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 건국설화 등장인물)] || '''자칭''' ||'''성골장군(聖骨將軍)''' || || '''별호''' ||구룡산천왕(九龍山天王)[* 이승휴의 《[[제왕운기]]》 기록.][* [[구룡산]]은 이전엔 평나산(平那山), 변나산(卞那山)이라 불렸고, 호경 이후에는 구룡산(九龍山), 현재는 성거산(聖居山)으로 불린다.] || || '''본관''' ||신천 강씨[* 《[[고려사]]》에는 성이 나오지 않는다.] || || '''이름''' ||호경(虎景) || || '''아내''' ||부인[* 이름 미상, 인간 시절의 아내이자 강충의 친모.], 구룡산 산신[* 여신이다.] || || '''사당''' ||호경사(虎景祠) || || '''생몰연도''' || ? ~ ? || [목차] == 개요 == [[통일신라]]때의 인물. 생몰년 미상. [[정화왕후]]의 증조부로 훗날 [[고려]]왕조를 개창하는 [[개성 왕씨]] 왕가의 조상이 되는 인물이다. 《[[고려사]]》에 수록된 <고려세계>에 등장하는 설화적 인물이다. == 고려사 기록 == 《고려사》 <고려세계>가 인용한 《편년통록》의 설화에 따르면 호경의 고향은 알려진 바가 없고,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 신라 [[골품제]]의 [[성골]]의 영향을 받은 호칭일 가능성이 높다.]을 자처했으며 [[백두산]]에서 내려와 유람하다가 부소산(扶蘇山)[* [[개성시]]의 옛 이름.] 좌곡(左谷)에 자리잡아 가정을 꾸렸다. '''매우 부자였으나''', 자식이 없었다.[* 특이하게도 《편년통록》엔 호경 일가가 부자였단 서술이 매 인물마다 나온다. 후손 왕륭, 왕건 또한 송악 일대의 거물이었던 것을 보면 설화가 거짓이더라도 호경 일가가 부자였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활을 잘 쏴 사냥을 자주 다녔는데 10명이서 평나산으로 사냥을 갔을 때, 굴 속에 들어 갔는데 웬 [[호랑이]] 한 마리가 동굴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관을 던져 호랑이가 무는 관의 주인을 밖으로 내보내 맞서 싸우도록 정한 뒤 관을 던지니 호경의 것을 물었다. 호경이 결국 굴 밖으로 나가니 범은 온데간데 없고 굴은 무너져 다른 아홉 명은 죽고 말았다. 이후 평나산에서 내려와 평나군(平那郡)에서 그들을 위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갑자기 [[여신]]이 등장해 난 [[과부]]인데 널 대왕으로 봉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그것을 수락, 산군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홉 명이 죽었으니 산 이름을 구룡산으로 바꿨다. 또한 호경사를 지어 호경을 기렸다. 이 호경사는 고려 말 목은 [[이색(고려)|이색]]이 찾아와 참배할 정도로 인지도를 지녔다고 한다. 이후 여신과 같이 사라졌다. 그러나 본처가 그리워 밤마다 본처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다 인간 시절에 생기지 않던 아이가 생겨 아이 이름을 강충(康忠)이라 했다. >우봉군(牛峯郡)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우잠군(牛岑郡)【우령(牛嶺)이라고도 하고, 수지의(首知衣)라고도 한다.】으로,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1018)에 평주(平州)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문종(文宗) 16년(1062)에 내속(來屬)하였다. 예종(睿宗)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구룡산(九龍山)【'''국조(國祖) 성골장군(聖骨將軍)의 사당(祠堂)이 있는데 그래서 성거산(聖居山)이라고도 한다.'''】·박연(朴淵)【윗못[上淵]과 아랫못[下淵]이 있는데, 모두 깊이를 잴 수 없을 정도로 깊으며 가뭄이 들어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면, 즉시 반응이 있는데 윗못의 가운데에는 반반한 바위가 있는데, 올라가서 〈주변을〉 살필 수 있다. 일찍이 문종이 그 위에 올라가자, 갑자기 비바람이 사납게 일어나 바위가 뒤흔들려서, 문종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이영간(李靈幹)이 〈왕을〉 수행[扈從]했는데, 용의 죄를 일일이 꾸짖는 글을 지어 연못에 던졌더니 용이 즉시 그 등을 드러내었고, 이를 곤장으로 때리니 윗못의 물이 모두 붉게 변하였다.】이 있다. >《고려사》 권56 지 권제10 <지리> 왕경 개성부 우봉군 이외에도 고려사 지리지 부분에 의하면 위와 같이 호경의 다른 명칭으로 국조(國祖)가 언급된다. == 고구려 유민 == 《고려사》의 《편년통록》 기록상 호경은 왕건 일가 중 최초로 송악에 자리잡은 인물이었다. 먼 후손인 왕륭, 왕건 대까지 패서 출신 호족들이 고구려계라는 정체성을 유지한 점, 《고려사》에 등장하는 당시 지명들이 고구려 때의 지명과 신라의 지명이 섞여 있는 점, 무엇보다 송악군 자체가 고구려의 옛 땅이라는 점을 보아 '''고구려계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스스로를 '''[[성골]]'''장군이라 한 것을 보면 신라에 이민을 시도하여 정착한 듯 하다.[* 이 때문에 고구려 시절에도 그리 잘난 집안 후손이 아니었거나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몰락한 집안의 후손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재미있게도 정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고구려계 유민의 근거지였던 패서지역으로 이주한 신라계 호족 [[박지윤(고려)|박지윤]](朴遲胤)의 아버지 박적오(朴赤烏)는 고구려 관직에서 따온 칭호인 대모달읍장(大毛達邑長)을 자칭한 바 있다.] == 태조 [[왕건]]과의 관계 == 《고려사》 《편년통록》은 왕건의 직계 족보가 [[당숙종]] → [[작제건]] → [[용건]] → [[왕건]] 이라고 했다. 그럼 호경과는 무슨 관계인가하면 호경 → 강충 → [[국조(고려)|보육]] → 진의 → 작제건 → 용건 → 왕건이다. 즉 호경은 왕건의 증조할머니 진의의 증조할아버지다. 족보가 이상하게 꼬여있는 이유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난 뒤, 자신의 조상들을 신적인 존재로 올려놓기 위해 조작했기 때문이다. 당장 호경이 평나산의 신이 되었다니, 대제국을 쇠락으로 이끈 미증유의 대란이었던 [[안사의 난]]으로 중국 서쪽 지방에서 이민족인 위구르까지 끌어들이며, 악전고투를 벌여야했던 당나라의 숙종이 왕건의 증조할아버지니 하는 것들은 믿기 힘들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호경, version=72)] [[분류:신라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