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주요선거)] ||<-5> '''[[재보궐선거|{{{#FFFF00 대한민국 재보궐선거}}}]]''' || || [[1971년]] || ← || [[1977년]] || → || [[1989년]] || || [[1971년 재보궐선거]] || ← || '''1977년 재보궐선거''' || → || [[1989년 재보궐선거]] ||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공직선거법 규정에 따라 1977년중에 치러진 [[재보궐선거]]다. [[2000년]] [[2월]] 이전까지는 재보궐선거의 일정이 정례화 되지 않아 지역마다 선거일이 모두 달랐다.[* 그래서 위키백과나 나무위키 문서에 기재되지 않은 2000년 이전 재보선 결과도 상당하다. 지역별로 날짜가 전부 달라 목록을 만드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이전의 지역별 재보선 결과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중앙선관위 자료를 참고하길 바람. [[https://www.nec.go.kr/site/nec/ex/bbs/View.do?cbIdx=1129&bcIdx=14283|#]] ] 중선거구제 체제에서 치러진 유일한 선거로, 이후 재보궐선거가 다시 치러지기까지는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야 했다. == 6월 10일 == ||<-5><#ffffff><:> '''1977년 6월 재보궐선거/국회의원 선거 결과''' || ||<#808080><:> '''[[무소속|{{{#ffffff 무소속 }}}]]'''|| ||<:>'''2석''' || ||<:><-5>'''[[제9대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중구]]의 현역 의원이었던 [[민주공화당]] [[장기영(1916)|장기영]] 의원과 [[정일형]] 의원이 각각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과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따른 여파로 한 선거구에 동시에 의원직을 상실해 공석이 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 상황 속에서 [[민주공화당]]과 [[신민당(1967년)|신민당]] 등 주요 정당이 공천을 하지 않은 가운데 무소속 후보 16명 간의 대결로 치러진 보궐선거 결과, 미군정 시기 반공 검사로 이름을 날린 [[오제도]]와 정일형의 아들인 [[정대철]]이 각각 1, 2위로 당선되었다. 당선 후 [[정대철]]은 신민당에 입당했고, [[오제도]]는 [[민주공화당|공화당]]에 입당하려 했으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을 이유로 입당이 불허되었다. ||<-2><:>{{{#FFFFFF '''1977년 6월 재보궐선거 지역구'''}}}|| ||<-2><:>{{{#FFFFFF '''국회의원'''}}}|| ||<:>[[장기영(1916)|장기영]](민주공화당)[br][[정일형]] (신민당) || 1977년 4월 사망[br]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인한 공민권 제한 판결로 의원직 상실[br] || * 당선자 *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오제도]]·[[정대철]] (무소속) === 1977년 6월 재보궐선거 ([[종로구·중구]]) === ||<-4> {{{#ffffff {{{+1 '''종로구·중구'''}}}}}} || ||<-4> {{{#ffffff 종로구·중구 일원}}} || ||<|2>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 '''정당''' || '''득표율''' || '''비고''' || ||<|2> {{{#ffffff {{{+5 '''1'''}}}}}} || [[강근호]](姜根鎬) || 4,630 || 5위 || || [include(틀:무소속)] || 13.90% || 낙선 || ||<|2> {{{#ffffff {{{+5 '''2'''}}}}}} || 고명관(高明觀) || 947 || 14위 || || [include(틀:무소속)] || 0.58% || 낙선 || ||<|2> {{{#ffffff {{{+5 '''3'''}}}}}} || 김의종(金義宗) || 1,820 || 7위 || || [include(틀:무소속)] || 9.92% || 낙선 || ||<|2> {{{#ffffff {{{+5 '''4'''}}}}}} || [[김문원]](金文元) || 1,678 || 8위 || || [include(틀:무소속)] || 9.54% || 낙선 || ||<|2> --{{{#ffffff {{{+5 '''5'''}}}}}}-- || --권종우(權鍾佑)-- ||<|2><-2> 사퇴 || || --[include(틀:무소속)]-- || ||<|2> {{{#ffffff {{{+5 '''6'''}}}}}} || [[박인각(1916)|박인각]](朴仁珏) || 13,554 || 3위 || || [include(틀:무소속)] || 18.53% || 낙선 || ||<|2> {{{#ffffff {{{+5 '''7'''}}}}}} || [[박정훈(정치인)|박정훈]](朴正勳) || 5,967 || 4위 || || [include(틀:무소속)] || 15.60% || 낙선 || ||<|2> {{{#ffffff {{{+5 '''8'''}}}}}} || [[신인우]](申仁雨) || 1,494 || 9위 || || [include(틀:무소속)] || 8.62% || 낙선 || ||<|2> {{{#ffffff {{{+5 '''9'''}}}}}} || '''[[오제도]](吳制道)''' || '''37,650''' || '''1위''' || || [include(틀:무소속)] || '''35.59%''' || '''당선''' || ||<|2> {{{#ffffff {{{+5 '''10'''}}}}}} || 이연국(李演國) || 1,155 || 12위 || || [include(틀:무소속)] || 2.74% || 낙선 || ||<|2> {{{#ffffff {{{+5 '''11'''}}}}}} || '''[[정대철]](鄭大哲)''' || '''21,265''' || '''2위''' || || [include(틀:무소속)] || '''22.59%''' || '''당선''' || ||<|2> {{{#ffffff {{{+5 '''12'''}}}}}} || 정의철(鄭義綴) || 1,723 || 6위 || || [include(틀:무소속)] || 12.59% || 낙선 || ||<|2> {{{#ffffff {{{+5 '''13'''}}}}}} || 차경주(車京周) || 1,414 || 10위 || || [include(틀:무소속)] || 8.59% || 낙선 || ||<|2> {{{#ffffff {{{+5 '''14'''}}}}}} || 최재원(崔宰源) || 672 || 15위 || || [include(틀:무소속)] || 0.32% || 낙선 || ||<|2> {{{#ffffff {{{+5 '''15'''}}}}}} || 한상필(韓相弼) || 1,032 || 13위 || || [include(틀:무소속)] || 1.59% || 낙선 || ||<|2> {{{#ffffff {{{+5 '''16'''}}}}}} || 함순성(咸舜成) || 1,398 || 11위 || || [include(틀:무소속)] || 7.34% || 낙선 || ||<|3> '''계''' || '''선거인 수''' || 173,565 ||<|3> '''투표율'''[br]56.85% || || '''투표 수''' || 37,200 || || '''무효표 수''' || 2,256 || 선거결과 공안검사 출신인 [[오제도]]와 [[정일형]]의 장남인 [[정대철]]이 당선되었다. == 기타 == 선거 발생 사유가 무엇이든, 재보궐선거가 집권세력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이 있는 만큼 재보궐선거를 많이 치르는 것이 집권세력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 때 중선거구의 국회의원 두 명이 동시에 궐위되어야만 재보궐선거를 할 수 있게 만들었고, [[전두환]]도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헌법에서 이걸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 결과 1977년 재보궐선거가 중선거구제 18년 동안에 치른 유일한 재보궐선거가 되어버렸다. [[분류:재보궐선거]][[분류:1977년 선거]][[분류:박정희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