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남제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873C0 0%, #3797E8 20%, #3797E8 80%, #1873C0); color: #ece5b6" '''남제 말대 황제[br]{{{+1 화황제 | 和皇帝}}}'''}}} || ||<|2> '''출생''' ||[[488년]] || ||[[제(남조)|남제]]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br](現 [[장쑤성]] [[난징시]]) || ||<|2> '''즉위''' ||[[501년]] [[4월 14일]] || ||[[제(남조)|남제]] [[징저우시|강릉]][br](現 [[허베이성]] [[징저우시]]) || ||<|2> '''사망''' ||[[502년]] [[5월 2일]] (향년 14세) || ||[[양(남조)|소량]] [[마안산시|고숙]][br](現 [[안후이성]] [[마안산시]]) || || '''능묘''' ||공안릉(恭安陵) || ||<|2> '''재위기간''' ||'''{{{#ece5b6 남제의 황제}}}''' || ||[[501년]] [[4월 14일]] ~ [[502년]] [[4월 30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소(성씨)|난릉 소씨]] || || '''휘''' ||보융(寶融) || || '''부모''' ||부황 [[명제(남제)|고종]][br]모후 명경황후 || || '''형제자매''' ||11남 1녀 중 8남 || || '''배우자''' ||옥순화 || || '''자''' ||지소(智昭) || || '''작호''' ||수군왕(随郡王) → 파릉왕(巴陵王) || || '''시호''' ||'''화황제(和皇帝)''' || || '''연호''' ||중흥(中興, [[501년]] ~ [[502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북조시대 [[제(육조)|남제]]의 제7대 황제. 묘호는 없고, 시호는 화황제(和皇帝)[* 평화적으로 선양을 해줬다는 의미.]. 휘는 소보융(蕭寶融). 자는 지소. 재위 기간 동안 중흥(中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 상세 == 영명 6년(488), 명제 [[명제(남제)|소란]]의 8남으로 태어난 소보융은 소보권의 동복 동생이었다. 남강왕, 서중랑장, 형주자사가 되어 7주의 군사를 감독했다. 영원 2년(500) 11월, [[소보권]]은 서중랑장사 소영주에게 소연을 토벌하게 하고, 보국 장군 유산양으로 하여금 구원병을 이끌고 협조하게 했는데, 소연은 소영주에게 편지를 보내 이해관계를 정중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연합하여 건강을 공격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망설이던 소영주는 소연을 따르기로 하고 유산양을 살해하여 그 수급을 소연에게 바치고 투항했다. 소연은 소보융을 옹립하고, [[건강]](난징)을 포위했는데 내부호응으로 폭군 소보권을 죽이고 정변에 성공했다. 소연은 군사들에게 국고를 봉하고, 지도와 호적을 감시하게 했으며, 소보권의 측근 41명을 죽이고, 궁녀 2천여 명을 풀어 장병들에게 시집보냈다. 또한 스스로 중서감, 대사마, 녹상서사, 표기대장군, 양주자사, 건안공이 되어 대권을 장악했으며, 소보융에게 황제에 즉위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소보융은 거절하였다. 영원 3년(501) 정월, 결국은 거절할 수 없어서, [[상국]]에 오르고, 3월에 [[형주|강릉]]에서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흥(中興) 2년(二年, 502년) 정월(正月) 24일, 도읍 [[징저우시|강릉(江陵)]]에서 조서를 내려 [[시중#s-2|겸시중(兼侍中)]] 석천문(席闡文)을 파견해 [[난징시|건강(建康)]]에 주둔하던 [[사마#s-1|대사마(大司馬)]] [[무제(양)|소연(蕭衍)]]의 군대를 [[위로#s-1|위로(慰勞)]]하도록 하였다. 후에 소연이 상국, 양공에 책봉되었고, 2월에 양왕이 되었으며, 3월에는 소연의 강압과 [[협박]] 때문에 [[선양]]했다. 이로써 제나라는 24년 만에 멸망했다. 소보융은 파릉왕으로 강등되어 고숙에 감금되었으나, 제나라의 정삭(달력)을 쓰는 것을 허락받았다. 사실 소보융은 살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원래 소연은 요순 시대의 이야기와 [[조비]]와 [[헌제]] 유협, [[조환]]과 무제 [[사마염]]의 이야기를 들어 자신도 그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했으며, 자신도 제나라의 방계 황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었는데, 좌우에서 소보융을 처리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거라면서 처리하라고 부추겼고, 결국 4월에 소연은 심복 정백금에게 금설주(금가루를 넣은 술)를 내려 소보융을 죽이게 했다. 하지만 소보융은 '''"나를 죽이려면 [[금]]을 쓸 필요가 없다. 죽으면 가져가지도 못하는 금을 뭐하러 쓰는가? 그저 독한 [[술]]이면 충분할 걸세."'''라면서 독한 술을 연거푸 마시고 깊이 취해 있을 때 정백금이 그를 살해했다. 이때 그는 15세였는데 황제의 예로 공안릉에 안장되었다. 사실 소보융은 단 한번도 재위를 하면서 수도인 건강에 와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조서를 내려 소연에게 선양할 당시에 그는 고숙(姑孰)에 있었으며 그 전에는 소보권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강릉(江陵)에 있었다. 이렇게 오랜 막장 학살극 끝에 고제 소도성 계보의 제나라 황족은 오직 말을 못하는 '''사술공 소보의'''[* 파릉왕이었으며 명제 소란의 장남이다. [[농아]]였기 때문에 황제가 되지 못했고, 목숨도 건질 수가 있었다.]와 '''파양왕 소보인''', '''예장왕 [[소종(양나라)|소종]]'''[* 동혼후 소보권의 차남으로 소연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자세한 것은 [[소보권]] 항목 참조.] 세 명만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소연은 원래 소도성의 사촌 소순지의 아들로 소도성의 오촌 조카뻘이다. 소순지는 태조 문황제로 추숭되었다.] 소보의는 양나라 천감 8년(509)에 죽었는데 천수를 누리지 못한 편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북위로 망명했다. 이중 [[소보인|소보인(蕭寶寅)]]은 소란의 6번째 아들로 소연이 소보권을 죽인 뒤 황제에게서 [[구석#s-2|구석(九錫)]]을 하사받고 양공(梁公)에 오르자 소연은 먼저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소란의 친족들을 제거했다. 소란의 조카 상동왕(湘東王) 소보질(蕭寶晊)은 소보권이 죽은 뒤 세상의 인심이 자신에게 올 것이라 기대했는데[* 소보질은 안륙소왕(安陸昭王) 소면(蕭緬)의 장남으로 소도생(蕭道生)의 장남 소봉(蕭鳳)의 아들들은 모두 요절했고 남은 소란의 아들들은 너무 어리니 연장자인 자신이 세상 사람들의 인심을 받을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소연이 구석을 받고 황제를 알현하자 불안해하다가 결국 모반을 했다는 이유로 강릉공(江陵公) 소보람(蕭寶覽)·여남공(汝南公) 소보굉(蕭寶宏)과 함께 주살당했다. 또한 소보융의 동생 소릉왕(邵陵王) 소보유(蕭寶攸)·진희왕(晉熙王) 소보숭(蕭寶嵩)·계양왕(桂陽王) 소보정(蕭寶貞)도 살해당했다. 그러나 당시 친 왕족에 대한 경계가 그리 엄하지 않았기에 집안의 환관 안문지(顔文智)가 측근 마공(麻拱)과 함께 담장을 뚫어 소보인을 빼냈다. 날이 맑고 소보인이 사라진 것을 안 군사들은 소보인을 추격했으나 소보인은 낚시꾼으로 변장해 군사들의 의심을 피했다. 소보인은 후에 화문영(華文榮)의 집에 의탁하였는데, 화문영은 그의 종족 화천룡(華天龍)·화혜련(華惠連)과 함께 말을 임대해서 소보인을 도망치게 했다. 북위로 도착했을 때 소보인의 모습이 말이 아니어서 그곳의 사람들은 소보인이 팔려간 노예로 알았다고 한다. 수주(戍主) 두원륜(杜元倫)이 말을 달려 양주(揚州) 자사인 임성왕(任城王) 원징(元澄)에게 소보인이 왔다는 것을 알리고 소보인을 후하게 대했다. 소보인이 형 소보권의 장례를 치루기를 청하자 장례를 치루게 하였는데 그의 의로운 마음에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왔다. 그는 북위 효문제 원공의 딸 남양장공주 원씨와 결혼해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모반을 일으켜 황제를 [[자칭]]하며 제나라를 다시 세웠으나, 토벌당하자 [[흉노]]로 도주했고, 결국 잡혀 처단되었다. 장남 '''소열'''도 아버지처럼 [[부마]]였으나, 아버지의 반란에 휘말려 처형되었고, 차남 '''소권'''은 아우 소개와 활쏘기 놀이를 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막내 '''소개'''는 장손치의 딸 장손씨와 결혼했으나, 부인 장손씨가 시어머니 남양장공주 원씨와 사이가 좋지 않자 소개와 손잡고 가노를 시켜 원씨를 죽였다. 그러나 이게 탄로나서 소개는 [[거열형]]에 처해졌고, 장손씨는 [[참수]]되었다. 훗날 양나라도 멸망할 때 괴뢰정권 [[후량(남북조시대)|후량]]이 세워졌으니 역사는 역시 돌고 돈다고 하겠다. 여하간 이로써 고제 소도성의 후손들 역시 모두 불운한 운명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 둘러보기(계보) == [include(틀:남제서)] [include(틀:남사)] [각주] [[분류:남북조시대/황제]][[분류:망국의 군주]][[분류:살해된 인물]][[분류:488년 출생]][[분류:502년 사망]][[분류:난징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