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의양문충자(宜陽文忠子)[br]{{{+1 韓休 | 한휴}}}''' || || '''작호''' ||<(> 의양현자^^(宜陽縣子)^^ || || '''시호''' ||<(> 문충^^(文忠)^^ || || '''성''' ||<(> 한(韓) || || '''이름''' ||<(> 휴(休) || || '''자''' ||<(> 양사(良士) || || '''부친''' ||<(> 한대지(韓大智) || || '''조부''' ||<(> 한부(韓符) || || '''증조부''' ||<(> 한현(韓賢) || || '''출생''' ||<(> 673년 ~ 740년 || || '''본적''' ||<(> 경조(京兆) 장안현(長安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재상으로 자는 양사(良士). == 생애 == 673년에 한대지(韓大智)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휴는 제거에 응시하여 도림현승(桃林縣丞)으로 제수되었고, 다시 현량과에 응시하였다. 710년, [[예종(당)|예종]]의 아들인 [[이융기]]가 태자가 되어 동궁에서 국정에 대해 자문하자, 한휴는 교서랑(校書郎) 조동희(趙冬曦)와 함께 을제(乙第)로 합격하여 좌보궐(左補闕)로 발탁되었다. 태자 이융기가 예종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한 뒤, 한휴는 좌보궐에서 시작하여 주작원외랑(主爵員外郎), 중서시랑, 예부시랑을 역임하였으며, 지제고를 겸임하였다. 724년, 산동 지역에 가뭄이 들자, [[현종(당)|현종]]은 왕구(王丘), 최면(崔沔), 한휴 등에게 자사직을 맡겼는데, 한휴는 이때 괵주(虢州) 자사를 맡았다. 한휴는 괵주 자사를 맡으면서 괵주에 부과되는 세금이 너무 무겁다며 조정에 조세를 균등하게 부과할 것을 주청하였다. 중서령 [[장열]]이 반대하자, 한휴는 오히려 “자사로 있으면서 능히 백성들의 폐단을 구하지 못하면 무엇이 위정자라 할 수 있겠소! 만약 임금을 거역하여 죄를 얻는다면 달게 받겠소.”라고 말하며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한휴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뒤에 한휴는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난다. 한휴는 모친상을 당할 때 조정에 자신의 상기를 다 채울 수 있도록 주청하였고, 상기를 모두 채운 뒤에 공부시랑(工部侍郎)으로 제수되었고 다시 지제고를 겸임하였으며,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옮겼다. 733년, 시중 배광정(裴光庭)이 병으로 죽자, 현종은 중서령 [[소숭]]에게 배광정을 대신할 조정의 현명한 재능을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소숭은 한휴를 현종에게 천거하였다. 한휴는 소숭의 천거로 황문시랑(黃門侍郎),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임명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소숭은 본래 한휴의 온화하고 차분하며 절제하는 성격을 마음에 들어하여 한휴를 천거하였는데, 소숭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한휴는 성품이 매우 강직하였고 아첨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한휴는 어전에서 자주 소숭을 비판하여 결국 소숭과 한휴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한휴는 그 해에 은청광록대부가 더해지고 공부상서로 옮겼다. 736년, 한휴는 태자소사로 임명되고 의양현자(宜陽縣子)로 책봉되었고, 740년에 병으로 죽었다. 조정에서는 한휴를 양주(揚州) 대도독으로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762년에는 다시 태자태사로 추증되었다. == 여담 == * 한휴는 전술하였듯 성격이 강직하여, 자신을 천거했던 소숭과 의견에서 대립이 일어나기도 했다. 송경(宋璟)은 한휴의 강직한 성품을 보고 “한휴가 이렇게 유능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진 이의 용기로다.”라고 말할 정도로 한휴를 칭찬하였다. * 만년현위(萬年縣尉) 이미옥(李美玉)이 죄를 저지르자, 현종이 이미옥을 영외로 유배시키도록 특명을 내렸는데, 한휴는 >이미옥은 다만 낮은 지위에 있고 그가 범한 바도 또한 큰 죄가 아닌데, 지금 조정에는 아주 간악한 이가 있고 오히려 능히 떠나지 않는데, 어찌 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취할 수 있습니까? 신이 삼가 보건대, 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 정백헌(程伯獻)은 은총에 의지하여 재물과 이익을 탐하였고, 저택과 수레와 말은 참람을 넘어섰습니다. 신은 먼저 정헌백을 내쫓고, 그 뒤에 이미옥에게 죄를 묻도록 주청합니다. 라고 간언하였다. 현종이 불허하자 한휴는 다시 >이미옥은 저지른 죄가 아주 작은데 오히려 관용을 베풀지 않고, 정백헌은 매우 교활한 인물인데 어찌 불문에 부칠 수 있습니까! 폐하께서 만약 정백헌을 내쫓지 않으신다면, 신은 곧바로 감히 조서를 받들어 이미옥을 유배시키지 않겠습니다. 라고 간언하였다. 현종은 한휴의 강직함에 감명을 받아 결국 한휴의 주청을 따랐다. * 한 신하가 현종에게 “한휴가 재상이 되고 나서부터 폐하는 단 하루도 즐겁게 지내신 적이 없습니다. 왜 한휴를 좌천시키지 않으십니까?”라는 말을 하자, 현종은 오히려 “나의 모습이 비록 야위었지만 천하의 백성들은 반드시 살이 쪘을 것이다. 한휴는 항상 힘써 다투지만, 그가 퇴청한 후에 나는 누우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가 그를 기용한 것은 사직을 위한 것일 따름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 한휴는 슬하에 한호(韓浩), 한흡(韓洽), 한혼(韓渾), 한홍(韓洪), 한한(韓瀚), 한굉(韓汯), 한황(韓滉), 한회(韓洄), 한형(韓泂) 등 9명의 아들이 있었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73년 출생]][[분류:740년 사망]][[분류:시안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