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신적강하)] 東久邇成子, [[1925년]] [[12월 6일]] ~ [[1961년]] [[7월 23일]]([[향년]] 35세) [목차] == 개요 == 일본의 직계 황족 출신 [[구황족]]. [[쇼와 덴노]](히로히토)와 [[고준 황후]](나가코)의 2남 5녀 중 첫째이고, [[히가시쿠니 모리히로]]의 부인이다. [[아키히토]] 상황의 첫째 누나이자, [[나루히토]] 천황의 큰고모이다.[* 시게코가 생전에 본 유일한 조카였다.] 결혼 전의 이름은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照宮成子內親王), 결혼 후의 이름은 모리히로 왕비 시게코 내친왕(盛厚王妃成子內親王),[* 황족과 결혼했기 때문에 내친왕 지위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1947년 [[신적강하]]를 당한 후로는 히가시쿠니 시게코(東久邇成子). 데루노미야(照宮)는 가느다란 태양이라는 뜻이다. == 출생 == [[파일:85671BE5-E88A-4290-A23A-629DA4D387E9.jpg]] 아버지 [[쇼와 덴노]], 어머니 [[나가코 황후]]와 함께. 황태자 부부가 혼인 후 얻은 첫 자식이자,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의 첫 [[손주]]이기도 해서 많은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 이때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는 장남 이진을 생후 7개월만에 잃은 직후라, [[일본]] 전역이 시게코 공주의 탄생으로 떠들썩한 것을 보고 '누구는 아이를 낳아서 좋겠네'라고 생각하며 침울해했다고 한다.] 다이쇼 덴노에게 있어서는 생전에 본 유일한 손주이기도 하다. 시게코 공주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 나가코 황태자비를 비롯한 황실 가족들은 아들이 아닌 딸이라 섭섭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 히로히토 황태자는 '여자아이는 다정해서 좋다'라며 기쁨을 표현했다고. 첫 자식이어서 그런지 부모에겐 성별과 상관없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 어린 시절 == 시게코 공주는 [[일본 황실]]의 전통을 깨고 친부모의 곁에서 어머니의 [[모유]]로 자랐으나, 1930년부터 부모와 떨어져 궁성 내에 있는 구레타케(烏竹) 기숙사에서 양육되었다. 양육계가 시중들기 어려우며, 응석을 받아주는 친부모의 곁에서 버릇없이 자라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훗날 태어난 시게코 공주의 여동생들 [[다카쓰카사 가즈코|다카노미야 가즈코]] 공주, [[이케다 아츠코|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 [[시마즈 타카코|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도 이곳에서 함께 자랐다. [[파일:external/blog-imgs-71.fc2.com/cf20694fc9f8bd72c4d7ff8e2f087285.png]] 어린 시절의 시게코 공주 [[파일:attachment/히가시쿠니 시게코/shigeko2.jpg]] ||1941년, [[후리소데]] 차림의 시게코 공주.|| 1932년 4월, 만 6세의 시게코 공주는 [[가쿠슈인|여자가쿠슈인]][* 現 [[가쿠슈인]] [[여중|여자중등과]], 가쿠슈인 [[여고|여자고등과]], 가쿠슈인 [[여자대학]]의 전신]에 입학했다. [[닌코 덴노]] 시절에 세워진 관립학교인 가쿠슈인은 황족과 [[화족]]을 위한 전용 학교였으며[* 패전 이전에는 "황족과 [[화족]]이 다니는 학교는 [[가쿠슈인]]"이라고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전후 이 법은 폐지되었으나, 그래도 '황족이 다니는 학교는 가쿠슈인'이라는 [[암묵의 룰]]이 있었다. 이것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9월 [[쓰구코 공주|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가 [[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이 이후로 일본 황족들의 '탈 가쿠슈인' 사례가 줄을 이었다.], 남학교와 여학교로 분리되어 있었다. 정기적으로 학우들 몇몇이 조를 이루어 시게코 공주의 거처를 방문했는데, 이는 [[궁내성]]에서 정해준 일이었다. 시게코 공주와 친한 친구들은 더 자주 초대되기도 하였다. [[가쿠슈인|여자가쿠슈인]] 시절, 시게코 공주는 작문과 [[자연과학|과학]] 과목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공부를 잘하고 총명해, 부모와 황실 가족들은 시게코 공주가 아들이 아님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만 11~12세이던 1937년부터는, 휴가 때마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단독으로 공무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의식한 탓인지, 아니면 [[천황]]과 [[일본 황실]]의 신격화([[국가신토]])가 한창이었던 시대적 배경 때문인지, 시게코 공주는 여자가쿠슈인 중등과 5학년 시절에 이러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어떠한 인연에서인지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나는 끊임없이 세상의 주시 속에 있다. 언제 어디에서나 나는 우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황실을 짊어지고 있다. 나의 언행은 즉시 황실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어찌 태평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후략) === 황실 가계도 === [include(틀:일본 황실 가계도)] == 결혼 == [[파일:attachment/히가시쿠니 시게코/shigeko.jpg]] [[파일:external/blog-imgs-71.fc2.com/a0287992_3314588.jpg|width=400]] ||[[히가시쿠니 모리히로|모리히로 왕]]과 시게코 공주 부부.|| 시게코 공주는 [[자연과학|과학]] 과목을 좋아해서, 장래 [[대학교]]에 진학하여 [[생물학]]을 공부한 후 아버지 [[쇼와 덴노]]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싶었다. [[구로다 사야코|현대라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적극 권장될 만한 일이지만,]] 당시의 [[공주]]로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대신 그녀는 어른들의 뜻에 따라 시집을 가야 했다. 1941년에 시게코 공주의 결혼이 정해졌는데, 신랑은 나가코 황후의 숙부이자 쇼와 덴노의 고모부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장남인 [[히가시쿠니 모리히로|모리히 왕]]이었다. 촌수로 따지자면 신랑은 시게코 공주에게 시게코 공주의 부계로도, 모계로도 오촌 종숙(從叔)[* 부모의 사촌 형제. 당숙(堂叔)이라고도 한다.]이 된다. 모리히로 왕 입장에서는 5촌 당조카.[* 쇼와 덴노& 고준 황후 부부 입장에서는 고모-고모부 혹은 숙부-숙모가 同 항렬인 사돈이 된 것이다.]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으로서는 2대에 걸친 내친왕[* 현재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內親王), 증손녀부터는 여왕(女王)이라 한다. [[남자]]는 친왕/왕. 단 1947년 [[황실전범]]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4대손까지를 친왕/내친왕이라 했고, 5대손부터 왕/여왕이라 했다.]과의 혼인이기도 했는데, 모리히로 왕의 어머니는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9녀인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내친왕이었기 때문이다. [[파일:attachment/히가시쿠니 시게코/toshiko.jpg]] ||시게코의 고모할머니이자 외종조모이자 [[시어머니]]인 히가시쿠니 도시코(1896.5.11 - 1978.3.5) 조카 겸 시조카의 딸이 며느리가 된 셈이다.|| 1943년 3월, 만 17세의 시게코 공주는 [[가쿠슈인|여자가쿠슈인]] 중등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등과에는 진학하지 않고 [[신부수업]]을 몇 개월 받은 후, 동년 10월에 모리히로 왕과 [[결혼식]]을 올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시절이라 [[공주]]의 결혼식이지만 간소하게 치러져, 시게코 공주는 어머니 나가코 황후가 입었던 [[쥬니히토에]]를 물려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http://blog.naver.com/winabago?Redirect=Log&logNo=10107883572&from=postView|하지만 이렇게 호화로운 혼수를 장만해 갔다.]] ===# 구황족 가계도 #=== [include(틀:일본 구황족 가계도)] == 화려한 혼수 == ||<-2> [[파일:external/charanhi.files.wordpress.com/6a00d41434e8e93c7f011015e74176860b.jpg|width=100%]] || || [[파일:shigeko2.jpg|width=100%]] || [[파일:shigeko3.jpg|width=100%]] || || [[파일:shigeko7.jpg|width=100%]] || [[파일:shigeko5.jpg|width=100%]] || || [[파일:shigeko8.jpg|width=100%]] || [[파일:shigeko9.jpg|width=100%]] || 시게코 공주가 [[혼수]]로 장만해 간 [[도자기]]들. 오오쿠라 도원(大倉陶園)이라는 도자기 회사에서, 36인분 683개의 도자기를 2년에 걸쳐 일일이 수작업으로 제작했다. 도자기마다 [[꽃]]무늬를 전부 다르게 그렸다고 한다. 가장자리의 붉은 꽃은 시게코 공주의 오시루시(お印)[*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인 [[매화나무|홍매화(紅梅花)]]이며, 테두리에는 [[금|금박]]을 입혔다. 도자기만도 이렇게 어마어마하니, 전체 [[혼수]]의 규모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개혼(開婚), 즉 맏이의 결혼이니 더욱 신경썼던 점도 있겠지만, 사실 당시가 일본 제국이 패망하고 황실 재산을 국가에 압류당하기 '''이전'''이라 가능했다. 이런 사치스러운 혼수를 마련한 사람은 형제자매 중 시게코가 유일하다고 한다. == 결혼 생활 == 시게코 공주는 어머니 나가코 황후를 많이 닮아, 시집갈 무렵 옷의 치수를 재었더니 나가코 황후의 결혼 당시 체형과 정확히 일치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결혼 당시 어떤 기분이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훗날 그녀는 "슬프기도 했고, 싫기도 했고, 행복하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정략결혼|당사자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어른들끼리 정한 혼사인데다가 맞선 한 번도 없이 결혼한, 전형적인 옛날식 혼인]]이었기 때문에 [[부부]]의 사이는 어려웠다. 다행히 남편 [[히가시쿠니 모리히로|모리히로 왕]]이 좋은 사람이라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부부 사이에 애정이 싹텄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훗날 시게코의 [[여동생]] 3명[* 사실 4명의 여동생이 태어났으나 첫째 여동생 [[사치코 공주|사치코]]는 생후 6개월만에 요절했다.]은, 역시 중매로 결혼하긴 했어도 형식적으로나마 결혼식 전에 [[맞선]]과 [[데이트]] 등 [[연애]]하듯 서로 알아가는 과정을 거쳤고, 어머니 나가코 황후도 이를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오히려, (막내 [[시마즈 타카코]]를 제외하고) 다들 맏언니 시게코보다 더욱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도쿄 대공습]]이 한창이던 [[1945년]] 3월, 시게코 비는 도쿄의 한 방공호에서 첫째 [[히가시쿠니 노부히코|노부히코 왕]]을 낳았다. 당시 군인이었던 남편 모리히로 왕은 군대의 일로 [[치바현]]에 가 있었고, 시게코 비는 조산부들에게 둘러싸여 첫 [[출산]]을 했다. 친정어머니 [[나가코 황후]]는 직접 찾아가는 대신 궁중의 [[시녀]]들과 간호부들을 보내어 모정을 나타냈다. 그 후로 장녀 [[다카기 후미코|후미코 여왕]], 차남 모토히로(基博)[* 초명은 히데히코(秀彦)로, 훗날 미부(壬生) 가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3남 나오히코(眞彦), 차녀 유코(優子)의 3남 2녀를 낳았다. 노부히코와 후미코는 출생 당시에는 왕/여왕이었으나, 불과 1~2년 후인 1947년의 [[황적이탈|신적강하]]로 황족의 지위를 잃었다. 모토히로·나오히코·유코는 신적강하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평민 신분이었다. 훗날 [[쇼와 덴노]]는 첫 [[손주]]인 노부히코의 결혼 문제에 대해 "양친이 계신 건전한 가정의 [[딸]]로, 노부히코 본인이 좋아하는 여성이면 된다."고 말했다. 노부히코는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평민 여성 시마다 요시코(島田吉子)와 결혼하여 유키히코(征彦)라는 외아들(1974년생, [age(1974-01-01)]세)을 낳았고, 2010년에는 손자([age(2010-01-01)]세)도 보았다. 하지만 모친 시게코의 유전자를 몰빵받았는지, 74세라는 요즘 세상에는 다소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신적강하 후의 삶 == [[파일:external/blogimg.goo.ne.jp/af17db1cad7591ddb488558c40dc6c5d.jpg|dw=600]] ||신적강하 후 첫째 [[히가시쿠니 노부히코|노부히코]], 둘째 [[다카기 후미코|후미코]]와 함께.|| 시게코는 같은 황족 신분이었던 [[히가시쿠니 모리히로|모리히로]]와 결혼했기 때문에 내친왕에서 왕비로 바뀌었을 뿐, 결혼 후에도 여전히 황족의 신분을 유지했다. 그러나 패전 후 1947년의 신적강하로,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은 황족의 신분을 잃고 평민으로 전락했다.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 외에도,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은 평민 신분으로 전락했다. 황족 군인이었던 히가시쿠니 모리히로는 평민 직장인이 되었다. [[공주]]이자 왕비였던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아이들을 직접 돌보고, 직접 장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저렴한 상점을 찾아다니고, 가계를 돕기 위해 [[부업]]을 하는 등, 보통의 [[주부]]들과 똑같은 고생을 했다. 그러나 시게코는 어린 시절 타의로 포기해야만 했던 향학열을 되살려, 통신교육[* 자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통신교육을 열심히 공부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을 공부하고 [[뉴트리아]]의 양식을 독학으로 성공시키기도 했다. 아버지 [[쇼와 덴노]] 역시 [[생물학]] 연구를 좋아했던 것을 보면, 부전여전인 듯. 남동생 [[아키히토]] 덴노와 그의 차남 [[후미히토|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딸 [[구로다 사야코]]도 [[생물학]]에 관심과 조예가 깊다. 1958년 1월 2일, 시게코는 [[일본방송협회|NHK]]의 <나의 비밀>이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에 깜짝 출연했다. 당시 궁중에 모여 있던 황족들은, 하던 놀이를 팽개치고서 TV에 집중했다고 한다. [[http://cgi2.nhk.or.jp/archives/sp/tv60bin/detail/index.cgi?das_id=D0009010058_00000|<나의 비밀>에 출연한 시게코. 1분 10초쯤부터 나온다.]] 1959년 4월, [[남동생]] [[아키히토]] 황태자가 황실의 오랜 전통을 깨고 평민[* 말이 평민이지 [[미치코 상황후]]의 친가인 쇼다(正田) 가문은 닛신(日淸) 제분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대 재벌가이며,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백작]]) 가문이다.] 여성인 [[미치코 상황후|쇼다 미치코]]와 연애결혼을 했다. 미치코 황태자비를 몹시 미워한 친정어머니 나가코 황후와 달리, 첫째 [[시누이]]인 시게코는 남동생 부부를 응원하는 메시지를 [[신문]]에 실었다. 또한 큰올케 미치코 황태자비를 친정 부모 및 형제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 병과 사망 == [[파일:attachment/히가시쿠니 시게코/michi1.jpg]] [[1964년]], 첫째 [[시누이]] 시게코의 3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미치코 황태자비. 당시 남편 아키히토 황태자, 시아버지 쇼와 덴노[* 나가코 황후가 장남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의 결혼을 반대할 때, [[쇼와 덴노]]는 "황실에도 새로운 신붓감이 필요하다"며 사실상 두 사람의 결혼을 찬성하며 큰며느리를 두둔했다. 미치코가 약 40여년 동안 지옥같은 시집살이를 겪었을 때도 미치코를 위로해주며 나가코 황후와 미치코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식들을 빼곤 황족들과 화족들 거의 전부에게 핍박당하고 견제받던 미치코 황태자비로서는, 일본 황실 내에서 유일하게나마 자신을 이해하고 지지해주던 시누이 시게코의 죽음이 안타깝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youtube(fqVK7BpxlNc)] ||시게코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 [[홍콩]], [[싱가포르]] 등으로 해외여행도 다녀왔다고 한다.]되었나 싶을 무렵인 [[1960년]], 시게코는 '''[[암]]'''에 걸렸다. [[수술]]을 시도했으나 이미 [[의학]]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말기 상태였다. [[천황]] 부부는 시게코를 [[궁내청]]병원으로 옮겨 거의 매일 문병했고, 나가코 황후는 [[희망고문|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느 황족으로부터 소개받은 주술사까지 불러왔으나]] 될 리가 없었다. [[1961년]] [[5월 7일]], 시게코는 친정아버지 쇼와 덴노의 [[환갑]]잔치에 참석했으나, 몸이 너무 쇠약해져 연회 내내 누워 있어야 했다. 이것이 최후의 외출로, 결국 시게코는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친정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7월 23일]] 세상을 떠났다(향년 만 35세).''' 시게코의 장례식은 [[아오야마]]에서 거행되었고, 시신은 화장되어 [[도쿄도]] [[분쿄구]]의 도시마가오카(豊島岡) 묘지에 안장되었다. 나가코 황후는 시게코의 무덤 곁에, 시게코의 공주 시절 오시루시인 [[매화나무|홍매화]]를 심었다.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는 큰 충격과 슬픔에 잠겼으나, 지난 해에 태어난 장손 나루히토 친왕을 위안삼아 이겨냈다고 한다.[* 나가코 황후를 비롯한 황족들과 화족들은, 시게코가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두고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며 말도 안 되는 [[미신]]적인 트집을 잡아 미치코 황태자비를 비난했다. ~~남한테 화풀이~~] 시게코가 죽은 후 [[히가시쿠니 모리히로|모리히로]]는 데라오 요시코(寺尾佳子)라는 여성과 [[재혼]]하여 아츠히코(厚彦)와 모리히코(盛彦)라는 두 아들을 더 낳았지만,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한지 약 6년만에 총 5남 2녀의 자녀를 두고 [[1969년]], 자신의 아버지이자 시게코의 시아버지인 나루히코보다 20년 일찍 사망하였다. 시게코의 사후 40년이 되는 [[2001년]] [[7월 23일]], [[남동생]] 부부인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가 시게코의 묘지에 참배했다. == 기타 == * [[아키히토]] 상황의 둘째 손녀[* 차남 [[후미히토]] 친왕의 차녀]인 [[카코 공주|아키시노노미야 카코 공주]]가 시게코를 닮았다고도 한다. * 아키히토 상황의 셋째 손녀[* 장남 [[나루히토]] 덴노의 무남독녀]인 [[아이코 공주|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의 결혼 상대 후보자로, [[히가시쿠니 모리히로|모리히로]]의 자손들이 거론되었다. (즉, 시게코의 자손들과 요시코의 자손들) 구황족 가문들 중에서 히가시쿠니 가문이 현 황실과 가장 가까운 친족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이코 공주]] 문서 참조. [[분류:일본의 내친왕]][[분류:구황족]][[분류:1925년 출생]][[분류:1961년 사망]][[분류:미나토구(도쿄) 출신 인물]][[분류:가쿠슈인 여자 고등과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