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48년 혁명]][[분류:1849년/사건사고]][[분류:헝가리의 역사]][[분류:오스트리아-헝가리 관계]][[분류:독립전쟁]] [목차] == 개요 == '''1848년 헝가리 혁명'''([[헝가리어]]: 1848–49-es polgári forradalom és szabadságharc; 1848~1849년의 시민혁명과 독립전쟁)은 [[1848년 혁명]]의 일부로, 독립 [[헝가리 왕국]]을 목표로 한 [[헝가리인]][* 특이하게도 나라를 되찾으려던 [[폴란드인]]과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통치하고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에 영향을 행사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서 [[이탈리아 통일]]을 열망하던 [[이탈리아인]]은 헝가리에 합류한 반면 헝가리 왕국의 주요 소수민족들, 특히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등은 [[합스부르크 가문]] 편을 들어 헝가리 혁명 진압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날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옐라치치 광장의 주인공 [[요시프 옐라치치]]와 [[슬로바키아어]]의 아버지 [[루도비트 슈투르]], [[트란실바니아]](에르데이) 출신의 루마니아인 법률가 [[아브람 이안쿠]] 등. 사실 대타협으로 주권을 획득한 헝가리가 신나게 소수민족 때려잡기에 나선 걸 보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있다.]의 봉기였다. == 상세 == [[1848년 혁명]]과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코슈트 러요시]] 등의 주도로 [[헝가리 왕국]]과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에르데이 대공국]]에서 일어나 오스트리아 제국군과 치열하게 싸웠다(마침 이탈리아에서도 전쟁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헌병을 자처하던 러시아가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보내어 뒤치기를 하자 전선이 붕괴되며 무너졌다. 이듬해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쇼프론|외덴부르크]], [[부다페스트|오펜]], [[브라티슬라바|프레스부르크]], [[코시체|카샤우]], [[오라데아|그로스바르다인]]의 5개 [[군구]]와 에르데이 대공국, [[보이보디나 공국]]으로 개편되어 모든 자치권을 상실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제국 내 다양한 민족을 강압적으로 통치한 결과가 무엇인지 절감하게 만드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67년 [[대타협]](Ausgleich)을 통해 헝가리 민족주의자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선포하였다. == 기타 == 오늘날 [[헝가리]]에서는 [[3월 15일]]을 1848년 헝가리 혁명 기념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으며 [[아라드|어러드]]에서 사형당한 13인의 혁명가를 '13인의 순교자(aradi vértanúk)'로 헝가리 전역에서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