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한흥삼}}}'''[br]'''韓興三'''}}}}}}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한흥삼.jpg|width=100%]]}}} || || '''이명''' ||배량(裵粱) || || '''본관''' ||[[청주 한씨]][* 공안공파(恭安公派) 29세 교(敎) 항렬. 족보명은 한현교(韓顯敎).] || ||<|2> '''출생''' ||[[1875년]] [[10월 15일]] || ||[[전라도]] [[태인군|태인현]] 옹지면 일리[br]{{{-2 (現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오성리[*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 일리마을 1063번지[* [[https://theme.archives.go.kr/next/acreage/viewCadastreDetail.do?packid=0000262495&docid=0005453870&mngno=BJCA402904&type=12&want=1&arch_tp_id=12&formType=old&rtURL=%2facreage%2flistOldnameSearch.do%3fpage%3d16%5edepth1%3d%25EC%25A0%2584%25EB%259D%25BC%25EB%25B6%2581%25EB%258F%2584%5edepth2%3d%25EC%25A0%2595%25EC%259D%258D%25EA%25B5%25B0%5edepth3%3d%25EC%2598%25B9%25EB%258F%2599%25EB%25A9%25B4%5edepth4%3d%25EC%2598%25A4%25EC%2584%25B1%25EB%25A6%25AC%5earch_tp_id%3d12%5eserviceCode%3d1-1-3|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5년 당시 이 지번은 한흥삼의 형으로 추정되는 한윤식(韓允植, 족보명 한윤교韓允敎, 1870. 8. 25 ~ 1944. 12. 23)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 ||<|2> '''사망''' ||[[1912년]] [[7월 11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7월 12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 ||[[전라북도]] [[전주시|전주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42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75년 10월 15일 전라도 태인현 옹지면 일리(현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오성리 일리마을)에서 아버지 한혜리(韓惠履, 1848. 1. 21 ~ 1922. 10. 2)와 어머니 [[전주 최씨]](1849. 2. 5 ~ 1922. 12. 16)[* 최귀동(崔貴東)의 딸이다.]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20살 되던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전주시|전주부]]를 거쳐 전주부 창덕면 후정리(現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삼례역]]까지 진출하였으나 곧 일본군에게 패하자, 귀향하지 못하고 피신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듬해인 1906년 음력 4월 태인군 고현내면 원촌리(現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 [[임병찬]] 의병부대에 입대해 [[전라북도]] [[정읍시|정읍군]]·[[순창군]] 등에서 활약했다. 이후 최익현, 임병찬 의병부대가 해산하자 다시 기회를 엿보다가 1908년부터 [[임실군]] 출신의 의병장 정성현(鄭成玄)[* 鄭成'''{{{+1 鉉}}}''', 鄭'''{{{+1 聖}}}'''玄, 鄭'''{{{+1 聖鉉}}}''', 鄭'''{{{+1 聖賢}}}'''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이 부하 30명과 함께 총 20정, 칼 1자루를 휴대하고 의병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고, 가산을 팔아 총기, 병기 등을 다수 구입하여 마침내 1909년 음력 2월 10일, 정성현 의진에 입대했다. 그는 이 부대에서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11195|양운경]](梁雲京)·[[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10539|김윤오]](金允五)·[[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201|김낙필]](金洛必)·[[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193|김기만]](金琪萬)·[[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7298|이홍길]](李弘吉)·조기성(曺基成) 등과 함께 전라북도 [[김제시|김제군]]의 각 마을을 전전하며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모집하고 의병을 모으던 중, 1909년 8월 중순에 일본군 순사에 체포되었다. 결국 1909 9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강도 혐의로 징역 3년형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297&evntId=0034989568&evntdowngbn=Y&indpnId=000002072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12년 7월 출옥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출옥 직후인 7월 11일 별세하였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11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청주 한씨 공안공파]][[분류:정읍시 출신 인물]][[분류:1875년 출생]][[분류:191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