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1814년 출생]][[분류:1848년 사망]][[분류:전주 이씨 연령군파]] [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90d43, #29176e 20%, #29176e 80%, #190d43); color: #FFD400" '''대한제국 장조[* 남연군의 양아버지 [[은신군]]이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봉사손이었다. 그러나 계대 문제로 [[조선시대]] 당시에 은신군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사도세자(장조)]]의 자손'이라고 인식했고, [[왕실]]에서도 그들에게 [[영조]] - 사도세자의 후손 자격으로 [[군호]]를 주었다.(20세기 중반부터는 연령군을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연령군]], [[낙천군]], [[은신군]] 문서 참조.]의 증손[br]{{{+1 흥완군 | 興完君}}}'''}}}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장종의 증손[br]{{{+1 흥완군 | 興完君}}}'''}}} || ||<-2> '''[[봉호|{{{#gold 봉호}}}]]''' ||<(> 흥완군(興完君)[* 봉호는 [[여주시]]의 옛 지명인 흥양부(興陽府)에서 유래했다. 형제들의 봉호도 마찬가지. 왕자 군이 아닌 종친 군의 [[봉호]]는 보통 생모의 [[본관|관향(본관)]]을 봉호로 삼는다. 흥완군 형제들의 생모는 [[여흥 민씨]]이다.] || ||||<:> '''[[시호|{{{#gold 시호}}}]]''' ||<(> 문간(文簡) || ||||<:> '''[[본관|{{{#gold 본관}}}]]''' ||<(> [[전주 이씨|전주]](全州) || ||||<:> '''[[이름|{{{#gold 이름}}}]]''' ||<(> 정응(晸應)[* 여담이지만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흥녕군 이창응(李昌應), 둘째는 흥완군 이정응(李晸應), 셋째는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막내가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인데 이최응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운데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최응의 最의 부수는 갈 왈(曰)인데, 아무래도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는 흥완군과 같은 항렬의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인데 먼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이름은 '영('''旲''', '''日''' + 大)'이며 철종은 왕이 된 이후 원범에서 '변('''昪''', '''日''' + 弁)'으로 개명했다.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역시 초명은 '병('''昺''', '''日''' + 丙)' 이었다가 '승응('''昇'''('''日''' + 升)應)'으로 바꿨으며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晧''', '''日''' + 告)' 였다. 은언군의 큰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자이자 풍계군의 친자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曦''', '''日''' + 羲)'였고 철종의 큰 형인 회평군도 원래 이름은 원경이었는데 '명('''明''', '''日''' + 月)'으로 고친 것이다. 영평군 역시 원래 이름은 '욱('''昱''', '''日''' + 立)' 이었다가 후일 '경응('''景'''('''日''' + 京)應)'으로 개명했다.]] || ||||<:> '''{{{#gold 초명}}}''' ||<(> 시응(是應) || ||||<:> '''[[자(이름)|{{{#gold 자}}}]]''' ||<(> 시백(眂伯) || ||||<:> '''{{{#gold 양조부}}}''' ||<(> [[은신군]] || ||||<:> '''{{{#gold 양조모}}}''' ||<(> 남양군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 || ||||<:> '''{{{#gold 생조부}}}''' ||<(> 이병원[*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5대손.] || ||||<:> '''{{{#gold 생부}}}''' ||<(> [[남연군]] || ||||<:> '''{{{#gold 생모}}}''' ||<(> 군부인 [[여흥 민씨]](驪興 閔氏) || ||||<:> '''{{{#gold 부인}}}''' ||<(> 정경부인[*A 사후 추증. 생전에는 군부인이었다.] [[서(성씨)|대구 서씨]](大丘 徐氏)[br]정경부인[*A 사후 추증. 생전에는 군부인이었다.] [[순천 박씨]](順天 朴氏)|| ||||<:> '''{{{#gold 자녀}}}''' ||<(> 1남 [[완순군|완순군 이재완]][* 후술하겠지만 [[완림군|친자]]가 있었으나 자식없이 죽은 [[흥녕군|큰형]]에게 [[양자(가족)|양자]]로 보냈다. 그러다 정작 본인의 대가 끊겨 새로 [[완순군|양자]]를 들였다.] || ||<|2><:> '''{{{#gold 생몰[br]기간}}}''' ||<:> '''[[음력|{{{#gold 음력}}}]]''' ||[[1814년]] [[2월 16일]] ~ [[1848년]] [[5월 18일]] || ||<:> '''[[태양력|{{{#gold 양력}}}]]''' ||[[1814년]] [[3월 7일]] ~ [[1848년]] [[6월 18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남연군]]의 네 아들 중 둘째 아들로 [[흥녕군]]의 첫째 남동생,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둘째 형이다. == 생애 == 1814년 2월 16일 [[한성부]]에서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이자 [[정원군|원종]]의 적3남 [[능창대군]]의 양7대손인 [[남연군|이채중(李采重)]]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여흥 민씨]]이다. 왕실의 후손이었지만 종친의 대우는 그의 [[고조|고조할아버지]] [[안흥군]]의 대에서 끝났고 그의 가족은 단지 [[왕족]] 출신 [[양반]]일 뿐이었다. 그러나 2살 때인 1815년 12월 9일 아버지 이채중이 [[정조(조선)]]의 이복동생이자 [[숙종(조선)]]의 3남 [[연령군]]의 양손자인 [[은신군]]의 [[양자(가족)|양자]]가 되어 [[남연군]]으로 봉해지고 [[종친]]으로 편입하면서 이정응 역시 왕족이 되었다. 1829년 1월 1일 흥완부정(興完副正)으로 봉해졌다.--새해 선물-- 1830년에는 흥완도정(興完都正)이 되었으며 당시 죽은 [[효명세자]] 원[* 왕세자의 무덤을 '원(園)'이라고 한다.]의 수원관을 맡았다. 1833년에 소의대부(昭義大夫) [[품계]]를 받고 흥완군(興完君)으로 봉해졌으며 그 무렵 이름을 '정응(晸應)'으로 고쳤다. 1834년 아내 대구 서씨와 사별하고 3살 연하의 [[순천 박씨]]와 [[재혼]]했다. [[순조]] 사후 산릉도감과 빈전의 대전관(代奠官)으로 참여했다. 1836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받았는데 그해 아버지 [[남연군]]이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오위도총부 도총관 직을 맡았고, 1844년 10월에는 동지정사 자격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8년 5월 18일에 [[한성부]]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34세, [[세는나이]] 35세. == 사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51213_140732.jpg|width=100%]]}}} || || {{{#gold '''흥완군의 묘'''}}} || 조카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즉위한 직후인 1864년 7월 9일에 [[시호]] '문간(文簡)'을 받았고, 1865년 9월 14일에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판종정경(議政府領議政 判宗正卿)'으로 증직시켰다. 묘소는 처음에 충청남도 서산군 보현동(普賢洞) 인좌에 있었다. 그러다 후손들이 둘째 부인인 순천 박씨가 묻힌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면.] 도곡리 산97-1번지에 소재한 안골 금대산(金臺山)의 갓무봉 언덕으로 이장했다. 이때 충청북도 충주에 묻혔던 첫 부인 대구 서씨의 유해도 옮겨 3명을 합장했다. == 여담 == * 그의 묘소 근처에 [[중종반정]]을 일으킨 [[박원종]]의 묘소가 있다. * [[흥선대원군]]이 형제들과 사이가 안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나 큰형 [[흥녕군]]과 둘째형 흥완군과의 관계는 나름 괜찮았다. 흥녕군은 흥선대원군이 9살 때 사망했으니 나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그리고 [[남연군]] 부부가 사망한 이후로는 흥완군이 나머지 형제들을 잘 챙겼다고 한다. 다만 흥완군도 꽤 이른 나이에 죽었고, 그나마 제일 오랫 동안 봐온 68세까지 살았던 셋째 형 [[흥인군]]과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0121070011002.jpg|width=100%]]}}} || || {{{#gold '''흥완군 조복'''}}} || 흥완군이 입었던 [[조복]]을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 후손 == 1831년 본처 대구 서씨에게서 아들 [[완림군|이재원(李載元)]]을 얻었다. 그러나 거의 낳자마자 자녀 없이 죽은 형 [[흥녕군]]에게 [[양자(가족)|양자]]로 보냈다. 아버지 [[남연군]] 집안의 [[제사]]를 받들 [[장손]]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흥완군은 이재원만 낳고 다른 자식없이 죽었다. 그래서 정작 흥완군 자신의 후사는 한동안 없었다. 그래서 흥완군의 [[양자(가족)|양자]]를 들여야했다. 처음에는 동생 [[흥선대원군|흥선군 이하응]]의 장남인 친조카 [[흥친왕|이재면]]이 양자로 들어갔다. 그러나 1864년 1월, 이재면의 동생 [[고종(대한제국)|이명복]]이 [[효명세자|익종]]의 양자로 입적한 뒤 [[왕]]으로 즉위하자 [[신정왕후 조씨|대왕대비 조씨]]가 이재면을 다시 본가로 돌려보냈다. 그래서 또 대가 끊겼다. 이재면이 본가로 돌아간 그해 8월에 실제 혈통 상으로 '''21촌 조카뻘인'''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 종손(宗孫) 음현령 이신오(李愼五)[* 1868년 [[흥선대원군]]이 종친 항렬자 통일령을 내리자 이신응(李愼應)으로 [[개명]]했다. 1870년 사망. 장남이 출계했기에 그의 차남이 경창군파의 종손 자리를 물려받았는데 그 사람이 [[정미칠적]]의 한 사람인 [[이재곤(1859)|이재곤]]이다. --[[이재곤|야구 선수]]가 아니다.--]의 장남 이을경(李乙經)이 흥완군의 새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했다. 이을경은 이재완(李載完)으로 개명했으며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자 황제의 4대손에 해당하여 '완순군(完順君)'으로 봉해졌다. 이후 가계는 [[완순군]] 문서 참조.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흥인군, version=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