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鄕兵日記. [[임진왜란]] 당시 [[영남]] 북부 지역의 의병진을 총지휘하였던 의병장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년~1593년)가 1592년부터 이듬해인 1593년까지 약 1년여간 매일의 일상을 저술한 진중[[일기]]. 총 2책.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의 [[광산 김씨]] 종가에서 관리하는 숭원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퇴계유묵(退溪遺墨), 전가보첩(傳家寶帖) 등의 전적들과 함께 "후조당유물"이란 명칭으로 묶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다. == 내용 == [[경상북도]] [[안동시|안동]] 출신의 문신인 김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후 판관 [[정기룡]](鄭起龍)과 함께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개령(開寧)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상주성을 일시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1593년에 물밀듯이 몰려오는 왜군에게 포위되어 [[경주시|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장렬히 순국하였고 훗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향병일기는 의병장 김해가 [[부산진 전투]]가 발발하던 1592년 4월 14일부터 경주에서 순국하기 바로 직전이던 1593년 6월 19일까지의 일을 직접 기록해놓은 일기로, 안동과 예안, 영주, 의성, 예천 등 영남 북부 지역에서의 의병 대장으로서의 활동과 예천, 용궁, 함창 등지에서 벌인 왜군과의 전투 과정과 각종 내역들, 그외 임진왜란 초기 영남 북부 지방의 의병 활동들에 대해 자세히 연구해볼 수 있는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광산 김씨 예안파 문중에서는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년~1593년)가 1592년에 향병일기를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 매원(梅園) 김광계가 28년간 [[매원일기]] 18책을, 손자 묵재(默齋) 김염이 5년간 [[묵재일기]] 3책을, 증손자 과헌(果軒) 김순의가 42년간 [[과헌일기]] 6책을 대대로 기록했다. 그 외에도 김해의 종형제인 계암(溪巖) 김령이 39년간 [[계암일록]] 8책을, 김염의 동생 김선이 3년간 [[여온일기]] 2책을 남겼다. 현재 향병일기가 보관된 문중의 숭원각에는 조선 시대 서책 수백여점이 보관 중이다. == 외부 링크 == * [[http://blog.naver.com/kstudy0700/220742979710|한국 국학 진흥원 공식 블로그 : 4대에 걸쳐 기록한 1백년간의 일기와 만나다]] * [[https://ko.wikipedia.org/wiki/%ED%96%A5%EB%B3%91%EC%9D%BC%EA%B8%B0|한국어 위키 백과 : 향병일기]]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03464&cid=51934&categoryId=54410|한국 향토 문화 전자 대전 : 향병일기]]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1551&cid=46669&categoryId=46669|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 후조당유물]] ==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64호 ==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0640000,37&flag=Y|문화재청 홈페이지 : 후조당유물 (後彫堂遺物)]] >이 유물은 광산 김씨인 후조당 김부필(1577년~1644년)이 나라에서 시호를 내릴 때 받은 교지와 「퇴계유묵」, 『향병일기』, 『전가보첩』 등 4종 6점이다. 김부필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던 인물이다. 그가 죽은 후 순조 2년(1802년)에 오위 도총부 도총관에 증직되었고, ‘문순(文純)’이란 시호를 받았다. > >그 밖에 광산 김씨의 유물로 문집, 서책 등 수백 점이 숭원각에 보호, 관리되고 있다. [[분류:조선의 일기]][[분류:광산 김씨]][[분류: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분류:안동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