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일:external/690fa0e7d7901c946a6471e740a26b53eef1f58dea677881bc7038d9a33dc03c.jpg|width=500]] ||[[파일:external/eduhistory.culturecontent.com/11_4.gif|width=350]] || || [[고양시]]가 주최한 고양 행주 문화제 모습 || 잘못된 예. [[앞치마]]와는 다르다. || [[앞치마]]와는 다르게 하반신만 덮는 덮치마의 일종으로, 부엌에서 사용한다. 행주치마의 어원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행주 대첩]] '''당시 관군들이 적들에게 던질 돌멩이를 아녀자들이 덮치마를 걸치고 거기에 담아 날라줘서''' 그 치마를 행주치마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낭설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책에도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이다. 최초의 기록은 1517년 최세진이 쓴 '[[사성통해]]'로, 행주 대첩이 있기 76년 전 이야기다. 행주치마의 어원은 'ᄒᆡᆼᄌᆞ쵸마'이다. 쵸마는 당연히 [[치마]]를 뜻하고, ᄒᆡᆼᄌᆞ(행자)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 1. 절에서 식사공양 등을 하는 [[행자]]승들이 걸치던 덮치마 라는 것이 하나이고, * 2. 닦는 헝겊이라는 의미의 '말포抹布'를 의미한다는 것이 또 다른 설.[* [[훈몽자회]]는 이 뜻으로 'ᄒᆡᆼᄌᆞ'를 풀이하고 있다.] 이렇게 따지어 보아 반대로 행주치마에서 행주산성이 나온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것도 낭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행주(幸州)라는 지명이 고려 초기부터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동래성 전투]]에서 비슷하게 나온다. 이는 엄연한 정사 내용이다. 정확히는 여인 2명이 [[기와|기왓장]]를 던져서 왜군과 싸우는 내용이다. 현재 동래구 [[복산동(부산)|복산동]]에 있는 송공단 의녀비가 바로 두 여인을 기리는 비이다. [[분류:의류 잡화]][[분류:낭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