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97년 출생]][[분류:1966년 사망]][[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나치당원]][[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심근경색으로 죽은 인물]][[분류:니더작센 주 출신 인물]] [include(틀:슈츠슈타펠/장성급 지휘관)] |||| {{{#!wiki style="margin: -4px -9px" [[파일:길레1.jpg|width=100%]]}}}|||| ||<#666> {{{#FFF 이름}}} ||<(>'''Herbert Otto Wilhelm Hermann Gille'''[br] 헤르베르트 오토 빌헬름 헤르만 길레|| ||<#666> {{{#FFF 출생}}} ||<(>[[1897년]] [[3월 8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간델스하임 || ||<#666> {{{#FFF 사망}}} ||<(>[[1966년]] [[12월 26일]], [[서독]] 하노버 || ||<#666> {{{#FFF 복무}}} ||<(>[[독일 제국군]](1914~1918) [br] [[슈츠슈타펠]] (1931년 ~ 1945년) || ||<#666> {{{#FFF 최종계급}}} ||<(>[[독일 제국군]] 소위[br][[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계급)|대장]] (상급집단지도자) || ||<#666> {{{#FFF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br] [[제2차 세계 대전]] || ||<#666> {{{#FFF 주요 서훈}}} ||<(> [[철십자 훈장|다이아몬드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길레2.jpg|width=100%]] || || '''헤르베르트 오토 길레 (Herbert Otto Gille)''' || [[나치 독일]]의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계급)|대장]] == 초기 행적 == 독일 제국령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간델스하임에서 공장경영인의 아들로 태어난 길레는 [[1909년]]에 벤스부르크의 프로이센 왕국군 사관학교에 입학해 공부한 후 [[1914년]]에 [[베를린]]의 [[프로이센 왕국]] 고급유년사관학교로 이적했다. == [[제1차 세계 대전]] ==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 [[8월]]에 바덴 대공국군의 야전포병연대 사관후보생으로 참전한 그는 [[1915년]] [[1월]]에 소위로 승진해 1,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1919년]] [[3월]]에 제대한 길레는 [[1929년]]까지 각지의 농장에서 토지관리인으로 일하면서 [[철모단]]에 가입했다. == [[나치당]] 입당과 [[슈츠슈타펠]] 입대 == [[1929년]]부터 [[1933년]]까지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자동차 회사의 회사원으로 일한 길레는 [[1931년]] [[5월 1일]]에 [[나치당]]에 입당해 [[12월]]에 [[슈츠슈타펠|친위대]]에 입대했다. [[1933년]] [[4월 20일]]에 친위대 소위로 임관 후 [[1934년]] [[5월 29일]]에 [[무장친위대]]의 전신인 친위대 특무부대에 소속된 길레는 처음에는 제1연대 <도이칠란드>에 소속되었지만 [[1936년]] [[10월]]에 대위계급으로 제2연대 <게르마니아>로 이적했다. [[1935년]] [[1월 3일]]에 조피 샤를로타 멘네케와 결혼한 길레는 딸 하나를 슬하에 두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 친위대 소령계급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맞이한 길레는 [[폴란드 침공]]과 [[서부전선]]에서 <게르마니아> 제1 포병대대의 대대장으로 참전했다. [[1940년]]에 [[펠릭스 슈타이너]]의 눈에 발탁된 그는 제5 SS 기갑사단 <비킹>의 포병연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동부전선]]에서 분전하여 [[1942년]] [[10월]]에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고 [[11월]]에 친위대 소장으로 승진했다. [[1943년]] [[5월]]부터 [[1944년]] [[8월]]에 비킹의 사단장이 된 길레는 [[소련군]]을 상대로 분전하여 이름을 떨쳤는데 [[1944년]] [[1월]]부터 [[2월]]에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에서 비킹을 포함한 6개의 사단들이 소련군에게 포위되자 비킹 사단이 결사의 탈출작전을 벌여 길을 여는데 성공하기도 했었다.[* 이 공적으로 길레는 [[1944년]] [[4월]]에 기사철십자 다이아몬드 훈장을 받았는데 이는 27명에게만 주어진 훈장이기도 했다.][[1944년]] [[8월]]부터 제3 SS 기갑사단 <토텐코프>도 산하에 두어 제4 SS 기갑군단 사령관이 된 길레는 바르샤바 공방전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구출작전을 지휘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길레 대장.jpg|width=100%]]}}} || ||<#ddd>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길레 || [[1944년]] [[11월 9일]] 최종적으로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무장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하여 군단은 거의 괴멸되고 말았는데 그 후 독일의 패전이 다가오자 길레는 소련군에서 벗어나 연합군의 포로가 되기로 결심하여 남은 군단병력들에게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게했다. [[5월]]에 길레와 그의 군단병력은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 전후 행적 == 길레는 3년간 미군에게 억류된 후 [[1948년]] [[5월]]에 석방되었다. 그 후 [[서독]]의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서점을 경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퇴역군인을 위한 잡지인 도 편집했었다. 길레는 [[1966년]]에 [[심근경색]]으로 [[하노버]]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