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fffff {{{+1 황의순}}}[br]黃義淳}}}''' || ||||{{{#!wiki style="margin:-6px -10px" [[파일:황의순.jpg|width=100%]]}}}|| || '''이름''' ||<(>황의순 || ||<|2><:> '''출생''' ||<(>[[1935년]] [[11월 20일]]||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금구리 253 || ||<:> '''사망''' ||<(>[[2023년]] [[7월 28일]] (향년 88세) || ||<:> '''학력''' ||<(> [[서울교동초등학교|교동국민학교]] {{{-2 (전학)}}}[br][[죽향초등학교|죽향국민학교]] {{{-2 (전학)}}}[br]삼양국민학교 {{{-2 (졸업)}}}[br][[용산중학교]] {{{-2 (졸업)}}}[br][[용산고등학교]] {{{-2 (졸업)}}}[br][[한국외국어대학교|한국외국어대학]] {{{-2 (중퇴)}}}[br][[경남대학교]] 영문과 {{{-2 (학사)}}} || ||<:> '''직업''' ||<(> 영화인 || ||<:> '''가족''' ||<(> 배우자, 슬하 1남 1녀 황호연, 황영실 || ||<:> '''약력''' ||<(> 리버티뉴스 편집부장·제작부장[br]주한미국대사관 공보고문[br]유진벨재단 상임 고문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영화인. == 생애 == ===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다 === [[1935년]] [[11월 15일]]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금구리 253번지에서 태어났다. 누나 2명에 형 1명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는 [[만주]]를 오가면서 물건을 파는 일을 했는데, 수입이 불가능한 물건[* [[광목]] 등]을 사와 벌금과 경찰서를 여러번 왔다갔다고 한다. 사업 때문인지 굉장히 부잣집에 살았다고. 옥천에서 유일하게 기와지붕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의 사업 확장을 말미암아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 [[낙원동]]으로 이사를 가었다. 그로 인해서 [[서울교동초등학교|교동국민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나, 3학년이 채 되기 전에 서울에 나타난 [[B-24]]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옥천으로 귀향하였다.[* 폭격기 하나 때문에 이사를 가냐 할 수도 있는데, 당시에는 [[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굉장히 놀랐다고 한다. 황의순 씨의 증언에는 "시골에 연고가 있는 사람은 모두 피난을 갔다"라고.] 그러고 [[죽향초등학교|죽향국민학교]]를 다니다 삼향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고 졸업을 했다. 그러던 중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용산중학교]]에 입학을 한다.[* 당시는 중학교도 [[입시]]를 치러야 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6169|(이후 1969년에 폐지)]]그래서 [[경기중학교]]를 들어갈려고 했다가, 시골 사람이라 겁이나서 [[용산중학교]]를 지원했는데, 상위권에 합격을 해서 "경기중에 지원을 할걸"라는 후회가 몰려왔다고 한다.] === '하우스보이'와 외대, 입대 그러나 === 중학교 2학년에 [[6.25 전쟁]]이 발발한다. 그래서 옥천으로 피난을 갔다가, [[인민군]]이 점령해버리자 땅굴을 파서 3개월 동안 살았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9.28 서울 수복]]이 성공하자 서울로 올라갔으나, [[1.4 후퇴]]때문에 "고향으로 가봤자 별 수가 없다"라는 생각으로 피난열차를 타고 [[부산직할시|부산]]으로 피난을 가였다. 이후 [[용두산공원]]으로 가였다가, 양복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다. 양복집에서 만난 미군이랑 친해지고, 미국 해병사단장 밑에서 이른바 '하우스 보이[* 미군 캠프에 숙식이 가능한 대신 미군을 위해 간접적으로 일하는 것.]'로 일했다. 그러면서 너머로 간접적으로 영어를 익혔다. 그렇게 미국과 오랜 인연을 시작했다. [[1953년]] 봄, 캠프의 상관이 "[[6·25전쟁]]이 곧 있으면 [[6.25 전쟁/전개#s-10|끝날 것 같고]] 미군 부대 그만하고 학교로 가자"라고 권유를 해 [[용산고등학교]]를 다니고 1956년 용산고를 졸업을 하였다. 그러고 대학 시험을 보나, 형편이 안좋아 수학, 역사 점수가 당연히 안좋아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나 '하우스보이'로 활동해서 영어 실력은 당시로썬 기가 막혔다. 그 때문에 [[한국외국어대학교|외국어대학]]를 갔으나 학비 마련이 힘들어 1년만에 대학을 그만두고 군대에 들어갔다. 유년 시절 비행기를 보는 것이 위로가 되어 입대를 하지만 군대에서 폐가 안좋아 병역면제를 받았다. === 마산에서의 요양이 인생을 바꾸다 === 일단 [[마산]]의 친척집에서 요양을 하게된다.[* 당시 마산에는 육군군의학교와 육군간호학교가 있고 황의순 씨의 말에 따르면 공기가 무척 좋기 때문에 요양하기 좋은 곳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친척집에 있으면 눈치가 보여서 [[다방]]을 자주 오갔다. 다방에서 [[타임(주간지)|타임지]]와 [[뉴스위크]]와 같은 영자신문을 읽는데, 다방 주인이 눈 여겨보고 영어 학원을 소개시켜서 영어를 가르친다 한 달 정도 영어를 가르치다가 한 학생이 "[[재능낭비|선생님은 영어도 잘 하시고 그러는데 이런 거 하셔야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미국 대사관이 운영하는 미국공보원(USIS)에서 사람을 뽑는다는데 시험을 처봐라"라고 말해 시험을 봐 입사를 했다. 그렇게 미국공보원(USIS)의 창원군 상남면 산하 영화제작소 '리버티 프로덕션' 인턴으로 대사관에 첫발을 디뎠다. 처음엔 윌리엄 리지웨이 영화제작소장의 비서로 시작해 번역실 근무를 하였다. 번역을 하면서 영어 실력이 는 그는 번 "그 정도 영어를 하면 번역만 하지 말고 편집실에 가서 무비올라[* moviola. 편집기]도 돌려보고"라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영화도 만들어보고 인화도 해본 그는 [[리버티뉴스]]를 전문으로 한다. 1959년부터는 '리버티뉴스' PD로 일했다. 리버티뉴스는 미국공보원이 매주 목요일에 만들어서 전국 극장과 미 문화원·공보원, 이동영사기로 상영한 뉴스 매체였다. 그곳에서 뉴욕타임스(NYT)·CBS·NBC 등 외신기자들의 국내 촬영도 도왔다. 1960년에는 3·15 부정선거와 4·19 취재를 위해 입국한 외신 기자들과 함께 마산과 창원을 뛰어다녔다. 이 시기 USIS의 촬영감독 김태환과 함께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부두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모습을 촬영했고, 이때 만든 4·19 기록영화로 '리버티뉴스' 제작팀을 대표해 미 국무부의 표창을 받았다. 당시 리버티뉴스의 영향력은 커서 경무대는 이승만 대통령을 언급할 때 인자하고 온화한 표현을 사용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이후 리버티뉴스는 '미국의 시각'이 불만스러웠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립영화제작소를 만들도록 지시한 뒤인 1967년 6월 30일 721호를 끝으로 대한뉴스에 자리를 넘겨줬다. 그리고 리버티뉴스가 없어진 그는 1974년부터 미대사관 신문과의 언론 반응 분석관을 맡아 신문 사설의 번역 및 보고 업무를 했으며 1978년부터는 미 대사관 공보 고문을 지냈다. 그는 그렇게 미대사관에서 일하며 1970년대 미사일 계획을 정부에서 추진할 때 미국이 계속 통제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았다. 또한 '50~60년대엔 무조건적으로 지원하는 듯 했지만, 역시 공짜는 없구나'를 직접적으로 체험하였다고 한다. 1980년대에는 미 대사관 공보 고문과 '미국의 소리(VOA)' 방송 서울지국장을 겸직함을 통해 군사정권 시절임에도 주한 미 대사관을 드나들며 외신 자료를 구하던 당시 야권 인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이후 2000년 11월 30일 43년 11개월을 몸담아온 미국공관에서 정년퇴임했다. 그리고 퇴임 후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유진벨 재단의 상임고문을 무보수로 맡기도 하였다. === 사망 === 2023년 7월 28일 오후 1시께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 == 참고 문헌 == * [[https://www.kmdb.or.kr/history/talk/2489|황의순 구술채록문]] == 관련 문서 == * [[리버티뉴스]] [[분류:1935년 출생]][[분류:2023년 사망]][[분류:옥천군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영화인]][[분류:경남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