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중국 흠정 24사)] ||<:><-2>'''{{{#D4CD99 {{{+1 후한서}}}[br]後漢書[br]Book of Later Han}}}''' || ||<:> '''{{{#D4CD99 저자}}}''' ||<(> [[범엽]], 사마표[* 지 부분은 사마표의 속한서] || ||<:> '''{{{#D4CD99 시기}}}''' ||<(> [[5세기]] [[송(남조)|유송]], 일부는 3세기 서진 || ||<:> '''{{{#D4CD99 언어}}}''' ||<(> [[한문]] || ||<:> '''{{{#D4CD99 권 수}}}''' ||<(> 130권 || ||<:> '''{{{#D4CD99 분량}}}''' ||<(> AD 25년 ~ AD 220년 (215년)[br] [[광무제]] 1년 ~ [[한헌제]] 31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後漢書 흠정 [[24사]] 중 세 번째 역사서. [[후한]]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기전체]]로 쓰여졌다. [[송(남조)|유송(劉宋)]]의 [[범엽]]이 편찬했다.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되어 있다. 이 중 본기와 열전은 [[범엽]]의 저작이고, 지(志)는 [[사마표]]가 쓴 『속한서(續漢書)』의 것이다. == 내용 == [include(틀:후한서)] 후한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범엽의 《후한서》가 나온 후 안타깝게도 모두 사라졌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정사 삼국지]]》에 주석으로 남아 있는 것도 있다. 《동관한기(東觀漢記)》, 범엽의 《후한서》, [[동진]] [[원굉(동진)|원굉]]의 《[[후한기]]》를 제외하고, 전체가 전해지지는 않으나 집본(輯本)으로 전해지는 8명의 역사가가 기록한 후한의 역사서를 '팔가집주후한서(八家輯注後漢書)'라고 한다. 특히, 사승의 《후한서》에는 [[고간(삼국지)|고간]] 등 기록이 별로 없는 인물의 열전도 수록되어 있었고, 사마표(司馬彪)의 《속한서》에는 황건적들을 수록한 〈황건전(黃巾傳)〉도 따로 있을 정도로 신선했지만 소실되었기 때문에 남아있지 않다. 팔가후한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다.[* [[https://zh.wikipedia.org/wiki/%E5%85%AB%E5%AE%B6%E5%BE%8C%E6%BC%A2%E6%9B%B8|출처]]] * [[사마표]](司馬彪), [[서진]]: 《속한서(續漢書)》, 83권, 집본 5권 * [[사승]](謝承), 삼국 [[오(삼국시대)|오]]: 《후한서(後漢書)》, 130권, 집본 8권 * [[사침]](謝沈), 동진: 《후한서(後漢書)》, 122권, 집본 1권 * [[설영]](薛瑩), 삼국 오: 《후한서(後漢書)》, 100권, 집본 1권 * 원산송(袁山松), 또는 원숭(袁崧), 동진: 《후한서(後漢書)》, 100권, 집본 4권 * 장번(張璠), 서진: 《후한기(後漢紀)》, 미완성, 30권, 집본 1권 * 장영(張瑩), 동진: 《후한남기(後漢南紀)》, 55권 또는 58권, 집본1권 * [[화교(삼국지)#s-2|화교]](華嶠), 서진: 《한후서(漢後書)》, 97권, 집본 3권 범엽은 장번을 제외하고 당시까지 전해져 내려오던 7명의 역사서 자료를 종합하였으며, 원굉의 《[[후한기]]》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견해를 넣어 《후한서》를 만들었다. 하지만 범엽이 후에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바람에 완성되지 못하여 [[기전체]]의 구성 요소 중 표(表)와 지(志)가 없었다. 그래서 표는 존재하지 않고 오늘날 남아있는 《후한서》의 지는 [[양(육조)|양나라]]의 [[유소#s-3|유소]]가 [[사마표]]의 《속한서》를 인용하고 주석을 붙인 것이다. [[http://ctext.org/hou-han-shu/zh|한문 원문]] [[삼국지]]와 관련해서는 《[[정사 삼국지]]》에는 조금씩 밖에 나오지 않는 인물의 기록이 《후한서》에는 상세하게 나와 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책이 다루는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원소(삼국지)|원소]]는 양쪽 모두에 열전이 있다. 이렇게 열전이 겹치는 경우 [[진수(역사가)|진수]]가 "이러이러해 망해도 싸다." 하는 식으로 거의 혹평에 가깝게 무자비하게 까내리는 것과는 달리 "장점도 참 많았는데 안타깝다." 같은 식으로 어느 정도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 편이다. 물론 시대가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원술]] 같은 개차반은 얄짤없이 그냥 똑같이 깐다. 《후한서》〈동이열전(東夷列傳)〉은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삼한#s-1.1.1|삼한]], [[왜#s-2|왜]]에 관한 기록이 있어 《삼국지》〈위지 동이전〉과 함께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사서 가운데 하나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외국전을 번역했다. == 그 외 == 특이하게도 열전이 아닌 본기가 먼저 번역되어 나왔다. 번역한 용자는 장은수 전 [[민음사]] 대표로 해당 분야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부족한 점은 많으나, 당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의 주석까지 번역했다는 점은 이채로운 점이다. 애초에 중국 사서 번역 과정에서 주석 번역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것이 대부분이고, 원문이나 충실히 번역하면 다행인 수준이다.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 파성넷에는 《후한서》에 삼국지 인물들의 열전이 실려있어서,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http://rexhistoria.net/index.php?mid=history_LaterHan&page=7&document_srl=16327|링크]] 2018년에 명문당 출판사가 지를 제외한 후한서 본기와 열전을 진기환이 번역한 것을 출판했다.[[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barcode=9791188020447&orderClick=JAH|해당 홈페이지]] 지가 번역되지 않은 점은 아쉬우나 원문 역주본에 [[장회태자]] 이현의 주석이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높다. 사승의 《후한서》와 [[어환]]의 《[[위략]]》이 고려에 존재했다는 주장이 인터넷에 퍼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이자의(李資義) 등이 송나라에서 귀국해, '송나라 황제가 우리나라 서적 가운데 선본(善本)이 많다는 말을 듣더니 관반(舘伴)[*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하는 외교관.]을 시켜 필요로 하는 서적 목록을 주면서 비록 완질이 아니더라도 필히 베껴서 부쳐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4005&categoryId=49629&cid=49629|고려사 선종 8년(1091) 6월 병오일]]) 이 말은 그 서적들이 고려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혹시라도 있으면 보내달라는 의미다. 실제로 그 목록 중에 송나라로 보낸 책이 하나가 있는데, 바로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만 고려가 송나라에 보낸 기록이 있다.[* 육유(陸游)의 위남집(渭南集)에 기록된 이덕추(李德芻)의 말을 인용.] [[초신성]] 폭발을 기록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185년의 초신성 폭발인 SN 185의 관측 기록이 후한서의 속한지에 남아있다. == 관련 [[고사성어]] == * [[거안제미]](擧案齊眉) * [[고추부서]](孤雛腐鼠) * [[노우지독]](老牛舐犢) * [[노익장]](老益壯) * [[동취]](銅臭) * [[득롱망촉]](得隴望蜀)/평롱망촉(平隴望蜀) * [[등용문]](登龍門) * [[발호장군]](跋扈將軍) * [[양진#s-2.2|사지]](四知)↔모야무지(暮夜無知) * [[선견지명]](先見之明) * [[수전노]](守錢奴) * [[수청무대어]](水淸無大魚) * [[양상군자]](梁上君子) * [[우후(후한)#s-2.4|우후지법]](虞詡之法) * [[허소|월단평]](月旦評) * [[이이제이]](以夷制夷) * [[조강지처]](糟糠之妻) * [[반초|투필종융]](投筆從戎) [[분류:후한]][[분류:중국 정사]][[분류:사찬사서]][[분류:기전체]][[분류:단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