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임진왜란/전투]] [include(틀:임진왜란 전투 목록)] ||<-3> {{{+1 '''황석산성 전투'''}}} || || '''시기''' ||<-2> [[1597년]] 8월 || || '''장소''' ||<-2> 조선 경상도 함양 황석산성 || || '''원인''' ||<-2> 왜군의 침공 || || '''교전국''' ||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width=30]] ||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width=25]] || || '''지휘관''' || 안음 현감 [[곽준]]† [br] 전 함양 군수 조종도† [br] 전 김해 부사 백사림 ||<^|1> [[가토 기요마사]] [br] [[구로다 나가마사]][br] [[나베시마 나오시게]] || || '''병력''' || 수백 이상 || 2만 이상 || || '''피해''' || 전원 몰살|| 불명 || || '''결과''' ||<-2> 황석산성 함락과 전주성 무혈입성 || [목차] [clearfix] == 개요 == 정유재란기에 일어난 전투. 정유재란에서 육전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이다. == 배경 == 황석산성은 거창에서 육십령을 넘어 전주로 빠지는 요충지에 위치했다. 이에 이원익은 적이 반드시 쳐들어 올것이라 여기고 안음 현감 곽준에게 안음, 거창, 함양 세 읍의 백성과 군사, 식량을 모아서 황석산성으로 들어갔다. 황석산성으로 들어간 이후 조선의 군민은 성을 수축하고, 청야 작전을 펼쳤다. 일본군의 진격로의 황석산성이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조선군의 청야 작전으로 인해서 계획보다 못미치는 군량을 수급한 일본군은 황석산성의 식량을 얻기 위해 황석산성을 침공했다. == 전개 == 8월 16일, 일본군은 황석산성을 포위하고 성을 비우고 나가면 추격하지 않겠다고 최후 통첩을 보냈으나, 성의 군민들은 항전 의지를 다져 일본군은 전투가 불가피함을 알고 동, 서, 남으로 포위하였다. 밤에 일본군은 가토 기요마사는 남쪽, 구로다 나가마사는 동쪽,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서쪽에서 공세를 펼쳤다. 곽준과 조종도가 주축이 되어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나 군사수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백사림이 감당하기 힘듦을 깨닫고 가족을 먼저 성 밖으로 내보낸 다음 성문을 열고 도망갔다. 이 틈을 타서 일본군이 성 안으로 돌진해왔다. 일본군에 맞서 백병전을 펼치며 결사적으로 항전해으나 조선군은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멸했다. 이 때 곽준과 그의 아들 곽이상, 곽이후도 전사했으며 조종도도 전사했다. 성을 함락한 이후 일본군은 성을 뒤지며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고 이러면서 성이 함락되었다. == 결과 == 일본군은 황석산성을 함락한 이후 곡물을 확보하고 전라도로 진군했다. 이러면서 후방의 위협도 제거하고 곡물을 확보하는 일거양득을 거두었다. 이 여파로 전주성까지 함락되는 무참한 결과로 이루어졌다. 혼자 살고자 도망친 백사림은 당연하게도 무수한 비난을 당했으나 백의종군과 사면령을 통해 살 수 있었다. [include(틀:포크됨2, title=황석산성 전투, d=2022-07-15 09: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