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사건사고)] [include(틀:지진)] [include(틀:대한민국 주요 지진)] ||<-3> {{{#ffffff {{{+1 '''779년 경주 지진'''}}}}}} || ||<-3> [[파일:2016-12-01 16.10.05.png|width=313]] || || {{{#ffffff 발생일시[br]^^(UTC)^^}}} ||<-2> 779년 3월경 (혜공왕 15년) || || {{{#ffffff 진앙}}} ||<-2> 북위 35.8도, 동경 129.2도[br]경상북도 경주시 율동 선두1길[* 舊. 경상북도 경주시 율동 1931-173 부근] || || {{{#ffffff 진원의 깊이}}} ||<-2> 불명 || || [[리히터 규모|{{{#ffffff 규모[br]^^(추정)^^}}}]] ||<-2> M,,w,, '''6.3''' / M,,L,, '''6.7'''~{{{#a52a2a '''7.3'''}}} || ||<|2> {{{#ffffff 최대 진도[br]^^(메르칼리, 추정)^^}}} ||<-2><#632523> {{{#fff '''Ⅷ'''}}}[*NOAA 미국 지질조사국 추정진도] || ||<-2><#4c2600> {{{#fff '''Ⅸ'''}}}[*KMA 대한민국 기상청 추정진도] || ||<|3> {{{#ffffff 피해상황[br]^^(추정)^^}}} || 사망자 ||'''100명 이상'''|| || 부상자 ||불명|| || 재산피해 ||많은 가옥이 무너짐|| [목차] [clearfix] == 개요 == [[779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일어난 [[수도직하지진]]으로 한국의 역사지진(서기 2~1904년) 중에서, 세번째로 강력했던 지진이자 내륙에서 발생한 지진 중 가장 큰 규모의 지진, 추정규모는 Mw 6.3~[[리히터 규모|ML]] 6.7~7.0 급이다. 진앙지로 추정되는 위치는 북위 35.8도, 동경 129.2도인데, [[2016년 경주 지진]]의 진앙지와 매우 가깝다. 전진이 북위 35.76도, 동경 129.19도였고 본진 북위 35.77, 동경 129.18도였다. == 기록 == 때는 신라 중기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혜공왕]] 당시에 발생했다.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귀족들과 왕족들에게 휘둘려 다니던 혜공왕은 덩달아 터지던 각종 반란과 자연재해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재해가 바로 지진이었다. >혜공왕 3년(767) 여름 6월, 지진이 났다. >4년(768) 여름 6월, 지진이 났는데 그 소리가 벼락 소리 같았고 우물과 샘이 모두 말랐다. >6년(770) 겨울 11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13년(777) 봄 3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여름 4월, 지진이 다시 발생하였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06&categoryId=49615&cid=49615|《삼국사기》제9 권 신라본기 제9 혜공왕]]''' [[혜공왕]]의 선대인 [[경덕왕]]이 사망하던 765년 4월에도 지진이 발생했으므로, 765년부터 약 12년간 지진이 6번 발생하였다. 그 밖에 호랑이가 궁에 들어온다든지, [[황룡사]]로 큰 별이 떨어졌다든지 하는 각종 기이한 일들과 함께 지진이 굉장히 자주 일어났다. 정치적으로도 무척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777년 3월과 4월에 연이어 지진이 발생하자 [[상대등]]이었던 [[선덕왕|양상]](良相)이 왕에게 "정치를 올바로 하십시오!"라는 내용으로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그러다 혜공왕 15년(779)에 수도 경주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十五年 春三月 京都地震 壞民屋 死者百餘人 >15년 봄 3월, 경도(京都)[* 수도 [[경주시]]를 말한다.]에 지진이 있어 민옥(民屋)이 무너지고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 >---- >'''《삼국사기》 제9권 신라본기 제9 혜공왕''' 100여 명이 죽었다는 피해자 수까지 명시될 정도로 큰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참고로 이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지진기록 중, 몇 안되는 지진 피해 사상자 기록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등을 뒤져봐도 몇 개 되지 않으며, 이 지진 말고도 사상자 기록이 있는 지진으로는 [[1643년]] [[6월 9일]] 터진 진주 지진을 들 수 있는데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따지면, 사망자 2명이 발생했다.] 이 정도면 경주시에서만 진도 '''6강'''에 해당하는 진동이었음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혜공왕은 지진이 벌어진 달에 백좌법회[* 고승이 앉는 자리인 사자좌 100개를 준비하고, 이에 맞추어 [[고승]] 100명을 초대해 설법하는 대규모 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혼란에 빠진 시민들을 위해서였는지는 모른다. == 여담 == 이 지진이 [[수도직하지진]]임을 고려하면 피해가 꽤 적은 편에 속한다. 규모가 동일한 다른 수도직하지진들과 비교해보면 [[근대]] 오스만 제국 수도에서 발생한 '''1897년''' 이스탄불 지진은 사상자만 '''1,349명'''에 달했고 [[2010년 아이티 지진]]은 [[아이티|한 나라]]를 '''폐허'''로 만들고 {{{#7500eb '''30만 명'''}}}에 달하는 인명까지 앗아갔다. 779년 경주 지진은 '''중세 신라시대에 발생한 [[수도직하지진]]'''임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를 100여 명 정도로 억제한 건 명백한 [[혜공왕]]의 업적이고, 당대 [[신라]]는 이러한 재해에 대처하는 능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 관련 문서 == ||<-5>
{{{#ffffff '''별도의 문서가 존재하는 한반도 지진''' }}} || || [[304년 경주 지진]] || {{{+1 → }}} || '''779년 경주 지진''' || {{{+1 → }}} || [[1036년 경주 지진]] || [include(틀:지진/19세기 이전)] [[분류:지진/대한민국]][[분류:8세기]][[분류:통일신라]][[분류:18세기 이전 지진]][[분류:경주시의 사건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