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3.1 운동]][[분류:선언]] [include(틀:3.1 운동)] [[파일:external/blogfiles5.naver.net/2222222222222.jpg]] [[1919년]] [[2월 8일]] [[일본 제국]] [[도쿄도]]에서 일어난 학생 운동 주역들의 모습. [목차] == 개요 == 二八獨立宣言 [[일본 제국]]에 유학하던 한국인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독립 선언식을 가진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국의 첫 독립 선언서인 [[대한독립선언서|무오 독립 선언서]]의 영향을 받았다. == 전개 == 일본에서 유학하던 [[윤치영]]은 [[윤치호]]의 친구이자 동경 [[YMCA]] 총무로 있던 미국인 [[잭 데이비스]]의 소개로 그의 비서인 라이언 부인에게 영어 회화 개인지도를 받는 도중 '포틴 포인트(fourteen point)'[* 윌슨의 14개 원칙], '셀프 디터미네이션(self-determination)'[* 민족자결]과 같은 생소한 단어부터 시작해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파리 강화 회의|파리 강화회의]] 참석이라든지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의 파리행 예정 기사 등을 듣게 되었다. 그는 [[사발통문]]을 통해 [[도쿄]]에 주재하던 다른 한인 유학생들에게 해당 소식을 전파하였다.[*a 尹致暎, 《尹致暎의 20世紀 : 東山回顧錄》, 1991, 三星出版社, p. 74-76] [[1918년]] [[11월 23일]] 한국으로 귀국하는 길에 [[일본]]을 방문한 [[윤치영]]의 중앙학교 동창인 [[여운홍]]은 도쿄 한인 유학생들을 만나서 미국 교포들의 독립자금 모금과 움직임, 국제 정세에 대해 상세한 소식을 전달해 주었다.[*a] 또 비슷한 시기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이광수(소설가)|이광수]]는 서울에서 [[현상윤]], [[최린]]과 독립 운동을 논의하게 되었고 그 해 11월 [[도쿄]]로 돌아와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최팔용]]과 조선인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독립 선언을 기획했다. 이후 재일 유학생들은 1918년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조선에도 적용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이광수는 2.8 독립 선언서를 [[한국어]]와 [[영어]]로 작성했고 최팔용은 이광수의 신변을 우려하여 도피할 것을 제안했다. 이광수는 선언문 작성 후 [[상하이시]]로 도피했다.[* 참고로 당시 이광수는 [[와세다대학]] 앞의 산쵸안(三朝庵)이라는 [[소바]]집 2층에서 독립 선언서를 작성했는데 이 소바집은 2018년 7월 31일 폐업했다. [[https://www.waseda.jp/inst/weekly/attention/2018/07/31/50365/|#]]] 2월 8일 당일 오전에는 각국 대사관과 일본 국회 의원, '''[[조선총독부]]''', 일본 여러 지역의 신문사에도 독립 선언문을 발송했다. 이날 오후 2시 재일본 동경 조선 [[YMCA]] 강당에는 조선 유학생 학우회 총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회의가 개최되고 나서 최팔용에 의해 "조선 청년 독립단"을 결성하려는 '긴급 동의'가 요청되었다. >'''2.8 독립 선언서 결의문''' > >1. 본단은 일한 합병이 오족의 자유 의사에 출치 아니하고 오족의 생존 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본단은 일본 의회 및 정부에 조선 민족 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오족의 운명을 결할 기회를 여하기를 요구함. >3. 본단은 만국 평화 회의에 민족 자결주의를 오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우 목적을 전달하기 위하여 일본에 주재한 각국 대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해 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함. >우 위원은 기히 파견된 오족의 위원과 일치 행동함. >4. 전제 항의 요구가 실패될 시에는 일본에 대하야 영원히 혈전을 선함. >차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오족이 기책을 임치 아니함. 이윽고 독립 선언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고 [[백관수]]가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자마자 대회장을 감시하던 [[일본제국 경찰]]이 들이닥쳐 60여명의 유학생을 체포하였고 강제 해산시켰다. 주모자였던 최팔용, 백관수를 비롯한 학생 8명이 기소되었다. 이후 2월 12일, 28일에도 조선인 유학생들은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 행진을 시도했다. 이 기간 동안 기소된 학생들을 변호한 사람이 바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다. == 의의 == 이후 이 사건은 한국에 전파되었고 독립 선언서는 밀반입 되어 [[3.1 운동]]의 큰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도 도쿄의 재일본한국[[YMCA]][* 한국과 일본 YMCA에 동시 가입되어 있는 특이한 지부]에는 2.8 독립 선언 기념 박물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