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네덜란드의 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1880년 출생]][[분류:1963년 사망]] ||<-2> '''네덜란드 육군 사령관[br]{{{+1 호트프리트 판 보르스트 토트 보르스트}}}[br]Jan Joseph Godfried, Baron van Voorst tot Voorst Jr''')[* 얀 요세프 호트프리트, 바론 판 보르스트 토트 보르스트 유니요르]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Luitenant-generaal_J.J.G._baron_van_Voorst_tot_Voorst_(1880-1963)_in_1948.jpg|width=100%]]}}} || ||<|2> '''출생''' ||[[1880년]] [[12월 29일]] || ||[[네덜란드]] [[오버레이설|오버레이설주]] 캄펀 || ||<|2> '''사망''' ||[[1963년]] [[11월 11일]] (향년 82세) || ||[[네덜란드]] [[헬데를란트|헬데를란트주]] 피어라케르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네덜란드)] || || '''학력''' ||왕립사관학교 || || '''직업''' ||군인 || || '''계급''' ||[[대장(계급)|대장]] || || '''참전''' ||[[제 2차 세계대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네덜란드의 군인으로, 제2차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군을 지휘했으며, 서열 2위[* 1위는 [[헨리 빙켈만]].]였다. 그는 뛰어난 전술가로 유명했는데, 현대 전술에 대하여 여러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 전쟁 전 == 1880년 12월 29일 네덜란드 [[오버레이설|오버레이설주]] 캄펀에서 군인 출신인 [[네덜란드 국가의회]] 국회의장 얀 요세프 호트프리트 판 보르스트 토트 보르스트[* Jan Joseph Godfried, Baron van Voorst tot Voorst Sr.로, [[호트프리트 판 보르스트 토트 보르스트|아들]]과 이름이 같아 Sr.가 붙는다]와 안나 크레메르스[* Anna Cremers] 사이에서 5번째로 태어났다. 1901년 왕립사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후 하를렘의 보병 연대에 [[중위]]로 임관헀다. 1903년 철도 총파업이 일어났을 때 하를렘역을 지킨 유일한 중위였다. 그 후 1907년 [[빌헬미나 여왕]]의 개인 보좌관이 되어, 그녀가 해외 순방을 할 때에 동반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중 네덜란드군이 동원되면서, 다양한 계급을 맡게 되었다. 이 경험과 더불어 독일의 [[슐리펜 계획]]에 대한 걱정이 일자, 독일 전쟁 계획에 있어 네덜란드 [[림뷔르흐(네덜란드)|림뷔르흐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는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 및 노르웨이어로 번역되었다. 1920년에 네덜란드 총참모부에 참가하였으며, 제네바 군축회의에서 네덜란드 대표단을 맡았다. [[대공황]]의 여파로 발생한 1934년 [[암스테르담]] 폭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이 때가 [[네덜란드군]]이 최초로 [[장갑차]]를 활용한 때였다. 1935년에는 [[자르 국민투표]]를 감독하기 위해 파견된 [[네덜란드군]]을 지휘하였다. == 재무장 및 제2차세계대전 == 1920년대와 30년대 네덜란드 정치권에 팽배한 [[반전주의]] 사상을 순진하다며 비판하였다[* 후에 이 시대가 네덜란드 국방이 최악이었던 시대였다고 서술하였다.]. 1936년에는 [[라인란트 재무장|독일의 재무장]]에 관한 책을 집필하여, [[제2차세계대전|독일의 꿍꿍이]]를 일찌감치 눈치채어 경고하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네덜란드 정치인들 또한 [[제2차세계대전|다가오는 분쟁]]에 의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중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네덜란드군]]이 허겁지겁 재무장을 하던 때에 상관인 총사령관 [[이자크 레인더르스]]의 의견을 격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독일군의 기계화 및 [[전격전]]에 대하여 경고하였지만, 레인더르스는 전쟁은 긴 정치 외교적 긴장을 따라올 것이라고 믿었다. 결론적으로 레인더르스의 의견이 수용되었지만, 국방장관 아드리안 다익스호른과 갈등을 겪고 사임[* 명예 전역]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네덜란드군]] 총참모부에 이미 판 보르스트 토트 보르스트 형제가 2명[* 다른 이는 남동생 헤르만 판 보르스트 토트 보르스트 (Herman Franciscus Maria baron van Voorst tot Voorst)]이나 있었는 데다 [[가톨릭]] 신자였기에[* 당시 네덜란드 정계는 [[개신교]]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국민 대부분 또한 [[개신교]] 신자였다.] 다익스호른은 총사령관에 [[헨리 빙켈만]] 대장을 임명하게 된다. 빙켈만은 호트프리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은 내부에서 티격태격 하며 시간을 모두 허비해버렸고, 결국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침공| 독일이 진격]]해왔을 때에는, [[네덜란드군]]은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호트프리트는 흐레버베르흐 전투에서 [[독일 국방군|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했고, 최종적으로 네덜란드 서부로 철수해야만 했다.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이 [[로테르담]]을 폭격으로 파괴하고 다른 도시들 또한 폭격하겠다고 협박하자 빙켈만에게 항복을 권유한다. == 전쟁 후 == 네덜란드 침공이 막을 내리자, 호트프리트는 [[나치]]에 부역하기를 거부했고, 이에 따른 대가로 [[전쟁포로]]가 되어 전쟁의 남은 6년동안 독일의 포로 수용소에서 지냈다 [* 동생 헤르만 또한 포로가 되었다.]. 전쟁 후 네덜란드로 돌아왔으며, 여러 군 및 공무직을 맡았다. 그 후 [[1960년]] 그의 80세 생일에 [[대장(계급)|대장]]으로 명예 진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