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현제명}}}[br]玄濟明'''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현제명.jpg|width=100%]]}}} || ||<|2> '''창씨명''' ||玄山濟明|| ||구로야마 스미아키[* 이름 '濟明'을 훈독][br]구로야마 사이메이[* 이름 '濟明'을 음독]|| ||<|2> '''출생''' ||[[1903년]] [[1월 6일]][* 음력 1902년 12월 8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군]] 서상면 남산동[br](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남산동(대구)|남산동]])[*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3415|#]]]|| ||<|2> '''사망''' ||[[1960년]] [[10월 16일]] (향년 57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서울)|신당동]][br](現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신당동)||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본관''' ||[[연주 현씨]][* 판관공파 28세 병(柄)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 '''아명''' ||현수돌(玄水乭)|| || '''자''' ||소석(小石)|| || '''호''' ||석(石), 현석(玄石, 玹石)|| || '''종교''' ||[[개신교]]([[장로회]])|| || '''묘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순국선열묘역||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음악가, 성악가(테너), 작곡가.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延州)이며 아호는 현석(玄石)이다. [[홍난파]]와 함께 민족운동 단체 [[흥사단]](興士團)의 국내 조직인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하다 체포된 후 전향서를 내고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로 변절하였다. == 생애 == 1903년 1월 6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군]] 서상면 남산동(現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남산동)에서 아버지 현문구(玄文九, 1865. 11. 20 ~ 1947. 4. 1)[* 이후 현수봉(玄壽鳳)으로 개명했다.]와 어머니 [[경주 최씨]] 최국희(崔菊姬, 1883 ~ ?)[* 최문표(崔文杓)의 딸이다.]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현명돌(玄命乭, 1887. 6. 9 ~ 1963. 12. 3)[* 이후 현승환(玄承煥)으로 개명했다.]이 있었고, 아래로 현복남(玄福南, 1907. 3. 10 ~ ?)과 현순남(玄順南, 1913. 6. 1 ~ ?) 등 2명의 여동생이 있었다.[[http://scholar.dkyobobook.co.kr/searchDetail.laf?barcode=4050025675325|#]] [[대구종로초등학교|대구부 대남소학교]]와 [[계성고등학교(대구)|계성학교]]를 다녔고, [[대구제일교회]]에 들어가 교회 성가대에 입대하여 음악단원이 되었다. 이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음악 교육을 받았고 1923년에 졸업한 후 [[전라북도]] [[전주시|전주군]]에서 [[전주신흥고등학교|사립 신흥학교]]의 음악 교사로 근무했다. 1925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 있는 [[기독교]]계 무디성경학교에 입학했다가 [[인디애나]]에 있는 건 음악학교로 옮겨 1927년 졸업하였다. 귀국한 뒤에는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하고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1937년 5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관한 조선문예회 정회원으로 가입하였는데, 같은 해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듬해 6월 18일, 직전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던 [[이묘묵]](李卯默)을 비롯하여 정영도(鄭英道)·김여제(金與濟)·김여식(金麗植)·[[전영택]](田榮澤)·류형기(柳瀅基)·이명혁(李明赫)·박태화(朴泰華)·차상달(車相達)·하경덕(河敬德)·[[갈홍기]](葛弘基)·[[홍난파]](洪蘭坡) 등 12인의 [[흥사단]]원과 김기승(金基昇)·김노겸(金魯謙)·[[노진설]](盧鎭卨)·이기윤(李基潤)·최봉칙(崔鳳則) 등 5인의 동우회원 등 17인과 함께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단체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23&docId=534845&categoryId=46623|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에 [[http://db.history.go.kr/id/ma_016_0660_0010|가입했으며]], 8월 18일 위 사람들과 함께 흥사단에서 출단 처분을 [[http://db.history.go.kr/id/npsh_1938_08_18_v0001_0080|받았다]]. 이렇게 그는 수양동우회 사건 직후 정식으로 전향하여 [[친일파]]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음악가협회를 해체하고 이후에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에도 가입하면서 친일 행위를 하였던 전적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특히 일제 찬양적인 성격의 '''[[후지산]]을 바라보며'''에 작곡자로 개입하면서 친일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한국민주당]]에 가입해서 극우 보수파로 활동하여 반공, 반북 운동을 전개하였고 1946년에는 경성음악학교([[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전신)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53년 한국음악가협회 위원장,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영구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가 1960년 10월 16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현 중구 신당동)의 자택에서 [[간경변]]으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묘가 있는데, 그의 묘와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법조인이자 정치인 [[엄상섭]]의 묘가 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친일 경력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나마 엄상섭은 자신의 친일 경력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발언을 해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대표적인 친일 경력 반성 사례로 언급한 바 있다.] == 그 외 == 국내에서는 '''[[희망의 나라로]]''','''고향생각'''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친일반민족 행적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친일인명사전]]의 인명부에도 현제명이라는 이름이 올려져 있었다. 게다가 [[창씨개명]]에도 적극 동참해서 '''구로야마 사이메이(玄山濟明)'''으로 [[개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일단 이 노래는 1931년에 작곡되었고, 친일로 변절했던 시기는 1937년이다. ([[희망의 나라로]] 문서 참조.) 역대 [[음악가]]들 중 친일 행적이 드러나거나 논란이 된 유사 인물로는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와 [[홍난파]] 등이 있다. 월간 객석에선 음악가들의 친일 행위를 옹호하다가 호되게 까인 바가 있다. 현제명이나 [[홍난파]], [[이흥렬]] 같은 이들은 살고자 그런 것이라고... [[고향]]인 대구 중구에는 '현제명 나무'라고,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이팝나무]]가 있는데, 대구에서는 친일파인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나무가 있는 것이 싫어서 없애버리자고 난리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6&aid=0010494119|관련 보도]] [[광동고등학교]], [[김천고등학교]], [[고창고등학교]], [[광주숭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명지대학교]], [[경북대학교]], [[전북대학교]] 교가, [[SC제일은행|제일은행]] 시절 행가도 이 사람이 작곡했다. 장남 현상열(玄相悅)은 [[영화감독]]으로서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를 역임했고[[https://www.kmdb.or.kr/db/per/00005786|#]], 막내 딸 현해은(玄海恩)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교수를 역임했다. [[분류:한국의 성악가]][[분류:테너]][[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중구(대구) 출신 인물]][[분류:연주 현씨]][[분류:1903년 출생]][[분류:1960년 사망]][[분류:간경변으로 죽은 인물]][[분류:계성고등학교(대구) 출신]][[분류:연세대학교 재직]][[분류:대한민국의 장로회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