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현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조선 왕세자)] ---- [include(틀:조선의 왕자/중종 ~ 고종)]}}}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조선 제18대 국왕[br]{{{+1 현종 | 顯宗}}}'''}}}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현종 숭릉.jpg|width=100%]]}}} || ||<-2> {{{-2 숭릉 전경}}} || ||<|2> '''출생''' ||[[1641년]] [[3월 14일]][br](음력 [[인조]] 19년 2월 4일)|| ||[[청나라|청]] [[선양시|심양 봉천부]] [[봉림대군]] 관저[br](現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2> '''즉위''' ||[[1659년]] [[6월 28일]] (18세)[br](음력 [[효종(조선)|효종]] 10년 5월 9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2> '''사망''' ||[[1674년]] [[9월 17일]] (향년 33세)[br](음력 현종 15년 8월 18일)|| ||[[한성부]] [[창덕궁]] 양심합[* [[실록]]에는 현종의 승하 장소가 창덕궁 '재려(齋廬)'라고 기록되어 있고, [[국조보감]]에는 '여차(廬次)'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재려는 '제사를 지내는 곳', 여차는 '상주가 상중에 지내는 움막'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종이 죽기 2개월 전에 모후 [[인선왕후]]가 승하했기 때문이다. 양심합은 [[창덕궁 대조전]] 남쪽에 있는 별각이다.][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 '''능묘''' ||[[숭릉]](崇陵)|| ||<|6>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세손}}}'''|| ||[[1649년]] [[3월 30일]] ~ [[6월 22일]][br]{{{-2 (음력 [[인조]] 27년 2월 18일 ~ 5월 13일)}}}|| ||'''{{{#ffd400 조선 왕세자}}}''' || ||[[1649년]] [[6월 22일]] ~ [[1659년]] [[6월 28일]][br]{{{-2 (음력 [[효종(조선)|효종]] 즉위년 5월 13일 ~ 효종 10년 5월 9일)}}}|| ||'''{{{#ffd400 조선 제18대 국왕}}}'''|| ||[[1659년]] [[6월 28일]] ~ [[1674년]] [[9월 17일]][br]{{{-2 (음력 현종 즉위년 5월 9일 ~ 현종 15년 8월 18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원(棩)[* 휘 棩의 발음은 [[http://sillok.history.go.kr/id/kpa_12609009_003|《인조실록》]]에 따르면 '원'이고 [[https://jsgimage.aks.ac.kr/view?qCond=bookId&q=K2-356_001&startIndex=5&pageIndex=1&pageUnit=20&sortField=&viewType=&id=20181019031916330|《열성어휘》]]에 따르면 '연'인데, 전자는 당사자인 현종이 생존해 있던 시기에 쓰인 기록이고 후자는 현종 사후 약 2백여 년 뒤에 작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연'보다는 '원'이 맞는 발음일 것이다. '연'으로 읽으면 '굽다'라는 뜻인데, 1648년 음력 9월 9일 작성된 현종의 정명단자에 따르면 棩은 '굽어지지 않았다'라는 뜻에서 채택된 글자인 데다, 현종의 고조부인 [[선조(조선)|선조]]의 휘가 이미 '연'이므로 현종의 휘를 '연'으로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 || '''부모''' ||부왕 [[효종(조선)|효종]][br]모후 [[인선왕후]] || || '''형제자매''' ||1남 7녀 중 장남 || || '''배우자''' ||[[명성왕후]] || || '''후궁''' ||없음[* 역대 조선 왕들 중 [[경종(조선)|경종]], [[순종(대한제국)|순종]]과 함께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다.] || || '''자녀''' ||[[숙종(조선)|1남]] 4녀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자''' ||경직(景直) || || '''전호''' ||효경전(孝敬殿) || || '''묘호''' ||'''[[현종]](顯宗)''' || || '''존호''' ||소휴연경돈덕수성[br](昭休衍慶敦德綏成) || || '''시호''' ||'''[[조선]]''': 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br](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 '''[[청나라|청]]''': 장각(莊恪) ||}}}}}}}}}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ttachment/1263947987_126346466324419.jpg|width=300]]}}}|| || '''현종의 어필'''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제18대 [[임금]]. [[예송논쟁]]에 휘말렸던 [[정치]]적 입지 때문에 [[단명]]한 국왕으로 착각되기도 하지만 현종의 재위 기간은 15년으로 짧지 않으며, 10년간 재위했던 아버지 효종과 비교하더라도 긴 기간이다. 다만 나이 자체로만 보면 33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승하]]했으므로 오래 살지는 못한 편이다. == 생애 == === 출생 === [[효종(조선)|효종]]의 외아들이고 [[숙종(조선)|숙종]]의 아버지이자 [[경종(조선)|경종]]과 [[영조]]의 할아버지로 효종이 '''봉림대군'''이던 시절 [[선양시|심양]]에 인질로 있을 때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역대 임금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임금[* [[고려]] 영토가 아닌 [[원나라]] 영토였던 [[쌍성총관부]] 화령([[함경남도]] [[영흥군]]. [[북한]] 행정 구역 기준 [[금야군]], [[요덕군]])에서 태어난 [[태조(조선)|이성계]]가 있으나 [[쌍성총관부]]는 고려 시대에 [[이성계]]의 활약으로 수복하여 동계(동북면)에 재편입되었고 조선 [[왕조]] 창립 후에 국호를 [[명나라]]에 문의할 때 조선이라는 명칭과 함께 이성계의 [[고향]]이었던 [[화령]]이라는 지명이 아예 [[국호]] 명칭 후보로 고려되었을만큼 조선 왕조 입장에서는 조선령이라는 인식이 있었다.]이기도 하다.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황태손|왕세손]](王世孫)이 되었고 아버지 [[효종(조선)|효종]]이 즉위한 뒤에는 정식 [[왕세자|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는 [[조선/왕사|조선 왕사]]에서 [[단종(조선)|단종]]과 더불어 드물게 세손-세자-왕의 절차를 정상적으로 밟은 극소수 경우에 해당한다. === 즉위 === [[1659년]](현종 즉위년) 아버지 효종이 죽은 뒤 즉위하자마자 '''[[예송논쟁]]'''에 크게 휘말리게 된다. 이 예송논쟁은 [[한국사]]에 자주 언급될 정도로 당시에는 중요한 정국의 [[이슈]]가 되었지만, 알려진 것만큼 현종과 당시 조정 신료들이 재위 기간 내내 예송논쟁에만 매달린 건 아니었고 아들인 숙종의 [[환국(조선)|후대 사례]]이나 다른 [[나라]]의 사례와 비교해보면 심각한 정쟁 이슈를 [[평화]]적이고 유려(柔麗)하게 풀어나간 현종의 정치력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으나 그 과정에서 자기 아내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정권]]에 따라 이용하고 [[신하]]들까지 죽이는 등 피바람을 부른 아들 [[숙종(조선)|숙종]]이 정치력으로 보면 아버지인 현종보다 아래라 볼 수도 있다. 아무리 정치라도 극단적인 수단 없이 평화롭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래서 현종이 더 오래 재위했더라면 [[붕당]]은 평화로운 논쟁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현종은 아들인 숙종과 달리 강경하게 [[환국(조선)|환국]]과 [[사화]]로 인한 피바람을 일으키지 않아서 [[명군]]이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현종은 손자 [[영조]]와 현손자 [[정조(조선)|정조]]의, 평화적인 붕당으로 대립하는 당을 서로 견제하고 자신은 [[중립]]을 지키는 [[균형]] 정책인 [[탕평책]]의 입안을 선구 · 선도한 [[군주]]라 할 수 있다. 1663년(현종 4년) 발생한 공의/사의 논쟁에서도 왕권과 신권의 대립에서 강경한 입장으로 [[서필원]]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신권의 상징인 [[송준길|양]][[송시열|송]]조차도 필요할 경우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수 있다는 말도 하였던 바 있다.[[https://sillok.history.go.kr/id/kra_10506003_003|링크]] 논쟁이 격해지는 와중에도 탁월한 정치력으로 자신의 뜻이 충분히 전달되었다는 느낌이 들자 논쟁을 종결시키며 정국을 안정시켰다. [[1666년]](현종 7년) [[귀신]] 소동이 [[궁궐]]에서 일어났는지 현종이 직접 대화 중 귀신 소동에 대해 언급한 장면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현종실록》 권12 7년([[1666년|1666]], 병오 / [[7월 18일]] 정유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ra_10707018_001]] ] 백성들을 장악하기 위하여 [[오가작통|오가작통법]] 사목을 강력히 제정했고 수리 시설과 양전 사업에 힘썼으며 나라 [[재정]]을 수습하고 동[[활자]] 10만 개를 주조하는 등의 치적도 남겼다. 국가적인 관계와 대국가적인 문제로 [[효종(조선)|효종]] 대에 준비하던 [[북벌]](北伐)을 일시 중단시키기도 했으며 군사적으로 [[북벌]] 정책은 계승하지 않았으나 군사력 강화 정책을 계승하여 화포([[신기전]])를 개량하여 대량 생산하는 등 군비 증대를 했고 온천 행차 때마다 군사 훈련을 시키기도 했을 정도로 군사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큰아버지 [[소현세자]]처럼 서양의 문물이나 과학 기술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서 [[혼천의]]의 개량이나 [[자명종]] 제작 착수에도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1669년]](현종 10년), [[서인]]의 영수 [[송시열]]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씨]]가 같으면 [[본관]]이 다르더라도 [[혼인]](동성혼인 금지)을 못하게 했으며 문묘 안에 계성묘(階聖廟)[* 계성(階聖)의 단어 뜻이 성인의 디딤돌, 즉 성인을 태어나게 한 인물이란 의미다.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 안자(안회)의 아버지인 안무유(顔無繇), 증자(증삼)의 아버지인 증점(曾點), 공자의 아들이자 자사의 아버지인 공리(孔鯉), 맹자의 아버지인 맹격(孟激), 정자(정이, 정호)의 아버지인 정향(程珦), 주자(주희)의 아버지인 주송(朱松), 채침의 아버지인 채원정(蔡元定)을 배향했다.]를 세웠다. 몸이 병약하여 평생 동안 고생했는데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언급으로는 [[종기]]를 달고 살다시피 했으며 종기에서 고름이 한 되 가량 나온 적도 있다고 한다.[* 《현종실록》 권17 10년 11월 17일 병오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ra_11011017_001]] ] 그래서인지 재위 기간 내내 [[온천]]을 자주 애용한 [[군주]]로 가히 조선 역대 국왕 중 '최고의 온천 마니아'라 해도 과언이 아닌 왕이다.[* 그 외 온천을 자주 애용한 왕으로는 [[세종(조선)|세종]], [[세조(조선)|세조]], 숙종, 영조가 있다. 세종은 안질(眼疾), 세조는 가려움증, 숙종은 어지러움, 영조는 피부병으로 고생했는데 [[온양온천]]이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이유가 네 임금들이 모두 여기서 큰 효험을 봤다고 했기 때문. 물론 현종도 온양온천을 자주 이용하고 애용했다고 한다.] === 사망 === 조선 민생 [[역사]]상 최악의 순간을 넘긴 임금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인 [[이상 저온]] 현상(소빙기 현상)으로 인해 [[곡물]] 생산이 뚝 떨어져 조선 역사상 최악의 기근이 일어나고 각종 [[전염병]]이 연이어 창궐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났다.''' [[경신대기근]] 이전의 효종 시대 ~ 현종 초기 동안 [[사치]] 풍조가 만연했던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세계 대공황|경제 대공황]]보다 몇 수 위의 [[호황]] 뒤의 [[재앙|대재앙]]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현종은 나름대로 민생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고 현종 시대에 [[대동법]]이 [[호남]](전라도) 지역까지 확대 시행되었는데 호남이 [[쌀]] 곡창 지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민생고 해결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 듯하다. 현종은 [[붕당]]이 가장 격렬하게 날뛰는 [[예송논쟁]]과 심각한 [[경신대기근|자연재해]] 속에서 왕으로서의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그 때문인지 [[스트레스]]를 자주 받아 잔병에 시달렸고 결국 오래살지 못하고 [[1674년]](현종 15년), 30대 초반의 [[나이]]로 끝내 단명한다.[* 다혈질이었던 아내 명성왕후, 아들 숙종보다 훨씬 단명하였다. 그 명성왕후도 아들을 살린답시고 무속신앙에 기반한 무리한 얼음물세례를 받다가 당시로서는 치명적인 감기(독감)에 걸린것 때문에 죽은것이라지만 그 나이도 어쨌든 40대였음을 감안하면 30대에 죽은 현종의 단명이 더욱 체감된다. 거기다 아들이면서 자신대에는 세자였을 숙종, 그리고 아내이자 중전인 명성왕후보다도 스트레스를 받기도 쉬운 왕이라는 위치 그리고 경신대기근을 비롯한 고난들이 몰려있는 상황이면 아무리 온화한 성격의 왕이라 평가받아도 화를 어느정도 많이 낼법도 한데 실록에도 안쓰여있을 정도면 내야할 화조차도 거의 내지를 못할 정도라서 더욱 단명에 영향이 갔을것이다.][* 물론 이런 현종보다도 화를 안낼정도로 답답하게 착하면서 60대로 조선시대 치고 장수한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도 있긴하지만 이쪽은 친정 집안이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다소 건강한 체질을 타고난데다(현종의 친가인 조선 왕족들은 세조 대 이후로 대대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어쨌든 왕비에 불과하였고, 되려 폭군인 남편 연산군을 유일하게 거리낌없이 대해도 무사할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다는 점을 감안해야한다. 무엇보다 이쪽은 결국 폐위가 되어서 되려 30대 후반에는 궁중생활에서 강제적으로나마 벗어난데다 친정이 박살난것을 제외하면 인현왕후와 달리 폐비인거 치고도 대우가 매우 좋았던 것도 있다.] === 사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숭릉.jpg|width=100%]]}}} || || {{{#gold ''' 숭릉 '''}}} ||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숭릉]](崇陵). 아내인 [[명성왕후]] 김씨와 나란히 묻혔다. 숭릉은 다른 점과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정자각이 8각 지붕이라는 점이다. 이 능은 비공개 능역이었는데 [[동구릉|동구릉 관리소]] [[직원]]에 의하면 숭릉 남쪽에 [[연못]]이 있는데 그 곳에 서식하는 희귀 [[새|조류]]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오색[[딱따구리]], [[해오라기]], [[딱새]], [[직박구리]] 등의 희귀한 조류들이 생태군을 이루고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능의 정자각 등에 파손된 부분이 있어 복원 정비 중이며 [[동구릉]]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서 [[안전]]상의 이유로 비공개하고 있었으나 [[2013년]] [[1월 1일]]부터 전면 개방해서 이제는 찾아가서 볼 수 있다. [[동구릉]]의 능들이 거의 그렇듯이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는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 평가 == [[북벌론]]이라는 대표적 키워드가 있는 아버지 [[효종(조선)|효종]]과 [[장희빈]]과 [[인현왕후]]로 잘 알려진 아들 [[숙종(조선)|숙종]]에 가려서 상당히 관심도나 존재감이 떨어지는 임금이다. 심지어는 [[예송논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무능하거나 심약한 군주로 기억되고는 한다.[* 이 평가는 현종 본인한테 매우 억울한 평가인게 예송논쟁의 원인은 현종의 할아버지 인조에게 있었고,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이 원손을 밀어내고 세자가 될 당시에는 현종 본인은 어린 나이였다.] 존재감과 개성이 그렇게 뚜렷한 [[조선/왕사|임금]]은 아니지만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중심으로 빠진 [[붕당]] 정국의 균형을 일정하게 맞추려고 어느 정도 노력했고, 여기에만 매달리지 않아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 빠진 나라를 재건해 수습하는데 노력하는 등, 치적을 제법 남겼다. 더군다나 2차 [[예송 논쟁]] 당시에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아버지 [[효종(조선)|효종]]의 위상을 장자(長子)로 확정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서인]]들의 기세가 대폭 꺾일 정도였고, [[김수흥]] 같은 거물들도 군소리 못하는 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그러고 나서 1달여 만에 [[사망|훙서]](薨曙)해서 문제였지만 말이다. [[예송논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조선]] [[조선/왕사|역대 국왕]] 중 과소 평가되고 있는 군주 중 1명. 다만 현종이라는 동일한 [[묘호]]를 썼던 전대의 군주가 고려 [[현종]]이라는 뛰어난 군주인 것을 생각하면, 당대에는 높은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다.한 마디로 '''숨겨져 있는 명군이자 성군'''이라 할 수 있다 == 기타 == * 현종은 보통 유약하다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지는 경우가 잦은데 이는 아버지 대의 가계를 살펴보면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현종의 부왕이었던 [[효종(조선)|효종]]은 왕비 [[인선왕후]]와의 사이에서 3남 7녀를 두었으나 이 중 현종의 누나 1명(숙신공주), 형 1명과 남동생 1명, 여동생 1명은 일찍 죽었고 실질적으로 장성한 자녀들은 1남 5녀였다. 이 중에서도 현종은 위로 5살, 1살 차이 나는 큰누나와 작은누나가 있었고 아래로도 4명의 여동생들이 있었는데[* 효종의 막내딸 [[숙녕옹주(효종)|숙녕옹주]]와 현종의 나이 차이가 무려 8살이다.] 이렇게 [[누나]]들과 [[여동생]] 사이에서 자라났던 현종은 [[가족]] 덕인지 상당히 온화한 [[성격]]이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유약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누나들과 여동생들이 대부분 [[여걸]]에 가까운 성격이기 때문이다. * [[효종(조선)|효종]]의 [[부마]]였던 정재륜[* 즉, 현종의 매형.]이 궁궐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야사(역사)|야사]] 공사견문록을 보면 현종의 소소한 일화들도 적혀 있다. 비록 정사는 아니지만 저자 정재륜이 효종의 부마였고 그 시대의 사람으로 궁궐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책이므로 신뢰도는 낮지 않을 것이다. 정재륜(1648년 ~ 1723년)은 효종의 4녀인 [[숙정공주]]의 남편으로 아버지는 [[영의정]] [[정태화]]이다.[* 다만 족보상으로는 작은아버지인 정치화의 양자로 들어갔다. 정치화 역시 좌의정까지 지낸 인물인데 친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집안과 능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가 부마가 된 것도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부마 재혼 금지 법제화'''의 계기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숙종 대에 [[숙정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 죽자 전례를 들어 재혼을 청했는데, 거절당하고 도리어 부마 재혼 금지만 법제화되었다. 정재륜의 후사는 종손(從孫) 정석오를 죽은 외아들의 양자로 들임으로써 잇게 됐다. 조선 전기 [[정인지]]의 차남 정현조는 [[세조(조선)|세조]]의 부마가 되었으나 공주가 자녀를 낳지 못하고 죽자 재혼했다는 걸 보면 이전에는 상황에 따라서 재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 당시 궁궐에는 [[광해군]]의 후궁인 허씨를 모셨던 조씨 성의 상궁이 있었는데 조상궁은 현종의 조부인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것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던 듯하다. 어쨌든 현종이 탄생한 후 조 상궁이 현종의 보모가 되었는데, 어느날 어린 현종이 [[불장난]]을 하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가 [[인조반정|불]]로써 나라를 얻은 것을 배우려는가"'''라고 중얼거렸다. '불로써 나라를 얻은 것'은 인조반정 때 궁궐이 불에 탔던 것을 의미한 것으로 이건 그야말로 [[인조]]의 집권을 비야냥대는 말이다. 현종은 이를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가 뒷날 즉위 후 조 상궁을 불러서 그 일을 거론하며 "내가 그거 그냥 부왕께 일러바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대가 나를 양육한 공이 있었기에 차마 중한 벌을 받게 할 수 없어서 참고만 있었다"고 타이른 후 조 상궁을 출궁만 시키고 더 이상 벌을 주지 않았으며 조 상궁이 죽을 때까지 식량도 계속 대주었다고 한다. * [[청나라]] 사신을 서교(西郊)[* [[한양]]의 서쪽 성곽 부근을 말한다. [[영은문]] 근처로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당대 중국 사신의 전송, 전별연을 주관하던 모화관이 있던 지역.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이다. --마포구 서교동이 아니다! 지금이야 독립문에서 서교동으로 이동하기 수월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금화터널이 없었다--]에서 전송하면서 섬돌 위에 나섰는데 청나라 사신이 떠난 후 한 병사가 빨리 걷다가 주위를 살피지 못하고 현종과 부딪혀서 거의 넘어질 뻔 했다. 주위에서 이 병사를 처벌할 것을 건의했으나 현종은 "모르고 한 일인데 어찌 다스릴 것이 있겠는가"라며 곤장 대여섯 대를 치는 것으로 퉁치고 끝냈다고 한다. * 세자 시절에는 효종에게 새끼 [[곰]]을 바친 사람이 있어서 이 곰을 궁에서 길렀는데, 1년 뒤 곰이 크게 성장해서 사람 말을 안 듣자[* 사실 곰은 잘만 다루면 사람 말을 잘 듣게 할 수 있다.(현대에도 가끔씩 곰과 함께 사는 집이 나오곤 한다.) 다만 이 당시에는 그걸 몰랐거나 그럴 재주가 없어서 못한 듯] 내시가 "오래 되면 사람을 해칠지도 모르니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청해서 효종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현종은 "곰이 사람을 해치는 동물이라 하지만 아직은 그 해를 받은 이가 없는데, 지금 만일 앞날의 일을 염려하여 미리 죽인다면 어진 마음이 아닙니다."라며 곰을 야산에 놓아줄 것을 청했다. 효종은 현종을 "네가 임금이 되어서는 시기와 의심 때문에 죽음을 당할 사람은 없겠다. 너의 신하가 되는 사람은 복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이라고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실제로 현종 치세에는 [[예송논쟁]]의 대립이 격화되긴 했어도 현종의 중재와 교통 정리 덕에 죽은 사람은 없었다. 가장 큰 형벌을 받은 이가 삼수로 유배되어 위리안치당한 [[윤선도]]. 그리고 그 윤선도조차 제위 후반기에 서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시켜 고향에서 여생을 마무리하게 해주었다.~~문제는 아들이 이 성격을 못 물려받았다.~~ * [[http://sillok.history.go.kr/id/kra_200001|《현종실록》의 현종 행장]]에 의하면 할아버지 [[인조]]가 살아있을 때 [[표범]] 가죽을 인조에게 바친 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표범 가죽이 품질이 좋지 않아서 도로 퇴짜를 놓으려고 했는데, 당시 세손이었던 현종이 "(더 좋은 가죽을 얻기 위해) 표범 1마리를 잡으려면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인조는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 표범 가죽을 받았다고 한다. * 서인들이 허적을 공격하는 소가 올라오면, 온화한 현종도 화를 내며 노발대발했다. 탄핵소를 들어온 자들을 파직과 유배를 때렸다. 현종이 서인과 남인을 서로 견제하게 하는 편이 그나마 왕권이 자리 잡을 공간을 만들어 줄까 생각한 것이다. * 현종은 [[효종(조선)|효종]]과 [[인선왕후]]의 외아들로 위로 누나가 2명, 아래로 여동생이 4명 있었다. 7남매 중 유일한 외아들이니 얼마나 귀하게 자랐을지 쉽게 짐작된다.[* 그렇다고 [[효종(조선)|효종]]과 [[인선왕후]]가 아들 딸 [[차별]]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현종이 유일한 [[왕세자]]이니 정말 귀하게 자랐을 것이다.] 다른 누이들과 사이가 나쁘지는 않은 듯하지만[* [[숙안공주]]와 [[숙정공주]]가 [[안하무인]]격에 [[정치]]에도 관여해서 [[사대부]]의 비난을 받았는데 효종과 현종이 공주들을 적극 보호했다.] 《숙명신한첩》을 보면 유독 연년생 누나인 [[숙명공주]]와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1살 위인 연년생 누나인 숙명공주가 [[왕실]] 사람들과 나눈 서간첩인 《숙명신한첩》을 보면 현종과 나눈 [[편지]]도 실려 있다. 이 편지를 보면 현종이 숙명공주에게 정성스럽게 답장을 써 놓고 한 쪽 귀퉁이에다가 여동생들인 [[숙휘공주]]와 [[숙정공주]]에게 보내는 추신을 적어 두었는데 "(너희들이) 악착스럽고 독하게 편지 1장을 보내라고 해서 이렇게 쓴다"고 적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왕도 일개 [[오빠]]몬이었다.-- * 《공사견문록》에 기록된 일화들을 보면 무인 기질이 강했던 아버지나 괴팍했던 아들과는 달리 온화하고 관대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특히 조 상궁과의 일화는 거의 [[대인배]] 인증. 조 상궁의 발언은 인조의 집권 자체를 부정하는 말로도 볼 수 있으니 아무리 그녀가 보모상궁이였다고는 해도 이는 역모죄로 처형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특히 정통성 문제 때문에 골칫덩어리(스트레스)를 엄청나고 심하게 압박받았던 부왕 효종에게 알려졌다면 바로 목이 댕강 달아나고도 남을 그럴 상황. 실제로도 조 상궁 아니, 그 이상의 행위를 벌였다고 할 수 있는 김홍욱의 경우[* 이 사람이 뭘 했냐면 효종 5년 구언의 전교를(뭔 소리냐면 재난이 일어난건 왕 탓이니 쓴소리 좀 해 봐라 '''벌 안 줄테니''') 내리자 '''[[민회빈 강씨|강빈]]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통성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효종에게는 본의는 아니지만 [[역린|제대로 아픈곳 찌른 셈]]이었다.] 국문 당하여 곤장을 맞다가 사망했다. * 《[[현종실록]]》은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이 개수(改收)된 경우다. [[http://history21.egloos.com/612121|# 수정실록, 개수실록, 보궐정오의 차이]] [[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민점(閔點) 등의 [[남인]] 인사 주도로 숙종의 독촉하에서 [[1677년]](숙종 3년) 완성된 것이 <현종실록>이라면,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을 계기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1683년에 28권의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을 내었다. 이 개수실록은 부실하게 지어진 <현종실록>을 대체한다는 의미를 가진 만큼 처음부터 갈아엎었고, 기록도 <현종실록>보다 훨씬 길다. * 역대 [[계후]]가 없는 조선 국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을 들이지 않고,[* [[경종(조선)|경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도 후궁이 없었지만 이쪽은 적어도 계후는 있었다.] 중전인 [[명성왕후|명성왕후 김씨]][* [[명성황후 민씨]]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에게만 충실했다. [[부부]]간의 금슬 자체는 그럭저럭 좋았다고 하나 사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명성왕후가 [[태종(조선)|태종]]비 [[원경왕후]] 민씨처럼 워낙 성깔 있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후궁을 들이지 못했다고도 한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태종은 ([[무안대군|이복]][[의안대군(이방석)|동생]]들을 [[제1차 왕자의 난|죽이고]] [[회안대군|동복형]]을 [[제2차 왕자의 난|제압할]] 정도였으니) 마찬가지로 그 성깔이 보통이 아니었던지라 수많은 후궁을 들였다는 것.][* 사실 현종 재위기간 내내 친어머니이자 왕대비 인선왕후가 살아 있었으므로 명성왕후도 시어머니인 인선왕후의 눈치를 봐서 마냥 대놓고 후궁 들이는걸 반대하거나 할순 없었지만 명성왕후의 친가가 워낙에 권세있는 명문가였기 때문에 인선왕후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실제로 [[명성왕후]]는 [[숙종(조선)|숙종]] 재위 시절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이자 자신에게는 (법적) 시조모인 [[장렬왕후]]가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서인]]집안 출신의 [[인현왕후]] 간택을 거의 독단적으로 강행하고, [[장렬왕후]]의 궁녀였던 [[희빈 장씨]]를 내쫓기도 했다.] 화를 낼 때는 단호했지만 아버지, 아내, 아들과는 정반대로 현종은 기본적으로는 매우 온화한 성품[* [[숙종(조선)|아들]]은 물론, [[경종(조선)|두]] [[영조|손자]], [[사도세자|증손자]], [[정조(조선)|현손자]], [[순조|내손자]]든 간에 현종 아래로 그 성품들은 아내였던 [[명성왕후]]를 빼박 닮아 다들 성질이 한성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결과로 인해 조선 역사상 [[임오화변|왕이 세자를 죽이는 참혹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이었다고 한다.[* 이 온화한 성품을 그나마 많이 닮은건 장손자인 [[경종(조선)|경종]] 정도로 추정된다. 이 경종의 경우에는 사실 되려 신하들이 임금열외를 시킬정도로 본인을 무시한 점이 실록에 등장하기까지 한걸 감안하면 다혈질을 타고나지 않더라도 충분히 화가 많아도 이상하지 않은 쪽인데 되려 많이 참다가 터트린걸 감안하면 숙종의 아들들 중 할아버지의 성품을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온화한 현종이라도 경종때처럼 신하들이 자신을 기수열외 시키듯이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으면 화를 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경종은 세자 시절 어머니인 [[희빈 장씨]]를 잃은 시점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가 세자 말년엔 정비인 [[단의왕후]]까지 떠나보내고, 왕이 되고난 후에는 앞서 서술한 고난까지 겪은 영향 때문인지 할아버지 현종보다 겨우 2년 더 산 35세로 단명하고 말았다.] [[정종(조선)|정종]]처럼 애처가와 [[공처가]]의 일면을 동시에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명성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1남 4녀를 두었는데 첫 딸은 [[아기]] 때 [[사망]]했고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혼례 직전에 급사[* 당시 둘 다 [[부마]]를 정해 놓고 봉작까지 내린 때였는데 [[1673년]](현종 14년)에 두 [[공주]]가 4개월 간격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공주들의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명선공주의 경우 사망 1주일 전 《[[현종실록]]》 기사에 [[천연두]]를 앓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공주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조정에서는 부마들의 작호를 유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행해졌다. 그 결과 길일을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망한 명혜공주의 부마는 작호를 환수하고 혼례일이 잡힌 명선공주의 경우는 작호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부마 [[재혼]]을 금하는 법례 때문에 명선공주의 부마가 평생 재혼하지 못하고 늙을 판이 되자 현종은 이를 불쌍히 여겨 이마저도 다시 환수하도록 명을 내려준다.]했고 [[숙종(조선)|왕세자]]와 막내 [[명안공주]]만이 장성하여 혼인[* 다만 현종은 명안공주가 [[시집]]가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명안공주는 [[1680년]](숙종 6년) [[2월 18일]]에 전 공조참판 [[해주 오씨|오두인]]의 아들 부마 오태주와 혼례를 올렸다. 막내 여동생을 지극히 아꼈던 [[숙종(조선)|숙종]]이 이 날도 승지를 보내 [[술]]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숙종실록]]》에 남아 있다. 오태주의 아버지 오두인은 훗날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화를 사 모진 형신을 받고 [[의주군|의주]]로 귀양가는 도중 고문 후유증으로 [[파주시|파주]]에서 객사한다.]을 했다. 그나마도 명안공주는 1687년(숙종 13년) 5월 16일에 20세의 나이로 [[요절]].[* 오원은 시동생 오진주의 아들로 공주 사후 들여온 [[양자(가족)|양자]]이다.] 이 때부터 [[조선/왕실|조선 왕실]]에서는 점점 [[후손]]이 귀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어렵게 왕통을 이어가다가 [[헌종(조선)|헌종]] 때 단절되었고 [[철종(조선)|철종]]이 간신히 이었으나 그마저도 단절되면서 [[왕위]]를 이을 가까운 왕손이 없다는 [[명종(조선)|명종]] 사후 때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까지 갔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들면서 조선 초기와 달리 자손이 귀해진 것도 있고 [[역모]]에 거론된 왕족들이 자꾸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대부분의 왕녀들은 시집가서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을 보지 못하거나 자식을 낳아도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식이 아예 없는 [[경종(조선)|경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 황제]]는 일단 빼고 [[정조(조선)|정조]]와 [[순조]]의 딸들은 자식을 낳았으나 나중에 대가 끊기거나 요절했고 [[숙종(조선)|숙종]], [[헌종(조선)|헌종]], [[철종(조선)|철종]],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의 딸들은 대부분 요절했다.[* 그나마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는 77살까지 살았지만 덕혜옹주도 딸 하나만 낳았고 그마저도 24살의 나이에 유서를 남기고 행방불명 되었다. 결정적으로 덕혜옹주가 태어났을 땐 나라가 이미 망한 뒤였다.] == 가계 == * 할아버지: [[인조]] 이종 * (친)할머니: [[인열왕후]] [[청주 한씨|한씨]] * (양)할머니 : [[장렬왕후]] [[양주 조씨|조씨]] * 아버지: [[효종(조선)|효종]] 이호 * 어머니: [[인선왕후]] [[인동 장씨|장씨]] * 왕비: [[명성왕후]] [[청풍 김씨|김씨]] * 장녀: [[명선공주]] * 장남: [[숙종(조선)|숙종]] 이순 * 며느리: [[인경왕후]] [[광산 김씨|김씨]] * 며느리: [[인현왕후]] [[여흥 민씨|민씨]] * 며느리: [[인원왕후]] [[경주 김씨|김씨]] * 며느리: [[장희빈|옥산부대빈]] [[인동 장씨|장씨]] * 손자: [[경종(조선)|경종]] 이윤 * 며느리: [[숙빈 최씨|화경숙빈]] [[경주 최씨|최씨]] * 손자: [[영조]] 이금 * 차녀: [[명혜공주]] 이온혜 * 삼녀: [[명안공주]] 이온희 * 승은궁녀: 김상업 ||<-6> {{{#!wiki style="margin: -5px -1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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