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hite '''삼십년식 총검[br]三十年式銃剣[br]^^さんじゅうねんしきじゅうけん^^'''}}}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bayo-hunter.com/Japanese1.jpg|width=500]]}}} || || '''종류''' ||[[총검]]|| || '''사용국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23]] '''[[일본 제국]]'''[br][[파일:연합군 점령하 일본 상선기.svg|width=23]] [[연합군 점령하 일본|전후 일본]][br][[파일:만주국 국기.svg|width=23]] [[만주국]][br][[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23]] [[대한민국]][br][[파일:북한 국기.svg|width=23]] [[북한]][br][[파일:중국 국기.svg|width=23]] [[중국]][br][[파일:대만 국기.svg|width=23]] [[대만|중화민국]]|| || '''사용된 전쟁''' ||[[제2차 세계 대전]][br]- [[중일전쟁]] / [[태평양 전쟁]][br][[국공내전]][br][[6.25 전쟁]]|| || '''생산''' ||[[코쿠라시|고쿠라]] 조병창[br]도쿄포병공창[br][[파나소닉|마쓰시타 금속]]|| || '''연도''' ||1897년~1945년|| || '''전장''' ||약 512mm|| || '''도신''' ||약 400mm|| || '''중량''' ||약 700g|| [목차] [clearfix] == 개요 == 三十年式銃剣 (さんじゅうねんしきじゅうけん) 삼십년식 총검 [[일본 육군]]이 [[1897년]](메이지 30년)에 채용하여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제식 [[총검]]으로 계속 쓰였던 칼이다. == 개발 및 운용 == 메이지 30년인 1897년 구식이 되어버린 [[무라타 소총]](村田銃)의 후계 화기로 등장한 [[30년식 소총]]이 채택되자 이와 함께 개발된 것을 시작으로 약 840만개가 제조되어 총검 생산량으로는 세계 최대량을 기록하고 있다. 원래는 적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의례용 성격이 짙었던 탓에 실용성이 떨어졌고 단조 처리도 거치지 않은 육군강(군납용 철)으로 단순히 제작하였다. 또한 도신에는 칼날이 없어 전투 직전에 숫돌에 날을 갈아두어야 하는 사전 작업이 필요했었다. 그리고 단조 처리가 안된 강이라 재질 자체가 물러 찌르기용으론 적합하지 않았고, 가늘고 긴 형상 때문에 구부러지거나 꺾이는 경우도 많은 것도 결점으로 지적되었다. 하지만 그다지 개량이 가해지지 않은채 종전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는데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야습시 칼날에 달빛이 반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신에 흑색 도료가 칠해지면서 [[우엉]] 칼(ゴボウ剣)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외견상 특징은 [[일본도]]를 모방한 한쪽에만 날이 있는 도신으로[* 다만 곡도인 [[일본도]]와는 달리 직도가 되고 있다는 차이는 있다.] 구미 열강들의 양날 총검들과는 문화적인 차이를 보인다. 도신에는 좌우 윗쪽에 혈장(血裝)이라 불리던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이 있다. 길이는 51.4cm로 지금 보면 상당히 길지만 개발 당시엔 그냥 평범한 길이의 총검이었다. 1940년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 이후 독일군의 영향을 받아 조직되어 [[태평양 전쟁]] 당시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활약했던 [[공수부대]][* [[일본 육군]]은 정진연대(挺進連隊), [[일본 해군]]은 공정부대(空挺部隊)라는 이름으로 따로 불렀다.]에게 지급하기 위해 길이를 약 20cm가까이 줄인(실제 길이는 32.3 cm) 2식 총검(二式銃剣)이 제작되어 지급되기도 하였으나, 총검을 사용하던 일본군의 공수부대가 워낙 소수에 불과했던 만큼 25000자루 가량의 소량만이 제작되었다. [[파일:2식 총검.jpg]] 2식 총검의 모습[[http://ohmura-study.net/813.html|출처]] 30년식 총검은 본래 고쿠라 조병창에서 생산되었는데, 일본제국의 세력팽창이 심해짐과 함께 총검의 수요량이 늘었던 [[쇼와 시대]]에 들어서는 나고야 공창, [[마쓰시타]] 금속, [[토요타]] 자동기기 등 민간업체에 위탁하여 생산되어 제조처에 따라 도신의 길이나 새겨지는 각인 등 여러가지 부분에서 크고작은 차이가 생기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채용되어 [[태평양 전쟁]] 이후까지 일본군의 보조병기로 쓰인 무기인만큼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데, 당장 [[3.1 운동]]하면 생각나는 일본군의 폭력 진압이 이 총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민족 말살 통치기]] 당시에는 곡식을 징발(공출)하던 일본군과 일본인 관료들이 착검을 한 소총이나 장대 끝에 총검을 달아 쌀이 숨겨져 있을법한 자루를 쑤셔보기도 했다. [[8.15 광복|일본이 항복하고]] 일본군이 철수한 후에는 철수하는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하거나 [[몰수]]한 물량을 [[조선국방경비대]]에 보급해 사용했고, [[미군정]]시기와 [[6.25 전쟁]]으로 신생 [[대한민국 국군]]에 대한 미군의 물자 공여가 이루어지면서 소총 자체가 미국제 [[M1 개런드]]나 [[M1 카빈]]으로 교체된 이후에는 2선급으로 돌려진 [[아리사카]]소총과 함께 [[대한민국 경찰청|경찰]]이나 [[대한청년단]], [[서북청년회]] 등 2선급 병력에서 사용되었다. [[파일:90식-3.jpg]] 30년식 총검을 허리에 차고 [[99식 소총]]으로 무장한 [[조선국방경비대]]대원. 쓰고 있는 [[방탄모]]는 1930년부터 일본군의 제식 방탄모로 쓰이던 [[90식 철모]]이며, 무릎앉아를 하고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대원들이 신고 있는 [[전투화]] 역시 [[일본 육군]]의 [[기병]]용 부츠이다. ~~별은 깨알같이 떼버렸다~~ 그외 [[제주 4.3 사건]] 당시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의 무장대, 또는 본토의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빨치산]]이 사용하기도 했다. == 여담 == [[난징 대학살]] 당시 학살에 가담한 일본군들이 중국인 아기를 붙잡아 '''하늘에 던진 다음 총검으로 받아 찍어내는 짓'''을 저질렀고 [[https://i.pinimg.com/474x/c3/00/bd/c300bdd24bd51ca946182f0493444daf--nanking-massacre-chinese-babies.jpg|그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다.(열람 주의)]] 임산부를 붙잡아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냈다는 증언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때 사용했던 총검도 이것일 것이다.[* 사진이 기록에 남았으므로 이들은 당연히 [[사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장제스]]가 일본군에게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고 집으로 보낸 건 맞지만 언제까지나 전쟁을 정상적으로 하거나, 강요당해 저지른 학살에나 해당되는 것이지 전범들은 애초에 논외였다.]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도요타상사 사건]]의 범인 이이다 아츠오와 야노 마사카즈가 이 30년식 총검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 가검 == 국내에서 구하기 정말 어려운 가검이 있다. 가검이라서 생산번호가 칼등에 없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러일전쟁/일본 보병장비)] [include(틀:2차 세계대전/일본 보병장비)] [include(틀:2차 세계대전/만주국 보병장비)] [include(틀:냉전/한국 보병장비)] [include(틀:6.25 전쟁/한국 보병장비)] [include(틀:보병장비 둘러보기)] [[분류:총검]][[분류:보병 무기/세계 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