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9주 5소경)] [include(틀:한국 행정구역의 시대별 변천사)]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9주 5소경.jpg|width=100%]]}}}|| [목차] [clearfix] == 개요 == [[통일신라]]의 지방 행정구역 체계. [[신라]]가 [[삼국통일|삼국 통일]]을 달성한 이후, 중앙 집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시행한 지방 행정구역이다. == 상세 == 9주는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으로, 그 이전 시대에도 유사한 행정 구역 체계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삼국이 통일되기 이전, 신라의 영토가 현재의 [[경상도]] 일대에 머물러 있던 [[지증왕]] 대인 514년, 지금의 [[의성군]] 안계면에 '아시촌 소경'을 설치하고, [[진흥왕]] 대인 557년에는 청주 일대의 중원 지역을 확보하고 [[충주시]]에 '국원 소경'을 설치한 기록이 있다. 이 중 충주는 통일신라대에도 중원 소경으로 이어진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지역을 병합하고, [[나당전쟁]]을 통해 [[당나라]]의 잔여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한 이후, [[신문왕]] 5년인 685년, 전국의 행정 구역을 9주·5소경으로 재조직하여 편성하였다. 9주는 고대 [[중국]]의 행정구역인 [[구주]](九州)에 맞춘 것이고, 5소경은 [[오행]]에 맞췄을 가능성이 크다. 9주는 옛 [[신라]] 본국 영토 및 [[가야]] 지역에 3개, 구 [[백제]] 지역에 3개, 구 [[고구려]] 지역([[진흥왕]]의 6세기 한강 유역 정복 이전 기준)에 3개가 설치 되었는데, 이는 삼국 통일 이후 정복민들의 지배와 통합을 강조한 정치적 배려쯤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9주의 배치에서 통일신라가 한정된 강역 내에서 삼한일통 의식을 규합하려는 양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임진강 이북의 개성과 황해도를 제외하면 삼국시대 내 고구려의 일방적인 영역으로 규정하기 어려운건 사실이고 오히려 한강 유역 기준으로는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보다 훨씬 오래 그 일대를 관할했다. 660년 백제의 멸망 시점에서 서울은 과거 400여년간 마한/백제의 소속이었고 지난 107년간(553~660) 신라의 영역이었으며 고구려의 지배 기간은 한 세기가 못되는 76년(475~551)에 불과하다. 완전히 신라, 백제의 전통적인 내지였던 나머지 6주와 달리 한주, 명주, 삭주의 3주는 그나마 고구려와 연결할 건더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 지방을 구 고구려령으로 파악한 것이다. 전통적인 고구려 내지 가운데 통일신라가 확보한 지역은 임진강 이북의 [[패강진]]밖에 없었는데 이마저도 개척이 늦고 이남의 9주와 같이 강력한 통치질서를 관철하지 못했다. 수도 [[서라벌]]은 9주 중 [[삽량주|양주]]에 둘러싸여 있지만 일단 양주 행정구역에 포함되지는 않았는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도 9주를 소개하기 전 맨 앞에 따로 경주를 소개하고 있다. 수도 주변 동서남북을 둘러싸고 있는 의창군, 임관군, 대성군, 상성군 등은 양주에 속한 행정구역으로 나온다. 양주의 치소(현대의 도청소재지 격)가 양주([[양산시]])인데 수도가 양주 소속이면 양산시 관할이란 말인데 당연히 기록상으로도 양주 도독이 수도를 관할하는 그런 정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면적이 넓지 않아서인지 현대에 나오는 신라 9주 5소경 지도에서는 그냥 양주 북쪽에 도시라는 점 하나 찍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아래는 각 주의 핵심 지역을 기준으로 정리 한 것. 지금 해당 지역들의 관할 구역은 크게 축소되었다. 이런 각 주의 중심지역이 축소된 건 중국도 비슷하다. 전통적인 광역 행정구역이었던 [[주(행정구역)|주]](州)가 면적이 축소되면서 [[당(통일왕조)|당나라]] 때 [[도(행정구역)|도]](道)를 최상위의 행정구역으로 설치하게 된다. 하지만 같은 시기 신라에서는 전통적인 주만 설치하고 도를 도입하진 않았다. 한반도에 도가 도입되고 주가 그보다 좁은 지역을 가리키는 행정구역으로 변모하게 된 건 당나라가 망한 지 한참 지난 [[고려]] [[성종(고려)|성종]] 시기의 일이다. ||<#ffffff> '''9주''' ||<#ffffff> '''군의 수''' ||<#ffffff> '''현의 수''' ||<#ffffff> '''현재의 지명''' ||<#ffffff> '''5소경'''[br](현재 지명) || ||신주(新州)→한산주(漢山州)→[[한주]](漢州)||27||46||[[경기도]] [[광주시]]||중원경(中原京)[br]([[충청북도]] [[충주시]]) || ||[[신사우동#s-3.3|우수주]](牛首州)→수약주(首若州)→[[삭주]](朔州)||11||27||[[강원도]] [[춘천시]]||북원경(北原京)[br](강원도 [[원주시]]) || ||하슬라주(何瑟羅州)→하서주(河西州)→[[명주]](溟州)||9||25||강원도 [[강릉시]]|| || ||웅천주(熊川州)→[[웅주]](熊州)||13||29||[[충청남도]] [[공주시]]||서원경(西原京)[br](충청북도 [[청주시]]) || ||완산주(完山州)→[[전주]](全州)||10||31||[[전라북도]] [[전주시]]||남원경(南原京)[br](전라북도 [[남원시]]) || ||무진주(武珍州)→[[무주]](武州)||14||44||[[광주광역시]]|| || ||사벌주(沙伐州)→[[상주]](尙州)||10||30||[[경상북도]] [[상주시]]|| || ||거타주(居拖州)→청주(菁州)→[[강주]](康州)||11||27||[[경상남도]] [[진주시]]|| || ||삽량주(歃良州)→[[삽량주|양주]](良州)||12||34||[[경상남도]] [[양산시]]||금관경(金官京)[br](경상남도 [[김해시]]) || === 9주 === [[주(행정구역)|주]]는 현재 [[대한민국]]과 [[고려]], [[조선]]의 [[도(행정구역)|도]]와 비슷한 위상의 행정 구역이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기준으로 9개 주의 이름은 각각, [[상주]](尙州), [[삽량주|양주]](良州), [[강주]](康州), [[한주]](漢州), [[춘천시|삭주]](朔州), [[명주]](溟州),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이다. 9주 밑에는 군·현을 두었으며, 주에는 총관(나중에 도독으로 개칭.), 군에는 군수, 현에는 현령 등의 지방관을 파견했다. 군현의 아래에는 촌을 두었는데, 지방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그밖에 특수 행정 단위인 [[향]]·[[부곡]]도 산하에 있었다. 향소부곡은 [[고려]]의 행정구역이라고 주로 알려져 있지만 [[http://db.history.go.kr/id/sg_034r_0020_0210|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잡다한 언급을 생략했을 뿐이지]] 신라 때부터 존재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신장조에서도 신라에서 전정과 호구 미달로 [[현(행정구역)|현]]이 될 수 없는 곳을 향이나 부곡으로 해 상위 행정구역에 소속시켰다고 되어있다. 예를 들어 지금의 [[경남]]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는 신라 때 천산부곡(穿山部曲)이었는데 고려 때 수산현으로 바꾸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B001A_0270_010_0020_2000_003_XML|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많았던 [[고려]]와 달리 통일신라기에는 모든 지방 행정단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2002, p. 83). 고려에 속현이 있는 이유가 신라가 쇠퇴하고 이를 고려가 재통일하는 과정에서 지방세력이 강화되었기 때문. 또한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외사정을 파견하였으며, 지방 토착 세력의 견제를 목적으로 '''상수리 제도'''를 실시했다. 지방 귀족 혹은 유력한 토착 세력의 자제를 수도 서라벌에 인질(볼모)로 잡아두는 제도. 후대 [[고려]]시대의 기인제도나 [[일본]] [[에도시대]]의 [[참근교대]] 제도와 유사하다. 군단격 편제인 '''정'''을 각 주마다 하나씩 배치했으나, 면적이 넓고 국경 지방인 한주에는 2정을 배치했다. 이것이 10정(停)이다. 또한 만보당(萬步幢)을 각 주마다 2부대씩 배치했으며, 이들이 신라 지방군 편제의 핵심이 되었다. 특이한 점은 현대의 [[부대마크]]처럼, 부대별로 옷깃(衿) 색깔을 다르게 해서 구분했다는 점이다. ||<#ffffff> '''주둔한 주''' ||<#ffffff> '''10정 부대명''' ||<#ffffff> '''옷깃 상징색상''' ||<#ffffff> '''부대 주둔지의 현재 지명''' ||<#ffffff> '''만보당 부대의 상징색''' || ||[[한주]]||남천정(南川停)||-||[[경기도]] [[이천시]]||황흑·황록(黃黑黃綠)|| ||한주||골내근정(骨乃斤停)||황색(黃)||[[경기도]] [[여주시]]||황흑·황록(黃黑黃綠)|| ||[[삭주]]||벌력천정(伐力川停)||-||[[강원도]] [[홍천군]]||흑록·흑백(黑綠黑白)|| ||[[명주]]||이화혜정(伊火兮停)||녹색(綠)||[[경상북도]] [[청송군]]||청흑·청적(靑黑靑赤)|| ||[[웅주]]||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충청남도]] [[청양군]]||황자·황청(黃紫黃靑)|| ||[[전주]]||거사물정(居斯勿停)||청색(靑)||[[전라북도]] [[임실군]]||-|| ||[[무주]]||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흑색(黑)||[[전라남도]] [[나주시]]||백적·백황(白赤白黃)|| ||[[상주]]||음리화정(音里火停)||-||[[경상북도]] [[상주시]]||청황·청자(靑黃靑紫)|| ||[[강주]]||소삼정(召參停)||-||[[경상남도]] [[함안군]]||적황·적록(赤黃赤綠)|| ||[[삽량주|양주]]||삼량화정(三良火停)||-||[[대구광역시]] [[달성군]]||적청·적백(赤靑赤白)|| 보통 9주를 표시한 지도에서는 생략하지만 한산주와 별개로 [[패강진]](浿江鎭)이라는 9주 중 어느 주에도 소속되지 않은 특별 행정구역을 설치하기도 했는데 현재의 [[미수복 경기도]] 및 [[황해도]]의 영역과 거의 일치한다. 위 지도를 보면 한주가 매우 크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신라가 구 고구려 유민 집단인 패서 호족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주의 주치소는 한강변에 있고, 5소경 중 중원경은 신라 본토에 바싹 붙어 있다. 현 남한 경기도 영역인 [[임진강]] 이남의 한주까지는 신라가 강력한 직접 통치 질서를 관철했지만 임진강 이북은 [[패강진]]으로 분리해 간접 통치에 머물렀다. 이러한 중앙 권력의 공백에서 패서 호족이 성장하여 태봉과 고려 건국의 중심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주와 패강진의 경계는 현 휴전선과 거의 일치하는데 이는 임진강이 예로부터 자연경계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4세기 고구려와 백제 및 6~7세기 신라와 고구려의 대치도 이 지역에서 이루어졌고 [[나당전쟁]], [[임진왜란]], [[한국전쟁]]에서도 주요 전장이었다. 남북국시대 버전 판문점인 탄항관문도 현 원산시 일대에 존재했고, 현재 남북한의 대치선이기도 하다. 삼국시대나 후기신라시대 집터가 풍납동, 천호동, 벽제 같은 곳에 있는 이유도 한강이 범람 안 하는 곳이기 때문. 또한 삼국 통일 후 백 년 이상에 걸친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지금의 황해도~경기 북부 지역에 계속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키면서 개척에 노력했던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 5소경 === 小京. 말 그대로 작은 [[수도(행정구역)|수도]]로서,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의 기능을 분담하기 위해 전국의 대도시에 설치한 행정 구역이다. [[서라벌]]이 한반도의 동남부에 치우쳐 있는 까닭으로 지역적 편중을 다소 보완하기 위해 '소경'이라 불리는 특수한 행정 구역을 경주로부터 부채꼴 모양으로 설치했다. 옛 [[가야]] [[금관국]]의 본거지에 하나, [[백제]], [[고구려]]의 옛 땅에 각각 둘씩 모두 다섯 개의 소경을 두었다. 아래 외에 아시촌소경([[지증왕]]대, [[의성군]] 안계면)과 하슬라소경([[선덕여왕]]대, [[강릉시]])이 있었는데 세월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 국원소경→중원경(中原京: [[충주시|충주]]): 옛 고구려의 국원성(진흥왕) * 금관소경→금관경(金官京: [[김해시|김해]]): 옛 가야 금관국(문무왕) * 북원소경→북원경(北原京: [[원주시|원주]]): 옛 고구려의 평원군(문무왕) * 남원소경→남원경(南原京: [[남원시|남원]]): 옛 백제의 고룡군(신문왕) * 서원소경→[[서원경]](西原京: [[청주시|청주]]): 옛 백제의 상당현(신문왕) 이곳에는 부유한 중앙 귀족을 정착시켜 정복지를 안정시키고, 토착 지방 세력을 견제하게 하였으며, 신라 중앙정부의 문화와 정책을 정복지에 확산시키기 위한 첨병 역할을 하였던 행정 구역이었다. 소경의 특기할 점은, [[대한민국]]의 [[광역시]]와 달리 상위 행정 기관인 '주(州)'로 부터 독립된 행정 기관이 아니었으며, 주 도독의 지시와 통제를 받는 하위 편제 단위였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으로 비유한다면 광역시보다는 [[특례시]]에 좀 더 가깝다. 소경은 [[사신]](仕臣) 혹은 사대등이라는 장관이 중앙에서 파견되어 다스렸는데, 사신의 관등은 최대 [[파진찬]]으로, [[이찬]]급까지도 올라가는 주 도독보다는 약간 낮은 관등의 인물이 맡았다. 장관급 인사이므로 당연히 사신으로 임명된 사람들은 모두 진골이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대한민국 관련 문서)] [[분류:통일신라]] [[분류:한국의 옛 행정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