, 남선전기 마산지점의 도움을 받아 단전시킨 후 포로들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3072600329204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7-26&officeId=00032&pageNo=4&printNo=8562&publishType=00020|탈출, 석방시켰다]]. 당시 마산 포로수용소 총 수용인원 3,825명 중 2,936명의 포로가 탈출에 성공, 석방되었다. 휴전 후 제3 CID(범죄수사대)대장을 역임하고 1959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1960년 전두환의 처숙부인 [[이규광]] 준장의 헌병감 재직 당시 공금횡령 등 각종 비행사실을 고발하였다. 이후 일진진흥회장으로 회사를 경영하며 6.25 전쟁 및 반공포로석방에 관한 증언을 하였다. 1976년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민하여 보그호텔 LA지사에서 근무했다. 1992년 4월에는 육군 헌병사령부 제2과가 [[한국독립당]]의 와해 및 [[백범 김구 암살 사건|백범 김구 암살]] 등 정치공작을 위해 극비리에 설치된 부서로, [[백범 김구 암살 사건]] 당시 음모를 계획했으며 그 책임자는 [[전봉덕]] 헌병사령부 부사령관이었다고 [[https://imnews.imbc.com/replay/1992/nwdesk/article/1913698_30556.html|증언하였다]]. 또한 전봉덕은 백범 김구 신변에 관한 일체의 정보를 수집해 [[영등포]]에서 근무하던 장은산 포병사령관에 제공한 뒤 암살 음모를 실행에 옮겼으며, [[안두희]]가 배후로 지목한 [[김창룡(군인)|김창룡]]은 당시 제1보병연대 일개 정보과장으로서 암살 지령을 내릴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1963년 광복군 복무 및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1993년 1월 14일 로스엔젤레스 리버사이드 카운티 와일도마에 있는 인랜드 밸리 종합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에 있는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되었다. == 참고자료 ==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Merit&mngNo=10829|독립유공자 공훈록]] * 독립운동사 제6권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한국광복군/군인]][[분류:홍성군 출신 인물]][[분류:청주 한씨 공안공파]] [[분류:연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 [[분류:독립유공자 후손]] [[분류:대한민국의 군인]] [[분류:6.25 전쟁/군인]] [[분류:1921년 출생]] [[분류:199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유중권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