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헝가리 왕국 섭정)] ---- [include(틀:1차세계대전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장성급 장교)] ---- ||<-2> '''[[헝가리 왕국(1920년~1946년)|{{{#ffffff 헝가리 왕국 섭정}}}]][br]{{{#ffffff {{{+1 비테즈 너지바녀이 호르티 미클로시}}}[br]Vitéz nagybányai[* 'Vitéz'는 기사를 뜻하는데, [[1920년]] 창설된 [[https://en.wikipedia.org/wiki/Order_of_Vit%C3%A9z|비테즈 훈장]]의 수훈자에게 붙는 칭호이다. 호르티가 훈장의 초대 주군이었으니 일종의 자가 수여인 셈이다. 1944년 이후로 비테즈 훈장은 폐지되었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가문훈장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한편 'nagybányai'는 지명인 너지바녀(Nagybánya)를 의미하며 호르티의 조상이 받은 영지의 명칭이다.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지역으로 현 [[루마니아]] 마라무레슈주 바이아마레(Baia Mare)에 해당한다.] Horthy Miklós[* 타유럽권 국가들과 달리 '성-이름' 방식을 사용하는 헝가리어식 이름이기 때문에 '호르티(Horthy)'가 성이고 '미클로시(Miklós)'가 이름이다.][br]Nikolaus Horthy Ritter von Nagybánya}}}'''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y3k32jw66ex71.jpg|width=100%]]}}} || ||<|2> '''출생''' ||[[1868년]] [[6월 1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트란스라이타니아]] [[헝가리 왕국(1526년~1918년)|헝가리 왕국]] 켄데레시[br](現 헝가리 야스너지쿤솔노크주 커르처그구 켄데레시) || ||<|2> '''사망''' ||[[1957년]] [[2월 9일]] (향년 88세)|| ||[[포르투갈 제2공화국|포르투갈]] 리스보아 지방 이스토릴|| ||<|2> '''재임기간''' ||헝가리 왕국 섭정|| ||[[1920년]] [[3월 1일]] ~ [[1944년]] [[10월 15일]]|| || '''서명'''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호르티 미클로시 서명.svg|width=100]]}}}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모''' ||아버지 호르티 이슈트반(Horthy István, ^^1830–1904^^)[br]어머니 헐러시 퍼울러(Halassy Paula, ^^1839–1895^^) || || '''배우자''' ||푸르글리 머그돌너(Purgly Magdolna, ^^1881–1959^^)[* 1901년 혼인.] || || '''자녀''' ||머그돌너(Magdolna, ^^1902–1918^^)[br]퍼울레테(Paulette, ^^1903–1940^^)[br]이슈트반(István, ^^1904–1942^^)[br]미클로시(Miklós, ^^1907–1993^^) || || '''종교''' ||[[칼뱅파]] || || '''신체''' ||177cm || || '''소속 정당''' ||[include(틀:무소속)] || ||<-2> '''군사 경력''' || || '''임관''' ||피우메 해군사관학교 || ||<|2> '''복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해군]] || ||1894년 ~ 1918년 || || '''최종 계급''' ||[[중장]] {{{-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 || [목차] [clearfix] == 개요 ==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 왕국]]의 [[군인]], [[정치인]], [[독재자]]. 1, 2차 세계대전의 인물 중에도 매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인물로 1868년 6월 1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생의 [[귀족]]으로 오헝제국의 [[해군]] [[장교]]가 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제국이 분할되자 독립한 공산주의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켰다. 이후 왕정을 복고하나, 왕을 옹립치 않고 [[섭정]]이 되어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을 편들어 참전했으나, 전황이 악화되자 [[소련]]과 단독 강화를 시도하다 독일에 의해 축출되었다. 전후 헝가리가 공산화되자 [[포르투갈]]로 추방되어 1957년 사망한다. '바다 없는 내륙국의 해군 제독',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라는 해괴한 타이틀을 두 개나 달고 산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 생애 == [[186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켄데레시(Kenderes) 지역의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인 이슈트반은 [[헝가리 왕국]] 귀족원 의원으로 1,500에이커의 토지를 가진 대지주였다. [[1886년]] 피우메[* Fiume, 오늘날 [[크로아티아]] 서부의 항구도시인 [[리예카]](Rijeka). 훗날 [[헝가리 인민 공화국]]의 서기장이 되는 [[카다르 야노시]]도 리예카 출신이다.]의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894년]]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1896년]] [[중위]], [[1900년]] [[대위]]로 진급했으나, [[소령]] 진급은 [[1909년]]에 이루어져 동기들보다 늦었다고 한다. 이후 [[중령]]([[1911년]]), [[대령]]([[1914년]])까지는 동기들보다 빨리 진급했다. 소령이었을 때는 당시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전속부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제독 ===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합스부르크급 전함]] SMS 합스부르크와 SMS 노바라의 [[함장]]으로 근무했다. 주요 상대는 [[영국 해군]], [[프랑스 해군]],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었다. 이탈리아는 해군력이 빈약하였고, 프랑스는 해군 강국이었으나 [[지중해]]에 전개시킨 전력은 미약했기에, 호르티는 두 나라의 해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1917년]] 5월 [[아드리아 해]]의 출입구에서 벌어진 [[오트란토 해협 해전]]은 호르티 대령의 명성이 [[동맹국]]은 물론 [[협상국]]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함대사령관 [[안톤 하우스]] 원수의 방침에 따라 전함을 비롯한 주력함을 [[현존함대]] 전략으로 보존하는 대신 [[U보트]]를 통한 지중해에서의 통상파괴전에 주력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이에 맞서 저인망 어선과 함대를 배치하여 [[아드리아 해]]의 출구인 오트란토 해협을 봉쇄하였다. 호르티는 정찰 순양함[* 경순양함의 일종] SMS 노바라를 비롯하여 장갑순양함 1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4척을 이끌고 출격하여 해협을 봉쇄중인 어선들을 개발살냈고[* 작전 목표 자체가 적 해군력 파괴가 아니라 (유보트를 위한) 해협봉쇄 돌파였으니, 봉쇄에 참가중이던 저인망 어선들에 상당한 타격을 가한 시점에서 이미 작전은 성공이었다.] 곧이어 출동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해군과 교전을 벌였다. 적절한 지휘로 호르티는 연합군의 구축함 2척과 지원함 2척, 어선 14척을 격침시켰고 반면 동맹군 측은 격침당한 함선없이 귀환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연합군은 해협봉쇄에 참여중인 어선들이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오쓰란토 해협 봉쇄를 제한적으로만 실시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보트에게 다시 지중해로 나가는 길이 열렸다.[* 저인망 어선의 해협 봉쇄는 낮 시간 동안에만 진행해야 했고 15시 무렵에는 봉쇄를 풀어야 했다.] 호르티는 전투 도중 중상을 입고 귀환하였지만,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전쟁 영웅으로 부상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와 함께 [[1918년]] [[2월]]에는 카타로 항에서 벌어진 제국 해군의 [[반란]]까지 성공적으로 진압함으로서 [[소장(계급)|소장]](Rear Admiral)으로 진급했고, 제국이 해체되기 직전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막시밀리안 녜고반 대장의 뒤를 이어 오헝 제국 해군 최후의 함대사령관으로 영전하였다. === [[헝가리 왕국|헝가리]]의 독재자 === ==== [[내륙국|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주의]]의 물결이 전 세계를 풍미한 가운데, 헝가리에서는 1919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쿤 벨러(Kun Béla)가 공산정권인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을 수립했다. 호르티는 이에 반발해 헝가리 동남부의 세게드에서 옛 부하들을 모아 공산정권 타도를 내세우며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공산화를 우려한 [[루마니아 왕국]]의 도움으로 루마니아군과 함께 [[부다페스트]]로 진군해 쿤 벨러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1920년 3월 1일 헝가리 의회에서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 왕국]]의 섭정(kormányzó)으로 선출되며 정권을 잡게 된다. 헝가리는 1920년 협상국과의 강화조약인 [[트리아농 조약]]을 체결하면서 영토의 반 이상을 상실하고 [[내륙국]]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내륙 해군|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라는 괴상한 직책이 되어버렸다. ==== 왕 없는 왕국의 [[섭정]] ==== 한편 [[카를 1세]]는 내전에서 왕당파가 승리하자 1921년 몰래 헝가리에 입국해 헝가리 왕위라도 복귀하려 두 차례나 시도했지만 협상국은 헝가리 측에 전범인 합스부르크의 복고를 용납할 수 없다는 강경한 메시지를 전해왔다. 특히 구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를 먹어치운 유고슬라비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등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복고로 영토 분쟁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복고가 이루어지면 선전포고로 받아들인다는 최후통첩까지 보냈다. 아직까지 헝가리의 전후 국제적 지위가 결정되지 않고 국내사정도 혼란스러운 가운데 복벽을 실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호르티 제독은 군대를 동원해 합스부르크 지지자들의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카를 1세를 체포해 추방했다. 결국 헝가리 의회에서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왕조의 복귀를 금지하기로 결의하여 헝가리 왕국은 공식적으로는 왕이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호르티 제독은 '''[[홍철 없는 홍철팀|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라는 해괴한 직책으로 사실상 헝가리를 통치하게 된다.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 왕 없는 왕국의 섭정으로써 군림한 실로 어이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슬로바키아|북부 헝가리]], [[보이보디나]], [[트란실바니아]] 등을 상실하고 심지어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오스트리아]]에도 [[부르겐란트]]가 넘어가는 등 헝가리는 전통적인 국토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고, 이 때문에 헝가리 왕국 내에는 불만세력이 팽배하여 영토 회복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youtube(3NhSry_rybQ)]|| || 베를린을 방문하여 독일군의 사열을 받는 호르티 제독. || [[세계 대공황]]으로 헝가리가 엄청난 타격을 입은 가운데 호르티 제독은 한창 떠오르던 [[아돌프 히틀러]]와 손을 잡는다. 이후 [[뮌헨 협정|뮌헨 회담]]의 후일담 격인 제1차 빈 중재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s-1|슬로바키아]] 남부 헝가리인 거주 지역을 얻고, 독일의 체코 병합 직후에는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를, 제2차 빈 중재를 통해 루마니아에서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얻었고, 또 [[유고슬라비아 왕국|유고슬라비아]] 침공 후 동부 보이보디나를 얻었는데. 이들 지역은 전후 진주한 헝가리 [[육군]]의 전쟁범죄가 문제화되기도 했다. 다만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중립을 지키며 간을 보다 전쟁 발발 5일 후인 6월 27일에 참전한다.[* 헝가리가 독소전쟁에 참전하게 된데는 1941년 6월 26일에 있었던 [[커셔]](현 슬로바키아 [[코시체]]) 폭격이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엔 폭격에 사용된 폭탄이 소련제라는 이유로 헝가리 정부는 폭격의 주체가 소련 공군이라고 결론지었으나. 이 폭격의 배후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여러 이견이 있다. 소련의 의도적인 폭격이라는 주장부터, 소련 공군이 슬로바키아를 폭격하려다 실수로 헝가리에 폭격을 했다는 주장, 아니면 독일이 헝가리를 참전시키려고 한 자작극이라는 주장, 또는 헝가리 정부의 자폭이라는 주장과 루마니아 왕국의 공격이라는 주장, 아니면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공격이라는 주장도 있다.] 독일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파시스트라는 얘기도 나왔지만 호르티 제독 본인은 확고한 귀족적 권위주의자로 국내에서 성장하는 파시즘 세력들을 가차없이 탄압하였고 파시스트들이 선거에서 얼마나 약진을 하든지 그에 걸맞는 대접을 전혀 해 주지 않았다. [[화살십자당]]을 불법화한 것이 그 예. [[나치]]도 기존 [[독일 제국|왕정]]이나 구체제의 엘리트 계층인 [[융커]]계급이 꽉 장악하고 있는 독일 군부와 서로 사이가 나빴다는 걸 생각하면[* 관련 항목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만 독일 군부, 특히 육군과 나치당은 서로 견제하는 대상에 가까웠다. ~~[[헤르만 괴링|공군]] 빼고~~ 군부는 히틀러의 재무장계획이 필요하기 때문에 협조를 하고 있었지만 나치당을 벼락출세한 뜨내기들로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고 나치당 역시 자신들이 세울 [[제3제국|천년제국]]에 '실패한 체제'인 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의 유산이자 융커 계급이 주도하는 군부는 걸맞지 않다고 [[장검의 밤|공공연히 여기곤 했다.]] 히틀러 또한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소장파인 [[에르빈 롬멜]], [[하인츠 구데리안]]등을 중용하기도 하고 이 때문에 이들은 적어도 전쟁 초중반엔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병과별로 충성경쟁을 유도하거나 전쟁 중반에는 아예 무장친위대를 육군을 견제할 만한 수단으로 확대시키기도 했다.] 구체제의 엘리트 출신인 호르티가 파시즘과 꽤 거리를 두었다는 것도 이해하기가 편하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다. 호르티가 공산정권에 대항해 왕정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숱한 [[백색테러]]와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살인행위가 동반되었다. === 최후 === 독일의 패망이 굳어지자 1944년 10월 [[소련]]과 단독으로 강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를 눈치챈 독일이 [[오토 스코르체니]] [[슈츠슈타펠|SS]] [[중령]]의 주도로 [[판처파우스트 작전]]을 개시하여 그의 아들 호르티 미클로시 2세를 유괴하여 인질로 삼고 극우정당인 [[화살십자당]] 당수 [[살러시 페렌츠]](Szálasi Ferenc,1897~1946)를 헝가리의 집권자로 세운다. 호르티 제독 본인은 독일로 끌려가 감금되었다가 종전 직전 [[미 육군]]에게 구출되었으며, 유괴된 아들은 종전 후에야 석방되었다. 살러시와 화살십자당 주요 간부들은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로 밀고 들어오자 독일로 도망갔으나, 종전 후 미 육군에게 체포되었다가 헝가리로 송환되어 인민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한다. 종전 후 미군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1945년 말 석방되어 바이에른에 거처하였으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는 전범으로 분류되지 않아 증인으로만 출석한 뒤 석방되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측에서 거절했다. 호르티 제독 치하 헝가리에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없진 않았지만,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가기 시작하고 본격적인 [[홀로코스트]]가 실시된 시점은 호르티 제독이 실각하고 화살십자당이 정권을 잡은 1944년 이후의 일이었다. 당시 이송 책임자 중 한 명이 [[아돌프 아이히만]]이며, 이때 혜성같이 등장하여 유대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라울 발렌베리]], [[조르조 페를라스카]](호르헤 페를라스카)이다. '''[[헝가리 인민 공화국|헝가리가 공산화]]'''되어 귀국길이 막히자[* 특히 공산화 이후 헝가리의 지도자가 된 라코시 마차시는 쿤 벨러 휘하의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에 가담했던 호르티의 정적이었다.] 1950년 [[포르투갈]]로 망명하였다. 이후 가족과 함께 포르투갈의 휴양지이자 전 루마니아 국왕 [[카롤 2세]]가 같이 망명해 있던(...) [[http://en.wikipedia.org/wiki/Estoril|이스토릴(Estoril)]]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57년에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회고록]]을 집필하기도 한 그는 [[헝가리 혁명|헝가리의 반소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충격을 받아서 "소련군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헝가리를 떠날 때까지" 자신의 유해를 헝가리에 옮기지 말라고 유언했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소련 해체|소련이 붕괴]]하고 헝가리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인 1993년에서야 헝가리로 돌아와 고향인 켄데레시에 묻혔다. 죽기 전에 회고록을 남겼는데, 호르티의 개인사 뿐만 아니라 당시 헝가리의 정세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 기타 == * 추축국 지도자들 중에서 전쟁에 제일 소극적이었던데다, 그가 밀려난 후 집권한 [[화살십자당]]이 하도 '''짧고 강렬한 막장'''이던 탓에 [[다시 보니 선녀 같다|상대적으로 나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1920년대에 전 세계를 휩쓸었던 대공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이 초인플레이션 때문에 헝가리는 1927년부터 기존에 쓰던 크로네 화를 버리고 [[헝가리 펭괴]]를 발행해야 했다.[* 헝가리는 패전 직전인 1945년에도 또 한번 초인플레이션을 겪어 펭괴를 폐지하고 현재까지 [[포린트]] 화를 쓰고 있다.] * 가톨릭 다수 국가인 헝가리에서 이 비범하고 해괴한 섭정 각하의 종교는 '''[[칼뱅파]]'''였다. --왕 없는 나라의 섭정이자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자 가톨릭 국가의 개신교도-- 헝가리 동부를 흐르는 [[티서강]]을 경계로 서쪽은 확실한 가톨릭 다수 지역이지만 티서강 동쪽의 헝가리 동부와 [[트란실바니아]]는 개신교인 [[개혁교회]]의 세가 상당히 강했다. 왜냐면 중부유럽에서 한창 [[종교개혁]]이 유행할 당시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아래에 든 서부지역과 [[오스만 헝가리|오스만이 직접 지배한 중부지역]], 그리고 오스만을 종주국으로 하여 [[헝가리인]]이 자치를 누리는 동부의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국]]으로 삼분할된 상태였는데, 개혁교회가 트린실바니아의 헝가리인들 중심으로 퍼진 것이다. 그 유명한 트란실바니아의 바토리 가문도 칼뱅교와 연관이 있어서 [[가톨릭]]으로부터 누명을 쓴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고 헝가리 제2의 도시인 [[데브레첸]]의 경우는 '''칼뱅교도들의 로마'''란 별명이 있을 정도며 [[루마니아]] 혁명의 도화선이라 할 수 있는 [[티미쇼아라]](Timișoara)도 개신교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지금도 헝가리 전체인구의 13% 정도가 개신교 신자이며, 그보다 더 동쪽인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들의 경우 개신교 신자 비율은 47%까지 올라간다. 헝가리가 흔히 가톨릭 국가라는 인식이 강해 의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으나 개혁교회의 영향력도 꽤나 유서 깊기 때문에 헝가리인이면서 개신교인이라는 정체성이 딱히 유별나거나 특이한 것은 아니다. 가령 [[오르반 빅토르]] 현 헝가리 총리도 개혁교회 신자이다. 여담으로 헝가리 개혁교회는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교단치고는 상당히 특이하게 '''[[감독]]제'''를 실시하는 거의 유일한 칼뱅주의 교회이다. * [[프랑코 정권|동시기의 스페인]]과는 달리 섭정 체제가 도중에 붕괴해버렸기 때문에, 그가 죽거나 헝가리 국민들에게 실각당할 때까지 섭정 체제가 계속되었을 경우의 상황은 상상의 영역에 맡길 수밖에 없다. 공화정, 혹은 헝가리 의회가 새 섭정을 뽑든가, 아니면 1921년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 [[보르본 왕조]]를 복위시킨 스페인처럼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호이4|옹립]]시켜 합스부르크 왕조를 [[왕정복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는 왕정복고를 하되 헝가리의 적당한 귀족 중의 하나를 왕으로 옹립시키거나, 아예 [[곤도르]]나 [[마차시 1세]]처럼 스스로 왕위에 올라 '''호르티 왕조'''를 [[내독나없|개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호르티 제독 본인은 1942년 장남 호르티 이슈트반(István)을 부섭정으로 세웠으나, 그 해 8월 이슈트반이 탄 헝가리 [[공군]]기가 추락해 사망한 뒤에는 다음 부섭정을 임명하지 않았다. * 그의 이름을 딴 [[나는 호르티 미클로시의 병사]]라는 군가가 있다. 호르티 미클로시의 집권시기 사실상 [[준국가]]로 불렸다. == 매체 == * 2013년 12월에 개봉된, [[SS]] 장교로 변장하고 유대인들을 풀어주던 레지스탕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에서 배우 [[벤 킹슬리]]가 연기한 호르티 제독을 볼 수 있다. [[파일:external/4.bp.blogspot.com/Miklos+Horthy+Ben+Kingsley+Walking+with+the+enemy.jpg|width=500]] * [[Hearts of Iron IV]]에서 헝가리의 국가원수로 등장한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편을 든 걸 고증한 것인지 뜬금없이 파시스트 옹호자로 나와 파시즘 국가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는데 그가 [[화살십자당]]을 탄압한 역사적 사실과는 괴리가 있다. 선택지에 따라 [[오토 폰 합스부르크]] 복위를 선택하게 되면 국가원수에서 퇴임하여 해군 지휘관으로 돌아간다. --[[내륙국|하지만 바다가 없는걸]]--[* 그렇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재건 디시전을 찍을 경우 해안에 닿으므로 그 때가 되어서야 쓸 수 있다. 물론 해군 기반이 없는터라 조선소를 지어가며 함대다운 함대를 갖추고 나면 육군이 이미 유럽의 열강들을 다 밀어버려 대적할 상대가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비유럽 국가 중 대표적인 해군 강국으로 손꼽히는 일본이나 미국이 있긴 하지만 이 둘은 태평양을 두고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되어있어 오헝 함대가 올때는 이미 컨디션 만전과는 거리가 멀다.--결정적으로 둘 다 오헝과는 상당히 떨어져있어서 가기 귀찮다--] 모드 [[호이4 카라|카이저라이히]]에서는 처음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군 제독으로 등장한다. 또 다른 모드인 the great war redux에서는 독일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쳐서 멸망시키면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헝가리로 도망가는데, 머지않아 그를 퇴위시키고 헝가리 왕국의 지도자가 된다. * 동방의 라스푸틴에서는 해군 지휘관으로서의 모습이 나온다. 트리에스테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반란을 재빠른 대처로 제압하긴 했지만 자신의 윗선들이 다 날아가버린데다 때마침 일본 해군이 접근해온다는 소식에 수병들에게 이번 사건은 묻을테니 함께 침략자들을 물리치자는 연설로 수병들을 휘어잡아 제독으로 추대되어 일본 해군과 맞서게 되고 만전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우월한 화력을 기반으로 일본 해군을 박살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분리후 헝가리 왕국의 총리가 되어 조피 여왕을 보좌하고 있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신국가 도나우 연방의 해군제독으로 반란을 일으킨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을 진압하러 가지만 원래 역사에서 호르티를 도와준 루마니아[* 다뉴브연방이 존재하는 역사의 변화로 [[트란실바니아]]를 절반 밖에 가지지 못해 대놓고 침략하려다가 헝가리를 공격하면 [[베사라비아]]를 공격하겠다는 소련의 압박을 받고 공세를 포기한다.]가 지원을 중당하면서 헝가리에서 패퇴하고 오스트리아 해군제독으로 남는다. 그래도 크로아티아가 존재해서 원래 역사처럼 '''해군없는 나라의 해군제독''' 신세는 면하나 싶었지만 얼마 못가 크로아티아가 독립하면서 해군 없는 나라의 [[내륙 해군|해군제독이 되어버린다.]] == 둘러보기 틀 == [include(틀:추축국)] [각주] [[분류:헝가리의 귀족]][[분류:헝가리의 정치인]][[분류: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군/군인]][[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유럽의 독재자]][[분류:1868년 출생]][[분류:1957년 사망]][[분류:야스너지쿤솔노크 주 출신 인물]][[분류:유럽의 섭정]][[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Hearts of Iron IV/지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