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홍영우}}}'''[br]'''洪泳佑'''}}}}}}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홍영우(독립운동가).jpg|width=100%]]}}} || || '''본관''' ||[[홍(성씨)|부림 홍씨]](缶林)[* 대율파-종(宗)파 24세 우(佑) 항렬.] || ||<|2> '''출생''' ||[[1890년]] [[2월 5일]] ||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대율동[br](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인근의 남산리·동산리와 함께 [[홍(성씨)|부림 홍씨]] 집성촌이다. [[홍창식]] 전 육군고등군사법원장과 독립유공자 [[홍목]]·[[홍연흠]]·[[홍창흠]]도 이 마을 출신이다.] 731번지) || || '''사망''' ||[[1959년]] [[11월 23일]] (향년 69세) || || '''묘소'''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가호리 동림마을 || || '''상훈''' ||건국포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홍연흠]]은 그의 7촌 재종질(再從姪)이며, [[홍창흠]]은 그의 9촌 삼종질(三從姪)이다. == 생애 == 1890년 2월 5일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대율동(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731번지)에서 아버지 남서헌(南棲軒) 홍기수(洪箕修, 1858. 12. 29 ~ 1929. 2. 25)와 어머니 [[현풍 곽씨]](1857 ~ 1891. 7. 15)[* 곽종우(郭鍾瑀)의 딸이다.] 사이의 5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음력 7월경, 1924년이면 조선이 독립된다는 홍재훈(洪在燻)의 권유로 [[차경석]]을 교주로 하는 [[보천교|흠치교]] 8인조에 가입하여 치성비 50원을 납부하였으며, 보천교 충청도·경상도책으로서 이기식(李基植) 외 여러 명에게 입교를 권유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한 혐의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77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1985&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이송되었으며]] 7월 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정치범처벌령 위반 및 사기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구류 200일 포함)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493&evntId=0034993227&evntdowngbn=Y&indpnId=000002417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다]]. 홍영우는 이에 불복하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3부에서 다만 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이 징역 형기에 산입되었을 뿐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82&evntId=0034988393&evntdowngbn=Y&indpnId=000001963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가 기각되었다]]. 그는 이에 상고했다가 11월 30일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896&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2666&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상고를 취하해]] 결국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2년 8월 2일에 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9년 11월 23일 별세하였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부림 홍씨]][[분류:군위군 출신 인물]][[분류:1890년 출생]][[분류:1959년 사망]][[분류:건국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