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남북회담]] / [[남북정상회담]] ||<-3><#FFFFFF> [[남북정상회담|{{{#black '''남북정상회담'''}}}]] || ||<#FFFFFF> [[2000년 남북정상회담|1차 2000년]] ||<#FFFFFF> [[2007년 남북정상회담|2차 2007년]] ||<#FFFFFF> [[2018년 남북정상회담|3차 2018년]] || ||<#000000> ([[김대중|{{{#ffffff 김대중}}}]]-[[김정일|{{{#ffffff 김정일}}}]]) ||<#000000> ([[노무현|{{{#ffffff 노무현}}}]]-[[김정일|{{{#ffffff 김정일}}}]]) ||<#000000> ([[문재인|{{{#ffffff 문재인}}}]]-[[김정은|{{{#ffffff 김정은}}}]]) || [[파일:external/image.asiatoday.co.kr/471298(1)-450320_10520.jpg]] '''한반도가 분단된 지 반 세기만에 이루어진 남북 정상간 만남''' [목차] == 개요 == 2000년 6월 13일에서 6월 15일까지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과 [[평양]]에서 진행한 회담. == 진행 == 2000년 4월 10일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 [[박지원(1942)|박지원]]이 남북정상회담의 예정을 발표했다.[*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4일 전인 4월 10일 발표되었다. 이는 수십년의 기득권 상실로 인해 분노하던 영남권에서 역풍을 초래해 영남권에서 여당이 참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여당의 과반수 확보미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원래 발표된 일정은 6월 12일부터 14일까지였지만, 북한측이 준비가 덜 되었다는 이유로 하루 연기를 통보하고 남측도 이걸 받아들이면서 6월 13일로 조정되었다. 추진위원장은 [[박재규]] 당시 [[통일부 장관]]이였으며, 외교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국무조정실장, 청와대 경제수석·외교안보비서관 등이 위원에 포함됐다. 준비기획단엔 통일부 차관(단장)과 각 정부부처 차관급 및 청와대 경호처장·의전비서관 등이 참여했다. 정상 회담 이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대한민국|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 민간 교류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남북 당국간 회담이 지속됐으며, 북한은 일본, 미국과도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며 [[국교]] 정상화 교섭에 나섰다. 김정일의 조기 [[서울]] 방문도 예견됐으나 국제정세의 급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1948년]]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로, 두 당국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난 회담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한관계]]사의 이정표로 남을 [[6.15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한반도 평화 조성과 [[햇볕정책]]의 결실과도 같은 이 회담은, 김 전 대통령의 생애 전반에 걸친 한국 민주화 운동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다. == [[6.15 남북 공동 선언]] == 자세한 내용은 [[6.15 남북 공동 선언]] 문서 참고. == 여담 == 전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우리 현대사에 손꼽히는 대사건이였지만 당일 [[조선일보]] 사설에서는 "양안관계에 관하여..."라는 글이 실렸다. 중국과 대만을 뜻하는 양안이라는 단어는 그때도 생긴지 얼마 안되 매우 생소한 단어였고 현재까지도 한국민들은 거의 관심 없는 주제이다. 조선일보 입장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 영 못마땅하니 신문 1면에 사진을 싣는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사설에 남북관련이 아닌 엉뚱한 내용을 싣은 것이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남북정상회담,version=237)] [[분류:대한민국의 역사]][[분류:국민의 정부]] [[분류:북한의 역사]][[분류: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