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2.jpg]] [목차] == 개요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20여 년간 [[경상남도]] [[함안군]] 성산산성을 발굴했을 때 출토된 6세기 [[신라]]시대 [[목간]] 245점. 현재 창원의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소장하였다. == 내용 == || [youtube(6pQLacTunqM)] || || [youtube(FTl-CwzTJ_M)] || || [youtube(H047gA4Vk7g)] || [[파일: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3.jpg]] [[https://portal.nrich.go.kr/kor/originalUsrView.do?menuIdx=865&info_idx=8376&bunya_cd=3016|사진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탈 -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의 국제적 위상, 함안 성산산성 목간의 개요]]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67호로 지정된 함안 성산산성에서 1991년부터 2016년까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작업한 목간 309점이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묵서가 없는 목간을 뺀 총 245점이 공개하였고, 이후로도 계속 발굴 중이다. [[목간]]은 [[문자]]를 기록할 수 있도록 다듬어진 목제품을 말한다. [[나무]]라는 재료의 특성상, 취득이 용이하고 간단한 작업으로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종이]]가 보급된 뒤에도 오랜 기간 서사재료로서 종이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 목간들은 [[가야멸망전]]이 종료된 직후, [[가야]]를 최종 병합한 [[신라]]에서 점령지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6세기 무렵 작성한 것이다.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은 하찰목간이 주종을 이루고, 일부 문서목간(文書木簡)과 부찰목간(附札木簡)도 포함되었다. [[파일: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4.jpg]] 성산산성에서 발견된 색인용 목간. [[일본]]에서는 ‘다이센지쿠(題籤軸, 제섬축)’라고 불리는 것으로, 일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다이센지쿠보다 한 세기 가량 더 앞선 것이다. [[https://www.fnnews.com/news/200402241049399708|사진 출처1: 신라 진흥왕때 호적 있었다…함안 출토 유물서 '색인용 목간' 확인]],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40224/8033163/1|사진 출처2: 동아일보 : 국내 최초 '서표' 신라 목간 발견…성산산성서 '제첨축'출토]] 목간에 기록된 지명은 대체로 현재 [[경상북도]]에 위치한 [[신라]]의 [[상주]](上州) 지역이다. 6세기 중반 신라 지방구조는 행정촌과 자연촌으로 나뉘는데,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있는 행정촌과 그 예하의 작은 촌락들은 자연촌으로 묶여 정비하였다. 성산산성 목간에서 다양하게 기록된 지명들도 행정촌과 자연촌으로 분류할 수 있다. 행정촌이라고 추정하는 지명은 구리벌(仇利伐), 감문(甘文), 고타(古阤), 이진지(伊津支), 추문(鄒文), 구벌(仇伐), 파진혜성(巴珎兮城), 소남혜성(小南兮城), 적벌(赤伐), 가개(呵蓋), 철산(鐵山) 등이 있다. 이들 행정촌명 목간에는 자연촌명이 한 개 이상 나온다. 그 외 행정촌으로 추정되는 지명은 비사벌(比思伐), 물사벌(勿思伐), 수벌(須伐), 이벌지(伊伐支), 급벌성(及伐城), 매곡촌(買谷村), 적성(赤城) 등이 있다. 현재 그 위치를 정확히 비정할 수 있는 지명은 총 13개가 있다. [[파일: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6.jpg]] < 표 출처: 신라의 목간(木簡)과 문서행정(文書行政). 이경섭(동국대학교 강사) > 예를 들어 '구리벌'은 남산신성비 제2비에 나오는 仇利城 또는 久利城과 관련지어 [[경상북도]] [[의성군]] 또는 안동 일대라고 추정하고, '고타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대이다. '급벌성'은 경덕왕대에 급산군(岌山郡)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어 현재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비정하였다. '구벌'은 지금의 경북 의성군 단촌면, '감문'은 지금의 경북 김천시 개령면이다. 인명은 지명과 함께 함안 성산산성에서 다수 확인되는 명문이다. 성산산성 출토목간에 보이는 묵서의 기재양식은 대체로 [지명+인명+물품명]의 순서를 따르므로, 지명과 물품명 사이에 들어가는 문자를 인명이라고 본다. 또한 일부 목간에서는 '官等명'과 '奴(人)명'을 기록했다. 인명+관등명 또는 인명+奴(人)+인명 형식으로 쓴 듯하다. '奴(人)명'의 경우, 노인의 인명이 어디에 위치하는지가 연구의 쟁점이다. 우선, 이와 같은 기재양식을 바탕으로 판독되는 인명의 수는 대략 130명이다.[[http://egloos.zum.com/yokeru/v/2207778|아라가야 멸망후 신라 목간 - 거리지(居利支), 파혜지(Ꜳ兮支), 구잉지(仇仍支지), 아나휴지(阿那休智), 아나설지(阿那舌只), 내은지(內恩支), 거조지(居助支), 구례지(仇礼支), 문시지(文尸只) 등]]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서 확인되는 [[신라]]인 전통 인명의 말음절은 -支 또는 -只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말음절로 끝나는 인명은 47개가 확인되었다. 고타(古阤)지역에서 확인된 인명 가운데 阤〃只, 阤〃支로 나오는 인물은 동일인인 듯하다. 이 지역에서는 -只와 -支를 혼용하여 썼을 가능성이 있다. 이외에도 말 음절이 -利, -伊, -次, -兮 등인 인명도 있었다. 말음절이 -智 또는 -知로 끝나는 인명은 약 20개가 있다. 이들 인명 뒤에는 大舍, 上干(支), 一伐, 一尺, 居伐尺과 같은 관등이 붙는 경우가 있는데, 신라의 12등 경위에 해당하는 大舍를 제외하고는 모두 외위이다. 즉 신라인의 인명은 마지막 음절이 -智, -知, -利, -次, -之, -支, -兮, -只 등인데, 그중 -智, -知 는 신라 6부 출신에 경위의 관등에 오른 인물들에게 붙었던 존칭접미사, -次, -之, -支, -兮, -只 는 지방출신에 외위 관등인 것이다. [[파일: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1.png]] [[파일: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5.png]] 진내멸(眞乃滅) 지방의 촌주(村主)가 중앙([[경주시|경주]]) 출신 관리에게 올린 보고서 목간. 잘못된 법 집행에 대해 그 잘못을 두려워하며 이를 상부에 보고하는 내용이다, "□법 30대(□法卅代)", "60일대(日代)" 등 표현은 30일, 60일이라는 기간을 명시해 놓은 법률용어로, 이를 통해 당시 신라는 율령을 통한 엄격한 지방 지배체제가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https://chagov.blog.me/220902722895|문화재청 공식 블로그: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서 확인한 6세기 신라의 율령체계]] [[주보돈]] 교수는 "성산산성 목간은 신라의 촌락 지배 강화와 함께 기존 외위(外位: 지방민에게 주어진 관등) 체계와 성립 과정, 이에 내재한 의미를 풀 실마리를 제공한다.", "신라가 새롭게 편입한 지역과 주민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운용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라고 평가했다.[[https://www.yna.co.kr/view/AKR20181023051400005|연합뉴스: '목간 보물창고' 함안 성산산성 목간의 역사적 의미는]] [[파일: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7.jpg]] 또한 성산산성에서는 목간과 더불어 다양한 [[신라]]시대 목제 공예품들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자료들은 6세기 한국의 목제공예술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https://www.nrich.go.kr/acpcs/page.do?menuIdx=747|#]]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신라]]가 [[가야]] 지역을 차지한 직후 작성된 목간들로, 당시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관련 항목 == * [[경산 신라 토지대장 목간]] * [[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 * [[경주 월지 목간]] * [[대구 팔거산성 출토 목간]] * [[하남 이성산성 출토 목간]] * [[경주 인용사지 출토 목간]] [[분류:신라의 도서]] [[분류:간독]] [[분류:함안군의 문화재]] [[분류:창원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