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아르샤쿠니 왕조 샤)] ||<-3><#000080> '''{{{#FFF 아르샤쿠니 21대 샤}}}''' [br] {{{+2 {{{#FFF '''Խոսրով | 호스로프 4세'''}}}}}} || ||<|3><#000080> '''{{{#FFF 제호}}}''' ||<#000080> '''[[한국어|{{{#FFF 한국어}}}]]''' ||호스로프 4세 || ||<#000080> '''[[아르메니아어|{{{#FFF 아르메니아어}}}]]''' ||Խոսրով || ||<#000080> '''[[영어|{{{#FFF 영어}}}]]''' ||Khosrov IV || ||<-2><#000080> '''{{{#FFF 존호}}}''' ||[[샤]] || ||<-2><#000080> '''{{{#FFF 생몰 년도}}}''' ||미상 ~ [[415년]] || ||<-2><#000080> '''{{{#FFF 재위 기간}}}''' ||[[387년]] ~ [[392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아르메니아]] [[아르샤쿠니 왕조]]의 21대 [[샤]]. == 생애 == 부모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4세기 아르메니아 역사가 [[비잔티움의 파우스투스]]는 그를 아르사쿠니 왕조의 왕자라고 설명했지만 부모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5세기에서 6세기에 활동했던 또다른 아르메니아 역사가 [[라자르 파르페치]]는 그를 [[브람샤푸흐]]의 형제이자 아르탁세스 4세의 삼촌이라고 기술했다. 현대 학계에서는 그를 [[바라다테스]]의 아들일 거라 추정한다. 386년 [[사산 왕조]]의 침략을 연이어 격파하며 아르메니아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던 마누엘 마미코니안이 사망했다. 뒤이어 공동 왕으로 선임되었던 [[볼로가세스 3세(아르메니아)|볼로가세스 3세]]가 사망했고 [[아르사케스 3세]]가 단독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아르사케스 3세에 충성하길 거부하고 사산 왕조 샤한샤 샤푸르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샤푸르 3세는 군대를 파견해 아르메니아의 대다수 영역을 확보하고 호스로프 4세를 왕으로 내세우고 자신의 누이인 수르반두흐트(Zurvandukht)와 호스로프 4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아르사케스 3세는 서쪽으로 후퇴한 뒤 로마 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동방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방의 참칭자 [[마그누스 막시무스]]와 일전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어서 아르메니아에 군대를 보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사산 왕조에 협상을 제안했다. 사산 왕조 역시 로마 제국과 정면 대결하길 원하지 않았기에 협상에 응했고, 양측은 아르메니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이리하여 아르메니아는 북쪽의 테오도시오폴리스와 남쪽의 아미다까지 이어지는 경계에서 분열되었다. 또한 로마는 500파운드 가량의 금을 이란에 지불하기로 하였고, 이베리아에 대한 사산 왕조의 영도권을 인정하였다. 아르사케스 3세는 이 협정에 불만을 품고 호스로프 4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로마로부터 지원을 전혀 받지 않았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호스로프는 수르반두흐트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티그라네스와 아르사케스를 두었다. 그는 사산 왕조의 꼭두각시로 남는 걸 원하지 않았고, 장차 독립하여 진정한 국왕으로 거듭나고 싶어했다. 왕위에 오른 첫해에 전 총대주교 네르세스의 아들인 사하크를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로 임명했고, 387년 훗날 아르메니아 문자를 고안한 메스로프 마슈토츠를 왕실 비서로 임명했다. 또한 많은 귀족을 이전의 고귀한 지위로 회복시키는 등 세력 기반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392년 사산 왕조 샤한샤 [[바흐람 4세]]가 허락을 받지 않고 총대주교를 선임한 책임을 물어 그를 폐위시키고 [[브람샤푸흐]]를 아르메니아의 새 왕으로 선임했다. 그는 크테시폰 궁궐 내 감옥에 수감된 뒤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414년 동생이 사망한 후에야 풀려났고 415년에 사망했다. [[분류:아르샤쿠니 왕조 샤]][[분류:폐위된 군주]][[분류:41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