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축구협회 임원 명단)]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1D27 0%, #CD313A 30%, #CD313A 70%, #B71D27)" {{{#ffffff '''황보관의 역임 직책'''}}}}}}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FC 서울 감독)]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1D27 0%, #CD313A 30%, #CD313A 70%, #B71D27)" {{{#ffffff '''황보관의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4> {{{#333333,#cccccc '''둘러보기 틀 모음'''}}} || ||<-4> {{{#333333,#cccccc '''개인 수상'''}}} || || [[K리그1|[[파일:K리그1 로고.svg|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ee3224; font-size: 0.9em" [[K리그 대상#s-5.1|{{{#ffffff '''1988 K리그 영플레이어상'''}}}]]}}} || || || || ||<-4> {{{#333333,#cccccc '''베스트팀'''}}} || || [[K리그1|[[파일:K리그1 로고.svg|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ee3224; font-size: 0.9em" [[K리그 대상#s-7.1|{{{#ffffff '''K리그 베스트 11'''}}}]]}}} ||<-3>[[틀:1988 K리그 베스트 11|1988]] · [[틀:1994 K리그 베스트 11|1994]] || }}} || ---- ||<-3> {{{+1 [[대한축구협회|{{{#fff '''대한축구협회 대회기술본부장'''}}}]]}}} || ||<-3> {{{#fff '''Korea Football Association'''}}}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10426101932966.jpg|width=100%]]}}} || ||<-2> '''이름''' || '''{{{+1 황보관}}}[br]皇甫官 | Hwangbo Kwan'''[* 황씨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정확히는 [[황보]](皇甫)가 성이며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이다.] || ||<|2><-2> '''출생''' ||[[1965년]] [[3월 1일]] ([age(1965-03-01)]세) ||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 (現 [[대구광역시]]) || ||<-2>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2> '''신체''' ||[[키(신체)|신장]] 178cm || ||<-2>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br][[축구 감독]][br][[축구 행정가]] || ||<-2> '''학력''' ||[[대구침산초등학교]] {{{-2 ([[졸업]])}}}[br][[계성중학교]] {{{-2 ([[졸업]])}}}[br][[계성고등학교(대구)|대구 계성고등학교]] {{{-2 ([[전학]])}}} → [[서울체육고등학교]] {{{-2 ([[졸업]])}}}[br][[서울대학교 사범대학]] {{{-2 ([[체육교육과|체육교육학]] 84 / [[학사]])}}}[br][[단국대학교/대학원|단국대학교 대학원]] {{{-2 ([[체육학]] / [[석사]][* 석사 학위 논문: [[http://www.riss.kr/link?id=T3595625|여가활동유형과 주관적 여가경험의 관계에 관한 연구]](1992. 2).])}}}[br][[세종대학교 대학원]] {{{-2 ([[체육학]] / [[박사]][* 박사 학위 논문: [[http://www.riss.kr/link?id=T13735011|축구영재성의 상대적 중요도와 횡단적 발달 경향성]](2015. 2). 지도 교수는 [[KBS]] 축구 해설 위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는 [[이용수(축구)|이용수]].])}}} || ||<|4> '''소속''' || '''선수''' ||'''[[제주 유나이티드|유공 코끼리]] (1988~1995)'''[* 171경기 44골][br]'''[[오이타 트리니타]] (1995~1997)'''[* 54경기 27골] || || '''코치''' ||[[오이타 트리니타]] (1999)[br][[오이타 트리니타]] (2004) || || '''감독''' ||[[오이타 트리니타]] U-18 (2000~2003)[br][[오이타 트리니타]] (2005)[br][[오이타 트리니타]] (2010)[br][[FC 서울]] (2011) || || '''행정''' ||[[대한축구협회]] (2011 / ^^기술교육국장^^)[br][[대한축구협회]] (2011~2014 / ^^기술위원장^^)[br][[대한축구협회]] (2014~2021 / ^^기술교육실장^^)[br][[대한축구협회]] (2021~ / ^^대회기술본부장^^) || ||<-2> '''국가대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width=20]]]] 37경기 10골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 1988~1993)^^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축구 행정가]]. 現 [[대한축구협회]] 대회기술본부장. 현역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였고 선수 시절에는 꽤 성공적이어서 [[오이타 트리니타]]에서는 [[J리그]] 발족 후 실업 리그에 있던 구단을 J리그로 승격시키는 데 공헌했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도 활동했지만 주로 구단의 [[사무국(스포츠)|사무국]] 직원 및 행정가로 활동했다. 일본에서 프런트로 활동했을 때의 명성을 바탕으로 대한축구협회 행정가로 나서기 시작했다. == 선수 경력 == [[1965년]] [[3월 1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現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대구침산초등학교]],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계성고등학교(대구)|계성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축구부가 해체되자 [[서울체육고등학교]]로 전학해 1984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84학번)[*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울대학교]]도 1년에 2명씩 체육 특기자를 선발한다.[[http://www.kfa.or.kr/news/news_view.asp?tb_name=kfa_gisa&g_idx=5000&g_gubun=9|관련기사]] 주로 수영선수들이 많이 뽑혔는데 특이하게도 황보관은 축구선수임에도 이 입학 전형을 통해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황보관 외에는 축구 해설위원으로 이름을 날린 [[이용수(축구)|이용수]]와 강신우가 몇 안 되는 [[서울대학교]] 출신 축구선수들이다.]를 졸업한 뒤 [[1988년]] [[제주 유나이티드|유공 코끼리]]에 입단하며 프로에 데뷔했고 같은 해 K리그 신인상을 수상해 두각을 나타내며 국가대표로도 뽑힌다. [youtube(p7TT3X41D48, width=480, height=360)] [youtube(V-NrMmOqN9I)]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당시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1990년]] [[6월 17일]] [[우디네]][* [[우디네세 칼치오]]의 연고지]에서 열렸던 24강 본선 조별리그 2차전 [[스페인]]전 전반 43분에 프리킥 기회를 얻어 [[최순호]]의 볼을 받아찼는데, 무려 '''114km/h의 캐넌 슛'''을 넣었다. 이후로 '''황보관 하면 캐논 슛, 캐논 슈터 하면 황보관'''일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이 때 상대 골키퍼가 바로 [[FC 바르셀로나]]의 레전드인 [[안도니 수비사레타]]였다. 이 골은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일한 골이자, 이탈리아 월드컵 베스트 골 5에 선정됐으며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나이지리아의 [[선데이 올리세]]가 시속 120km/h의 중거리 슛으로 스페인을 격침시킬 때까지 역대 월드컵 최고 시속 골 기록을 유지했다. [[1994년]] [[제주 유나이티드 FC|유공]] 시절 [[전북 현대 모터스|전북 버팔로]]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K리그]] 통산 7번째로 20-20 클럽에 가입했다. 1995년 [[일본]] [[J리그]] [[오이타 트리니타]]에 이적하여 활약하고, [[1998년]]에 은퇴했다. == 지도자 경력 == === [[오이타 트리니타]] 코치, 감독 === 은퇴 후 오이타 트리니타에서 유소년 구단 코치, 수석 코치의 커리어를 거치며 승승장구했고 전임 감독이 지휘봉을 놓자 [[2005년]]에 감독으로 승진했다. 시즌을 1/3 가량 치른 시점까지는 중위권으로 순항하고 있었으나, 이후 팀이 '''12게임 연속 무승'''이란 극심한 부진에 빠지자 시즌 중 사임했다. 이후 오이타 트리니타의 유소년 육성부장, 부사장, 이사 등 구단의 '''[[프런트]]'''로 일하면서 커리어를 좀더 쌓은 후 [[2010년]]에 재차 감독을 맡았으나, 이 때는 오이타가 [[J2리그]]로 강등된 후라 주목할 만한 성과는 없었고 시즌 후 다시 물러났다.[* [[오이타 트리니타]]는 원래 [[J2리그]]에서 시작해서 [[J리그]]로 승격한 팀이다. 더구나 승격 이후 줄곧 중하위권을 찍다가 결국 2009년 '''경영난'''에 빠지자 [[J리그]] 사무국에 자금 융자를 받게 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고, 주축 선수들의 유출로 나락에 빠진 전형적인 [[시민구단]] [[테크]]를 밟으며 강등당했다. 때문에 일부 넷상에서 '황보관이 말아먹었다'는 식의 주장은 [[2ch]] 등에서의 악질적인 인신공격을 여과없이 수입한 것이다. 실상 오이타는 [[2008년]] 한해 반짝 4위를 기록한 게 최고 성적이다. 오이타의 [[J리그]] 성적은 14/16('03) 14/16('04) 11/18('05) 8/18('06) 14/18('07) 4/18('08) 17/18('09)이었다. 게다가 2013년에는 홈 17경기에서 4무 13패를 기록하면서 시즌 홈 무승이라는 불명예 기록을 세웠다.] 오이타 구단의 부사장을 맡고 있던 시절에는 [[http://sports.news.naver.com/kleague/news/read.nhn?oid=076&aid=0001984229|K리그와 J리그를 통합해야 양국 축구가 발전할 수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인터뷰 내용 중에서 K리그보다 J리그가 더 우세하다는 듯한 언급도 했는데, 2007년과 2008년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우라와 레즈]]와 [[감바 오사카]]가 연속으로 우승해서 해당 인터뷰 시점인 2009년 초반에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2009년과 2010년 [[포항 스틸러스]]와 [[성남 FC|성남 일화 천마]] 두 K리그 팀들이 연속으로 아시아 챔피언에 올라 그 발언이 무색해졌다.] 일본 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http://www.instiz.net/pt/175481|1군 감독으로는 아쉬웠지만, 그래도 유소년 육성에는 좋은 편]]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거만 보아도 그가 상대적으로 지도자보다 프런트 쪽에 잘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FC 서울]] 감독 === [[2010년]] [[12월 28일]], 재계약에 실패한 [[넬루 빙가다]]의 후임으로 [[FC 서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K리그 우승으로 한껏 기대치가 높아진 [[FC 서울]] 팬들에게는 아무리 [[J리그]]에서 유소년 육성으로 나름대로 검증을 받은 인물이라고 해도, 사실상 쌩신인 감독 수준 취급이었고, 게다가 그 전에 언급된 K리그와 J리그 통합 발언을 기억하고 있는 팬들도 있어서 [[http://www.fcseoul.com/withfan/board/bbs_wh_view.jsp?seq=108013&tcd=&pg=&searchGb=&searchTxt=|우려와 불만의 목소리]]를 냈다. 반면 [[정조국]], [[김진규(1985)|김진규]] 등 고참들의 이적으로 팀 전력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할 시점이 닥치긴 했지만 [[마우리시오 몰리나|몰리나]], [[김동진(1982)|김동진]]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을 영입하고, [[FC 서울]] 정도 되면 팀 리빌딩 중이라도 하위권으로 밀려날 일은 없으리라고 믿으면서 기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이처럼 신임 감독을 바라보는 구단과 팬들의 시각은 너무나도 달랐고, 황보관 체제는 시작부터 온갖 잡음에 시달렸다. 아래는 황보관이 취임한 후 사임하기 전까지 [[FC 서울]]이 치른 경기와 결과다. * [[AFC 챔피언스리그]] 32강 본선 조별리그 1라운드 알아인전 원정 1:0 승 * [[K리그]] 1라운드 수원전 홈경기 0:2 패 * [[K리그]] 2라운드 대전전 원정 1:1 무 * [[AFC 챔피언스리그]] 32강 본선 조별리그 2라운드 항저우전 홈경기 3:0 승 * [[K리그]] 3라운드 전남전 원정 0:3 패 * [[K리그]] 4라운드 전북전 홈 경기 '''3:1 승'''[* 혹자는 이 승리를 놓고 본프레레 국가대표 감독이 2004년에 독일을 상대로 거둔 3:1 승리에 비견하기도 한다. 그만큼 당시 [[최강희(축구인)|최강희]] 감독의 전북을 상대로 어떻게 이렇게 이겼는지 의문이 드는 경기였지만, 저 때 전북은 유독 서울을 못 잡았기에 크게 놀랄 결과는 아니다.] * [[AFC 챔피언스리그]] 32강 본선 조별리그 3라운드 나고야전 원정경기 1:1 무 * [[K리그]] 5라운드 부산전 원정 1:1 무 * [[K리그]] 6라운드 울산전 홈경기 1:1 무 * [[AFC 챔피언스리그]] 32강 본선 조별리그 4라운드 나고야전 홈경기 0:2 패 * [[K리그]] 7라운드 광주전 원정 0:1 패 * 리그 7전 1승 3무 3패. 7라운드 결과 16개팀 중 14위 * 챔스 4전 2승 1무 1패 * 총 11전 3승 4무 4패 아챔에서 3라운드까지는 선방했으나, 4라운드 홈 경기에서 나고야에 맹공을 퍼붓고도 0:2로 완패를 당하며 체면을 구겼다. 사실 21세기 들어 [[K리그]] 판도 자체가 디펜딩 챔피언 자체를 쌈싸먹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남 일화가 몰락한 이후 K리그는 3연패는커녕 감히 어느 팀도 2년 연속 우승을 장담하지 못할 만큼 치열하게 물고 물리는 리그가 되어 버렸다. 2011년 7라운드를 치르는 동안, [[FC 서울]]은 물론이고 과거 '아시아의 깡패'로 명성을 날리던 [[울산 현대]]도 중하위로 쳐졌다. 우승 경쟁자로 예상되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수원]]은 4위이고 2010년 준우승 팀 [[제주 유나이티드|제주]]는 6위. 반면 리그 선두는 작년 9위였던 [[포항 스틸러스|포항]]. 하지만 2010 시즌 우승 팀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FC 서울]] 팬들에게는 '''7경기 동안 딱 한 번 이기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임은 자명하다. 그 당시 [[차두리]]의 [[우루사]] CF BGM으로 쓰이던 '''[[간 때문이야]]'''를 개사한 "관 때문이야" 노래를 부르거나 초호화 외국인 선수단 F4 에 황보관 감독이 Alt 라는 드립을 쳐댔다. 일견하기엔 감독 하나 바뀌면서 팀을 거하게 말아먹은 듯 하지만, 사실 바뀐 것은 감독 뿐만 아니라 스쿼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난 시즌 우승의 주역이었던 [[정조국]], [[김진규(1985)|김진규]], [[김한윤]] 등 '''팀의 구심점이 되어 줄''' 고참이 대거 이탈했다는 점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서울은 야심차게 [[마우리시오 몰리나|몰리나]]까지 영입하며 최고의 외국인 선수 진용을 갖췄지만, 일각에선 이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다. [[마우리시오 몰리나|몰리나]], [[세르베르 제파로프|제파로프]], [[데얀 다미아노비치|데얀]] 셋의 장단점을 짜맞춰보면 서로 엇박자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실제 이런 우려가 상당 부분 들어맞았다.] 7라운드 [[광주 FC|광주]] 원정 경기에서 총력전을 폈으나, 최약체로 평가받던 '''신생 팀''' 광주의 카운터 한 방에 무릎을 꿇었다.[* 광주는 전 라운드 홈경기에서 [[전북 현대 모터스|전북]]에 6:1로 대패했었다] 결국 다음 날인 [[4월 26일]] [[최용수]]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감독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이로써 '''[[FC 서울]] 구단 사상 최초로 시즌 도중 사임'''한 감독이 되었으며, [[K리그]] 최단 기간 재임 감독[* [[1월 3일]] ~ [[4월 26일]]. 110일]이라는 불명예도 함께 안게 되었다.[* 일각에선 겨우 7경기를 치르고 사임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서울 팬들은 '더 일찍 사임했어야 한다'며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그 때문에 감독 시절 별명은 맨날 진다고 해서 '''항복왕'''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업적이라고 부를 부분이 있다면, 훗날 [[K리그 챌린지]]에서 잠재력을 발휘하며 주전으로 거듭난 [[문기한]]의 능력을 미리 알아보고 1군에 데뷔시켜서 경험치를 쌓아줬다는 것 정도. 다만 문기한이 주전으로 자리 잡고 포텐을 터뜨린 것은 서울을 떠난 뒤의 일이었음으로 사실상 이룬 게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 행정가 경력 == === [[대한축구협회]] === [[FC 서울]] 감독직을 사임하고 한 달이 지난 [[2011년]] [[5월 25일]], [[대한축구협회]]의 기술교육국장으로 선임되어 행정가 커리어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일본에서 은퇴한 후 프런트로 많이 일했고, '지도자보다 프런트 쪽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라서 선임한 것으로 보인다. 다들 역시 [[행정보급관|행보관]]은 감독 말고 행보관을 해야 한다며 반기는 평. [[대구 FC]]의 [[이영진(1963)|이영진]] 감독이 2011 시즌을 마치고 해임된 후 황보관 국장을 후임 감독 후보군에 올려두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기사에서는 축협의 H국장이라고 나왔지만, 대구 출신의 H국장이면 황보관밖에 없다. 거기다가 [[변병주]] 감독의 퇴진 후 새 감독을 뽑으려 할때도 감독 후보군에 올랐던 사람이 황보관이었다. 하지만 기사가 나온 바로 다음 날, [[대구 FC]]는 브라질 올림픽대표팀 수석코치 출신의 [[모아시르 페레이라]]를 새 감독에 선임함으로써 [[K리그]] 팬들의 뒷통수를 시원하게 때렸다. 2011년 11월 10일 [[이회택]] 전 기술위원장의 후임으로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장으로 취임했다. [[FIFA 랭킹]] 10위까지 올리겠다고 선언. 2011년 12월 8일 대한축구협회는 [[조광래]] 감독을 전격 경질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감독 임명 해임권을 쥔 '''기술위원회가 소집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높으신 분들]]끼리 밀실 행정 논란이 불거졌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12/08/0200000000AKR20111208117600007.HTML|관련기사]] 2012년 2월 해임된 [[조광래]] 전 감독이 남긴 인터뷰에서 이 밀실 행정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 단 재임 기간 내내 협회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잘린 뒤 수차례 뒤끝 작렬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520705.html|관련기사]] [[정몽규]] 제52대 축구협회장이 당선되고 난 후에도 전 [[대한축구협회]] 집행부들 중 유일하게 유임되었다고 한다. == 비판 및 논란 ==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홍명보호]]가 참담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기술위원회 역시 책임론이 불거졌다. 여기에 현행 기술위원회가 사실상 '''허울뿐인 기구로 전락'''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http://isplus.joins.com/article/208/15154208.html?cloc=|관련기사]] 2014년 7월 3일 빗발치는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홍명보]] 감독이 유임하고 심지어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 누구 한 사람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자, [[붉은 악마]]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황보관 위원장의 해임을 요구했다. [[http://daily.hankooki.com/lpage/sports/201407/dh20140703180509139190.htm|관련기사]] 2014년 7월 10일 결국 [[홍명보]] 감독과 [[허정무]]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이때 황보관 위원장 역시 동반 사퇴한다는 보도가 돌기도 하였으나, [[대한축구협회]]는 아직 황보관 위원장의 거취는 결정된 바 없다고 일단 부인했다. 축구협회는 황보관이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2014 브라질 월드컵]]에 대한 백서작업을 마무리하는 게 우선이라지만 월드컵을 말아먹은 사람이 반성과 결산을 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지적이 많다. 오죽 사람이 없으면 물러날 사람이 반성과 결산을 할 정도로 축구협회 행정이 유치하냐는 비판도 쏟아진다. 축구 팬들 사이에서 [[음모론]]에 따르면, [[정몽규]] 회장이 축구계 사정에 밝지 못한 점을 이용해서 몇몇 [[친목질]] 종자들이 회장 주변에 [[철의 장막|인의 장막]]을 구축하고 황보관을 데려다가 [[바지사장]]처럼 기술위원회에 앉힌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 [[홍명보]], [[허정무]] 사퇴 이후 축피아의 핵심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찍혔다. 국내 축구 기사는 물론 해외축구 기사에도 달리며 심지어는 다른 종목, 심하면은 [[스포츠]]와 관련없는 기사에서도 댓글에 출몰하는 수준으로 찍혔다. 심지어 황보관이 물러나고 새로운 기술위원장으로 [[이용수(축구)|이용수]]가 선임되었다는 소식에서도 황보관을 사퇴시키라는 여론까지 나왔을 정도. 2017년 기준으로도 기술교육실장으로 여전히 [[대한축구협회]]에서 활동 중이다. 심지어 [[2015 AFC 아시안컵 호주|2015 호주 아시안컵]] 기간에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슈틸리케호]]) 지원팀장으로 활동했다. 쿠웨이트전을 앞두고 [[손흥민]]이랑 몇명이 감기몸살로 인해 쿠웨이트전을 출전을 못했는데,[* 이는 선수들의 몸관리에 실패한 것인데, 독감에 걸린 선수에게 프로의식이 부족하다는 사유로 벌금을 내게 하는 구단도 많은데, 이것은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시 대표팀 [[주치의]]가 [[흉부외과]] 출신이라고 하는 걸 보면 팀 닥터를 잘못 뽑은 것이 맞다.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501150952223&sec_id=520101&pt=nv|해당기사]]를 보면 확실히 대표팀 의료부분에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하다. 2017년 9월 14일, 다른 축협 임원들과 함께 횡령 배임혐의로 입건되었다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14/2017091401470.html|기사]]가 떴으나, 혐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 [[불기소처분]]을 받았다.[[https://www.yna.co.kr/view/AKR20181229029500007|기사]] 2021년 [[정몽규]] 회장의 3선 성공 후 내부인사 개편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황보관이 대회기술본부장을 맡아 올림픽 대표팀을 지원하는 단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는 KFA가 스스로 규정을 어긴 것인데 KFA 국가대표축구단 운영규정 제12조 4항을 보면 ‘협회는 필요하다 판단되면 각급 대표단에 단장을 선임한다. 단장은 협회 임원 중에서 선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단장으로서 덕망과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황보관이 얼마나 덕망과 능력을 갖췄는지는 모르지만 임원은 아니다.[* KFA 조직도에 따르면 임원은 회장, 부회장, 전무·분과위원장, 이사를 의미한다.] 이에 축구팬들은 규정까지 어겨가며 [[이용수(축구)|이용수]]와 함께 슬금슬금 축협 자리에 기어들어오는 적폐들의 행태에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아니나다를까 올림픽대표팀 [[김학범]] 감독이 선수 선발에서 잡음을 매우 심하게 내면서 폭주하고 있음에도, 황보관은 이를 전혀 중재하지 못하면서 올림픽 대표팀의 불균형한 스쿼드 명단에 대해 문제 제기 없이 K리그나 A대표팀의 희생을 강요하는 무리한 퍼주기 식 지원만을 감행했다. 또 주요 대회마다 동행하며 김학범 감독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던 테크니컬스터디그룹(TSG) 위원[* 황보관의 취임 전까지 주요 대회 리포트를 작성해 누구보다 당시의 U-23 선수들을 잘 알고 코칭스태프를 도울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도 출입증 부족으로 도쿄 현장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정작 '''본선에서는 졸전 끝에 8강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6-3 대패를 당하며''' 스스로 무능함을 증명해 버렸다. 이후 [[김판곤]] 사임 이후, [[이용수(축구)|이용수]]와 함께 다시 협회로 돌아왔다.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2022 카타르 월드컵]] 중에 밝혀진 기사에 따르면, [[파울루 벤투]] 감독은 1월부터 기술위원회나 협회와 단절하고 모든 훈련과 일정을 계획했다고 한다. 비록 이용수는 2022년을 끝으로 물러났지만 차기 대표팀 감독의 선임 과정에서 [[마이클 뮐러]] 전력강화위원장이 계약기간도 모르고 있었고,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대표팀으로 부임하는데 네임밸류를 중시하는 정몽규 회장의 성향을 떠받들기나 하던 황보관이 가장 크게 관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한국축구의 암덩어리 역할을 여전히 톡톡히 해내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대한민국 축구를 뒤집어놓은 [[2023년 대한축구협회 승부조작 축구인 사면 사건]]이 터졌을 때 이사진 대다수가 물러났음에도 [[정몽규]]와 함께 자리를 지켜 축협의 철밥통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클린스만 선임 이후로도 대표팀 감독 업무를 뒤로 한 채 개인일정을 소화하는 클린스만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대표팀의 신뢰도를 추락시키고 있다. 2023년 상반기에는 K리그 감독들과 클린스만 감독을 비롯한 대표팀 코칭 스태프들과의 간담회를 추진했지만 클린스만 감독이 개인일정을 이유로 고사해서 모두 실패했으며, 벤투호와의 연속성을 위해 유일하게 유임된 마이클 김 코치를 보직 변경을 빌미로 쫓아내는 모양새를 만들어 벤투호의 유산과도 단절됐다. 특히 대표팀 전략강화위원회 소속 기술위원들은 마이클 김 코치의 퇴단을 8월 31일 보도를 통해 알았으며, 그 며칠 전인 28일에 있었던 전략강화회의에서 마이클 뮐러 위원장과 함께 남자 성인대표팀에 대한 안건이 나오는 것조차 막아버렸다고 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HBvL8fuSd3k|영상]] [[분류:1965년 출생]][[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영천 황보씨]][[분류:서울체육고등학교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단국대학교 대학원 출신]][[분류:세종대학교 대학원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선수]][[분류:미드필더]][[분류:1988년 데뷔]][[분류:1997년 은퇴]][[분류:제주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분류:오이타 트리니타/은퇴, 이적]][[분류:대한민국의 FIFA 월드컵 득점자]][[분류: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분류:1988 AFC 아시안컵 카타르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감독]][[분류:오이타 트리니타/역대 감독]][[분류:FC 서울/역대 감독]][[분류:축구 행정가]][[분류:축구경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