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목차] == 개요 == 桓石秀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예주 초국(譙國) 용항(龍亢) 출신으로 [[환온]]의 동생인 [[환활]]의 아들이다. 기마사격에 능했다고 한다. 동생 중 [[환석수]]가 있지만 한자가 다르다. == 생애 == 어려서부터 명성이 높고 풍채가 뛰어났으며, 여러 책을 두루 섭렵하면서 [[노자]], [[장자]] 사상을 선호했다. 또, 환석수는 항상 방을 혼자 쓰고 사람과 교류하는 일이 드물어 당대 사람들로부터 명망 높은 유학자 유순(庾純)에 비견될 만하다는 평을 들었고, 사대부를 좋아하던 [[간문제(동진)|회계왕 사마욱]] 또한 그를 중시했다. 영녕 3년(365년) 2월, 아버지 [[환활]]이 형주자사에 임명되었을 때, 환석수도 응양장군, 경릉태수에 징소되었으나 기뻐하지 않았다. 영강 원년(373년) 7월, 대사마 [[환온]]이 죽고 [[환충(동진)|환충]]에게 모든 군권을 물려받자, 환석수는 영원장군, 강주자사, 영진만호군, 서양태수에 임명되어 심양(尋陽)에 진수했다. 그러나 워낙 자유분방한 성격탓에 늘 산과 강을 노닐며 정사에 뜻을 두지 않았다. 한번은 [[사안(동진)|사안]]이 세상일을 논의하려고 환석수를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말을 아무리 걸어도 환석수가 대답도 하지 않으니, 사안은 이를 심히 괴이하게 여기고 그냥 돌아갔다. 다음 날, 사안은 사촌동생 사사(謝嗣)에게 이 일을 전했고, 사사는 다시 환석수를 찾아가 그 날의 일을 물으니, 그제서야 환석수가 대답했다. > "공(사안)께서 이미 세상일에 통달하셨는데 내가 어찌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태원 3년(378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모든 벼슬을 내려놓았다. 이후 집에서 여생을 보내던 중 4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자, 조정 내외로 이를 애석히 여겨 후장군으로 추증했다가, 얼마 뒤에는 태상으로 다시 추증되었다. 훗날 [[환현]]이 황제를 칭할 때 환석수의 적자 환유옥을 임원왕(臨沅王)에 봉했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초국 환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