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ㅅ계 합용병서 (r1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옛한글 자모)] [목차] == 개요 == ㅅ계 합용병서란 ㅅ과 ㅅ 외의 다른 자음이 결합한(병서) 자음자 쌍을 말한다. 대개 후행하는 자음은 [[파열음]]이나 [[파찰음]]이다. == 음가 == === [[중세 한국어]]에서의 음가 === 중세국어에 쓰이던 초성의 합용병서에는 ㅅ계, [[ㅂ계 합용병서|ㅂ계]], ㅄ계가 있었는데, 이 중 ㅂ계와 ㅄ계는 17세기 이후 ㅅ계 합용병서로 합류하여 된소리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다. 특이하게도 《[[훈민정음]]》에서는 ㅺ, ㅼ, ㅽ 등이 나타나며 ㅾ는 나타나지 않는다. ㅅ계 합용병서의 15~16세기 음가에 대해서는 자음군설과 경음설이 대립하고 있다. 자음군설은 병서된 자음들이 각각 발음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이고, 경음설은 ㅅ뒤에 표기된 자음의 된소리로 발음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이다. 혹은 중세에는 ㅅ계 합용병서에 대하여 [[된소리]]를 표기하는 경우와 어두자음군을 표기하는 경우가 혼재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 어두자음군설 ==== 자음군설의 근거로는 다음이 있다. 1. 15세기에 ㅅ계 합용병서였던 단어들 중 [[한글 전 한국어 표기]]에서 어두의 ㅅ 음가가 문증되는 사례가 있다. * '[[뿔]]'의 [[중세 국어]] 형태는 'ᄲᅳᆯ'인데, 이는 [[신라]]의 관직 [[이벌찬|각간]](角干)의 이표기 서불한(舒弗邯)과 연결된다.[* 이 각간은 중국 기록인 《[[양서(역사책)|양서]]》에서는 자분한지(子賁旱支)로, 일본 기록인 《[[일본서기]]》에서는 조부리지간(助富利智干)으로 기록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서불'의 ㅅ은 본래 ㅈ이었다가 약화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서발'이 뿔이 아니라 소벌(蘇伐), [[서라벌]] 등과 같이 단순히 [[서울]]이라는 표기를 뜻한다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해당 설이 사실이라면 '서발한'은 '서울의 지도자', '수장'을 뜻하는 호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의 한성부윤, 오늘날의 서울시장과 비슷한 위치. 그러나 '각간(角干)'이라는 이표기부터가 '''뿔+간'''이라는 구조를 드러내고 있으므로 이 주장은 신빙성이 그리 높다고 할 수 없다. 설령 '서발한'의 실제 의미가 서울의 지도자였다고 할지라도, '서발'에 해당하는 당시 음가를 표기하기 위해 [[角]]의 훈 '뿔'을 [[훈차|빌린 것]]만큼은 확실하므로 뿔의 고어형은 여전히 '서발'로 재구할 수 있다.] * 《[[일본서기]]》에서는 '[[띠]]'의 중세 국어 'ᄯᅴ'에 해당하는 [[고대 국어]] 어휘를 시토로(シトロ)라고 기록하고 있다.[* [[겐조 덴노]] 3년(487년)조에서 등장하는 백제의 지명 대산성(帶山城)에 '시토로모로노사시(シトロモロノサシ)'라는 훈을 달았다. 일본식 속격 조사 노(ノ)를 제외하고 분석하면 '모로(モロ)'는 [[용비어천가]]에서 문증되는 '뫼[山\]'의 고어형 '모로'와 일치하며, '사시(サシ)'는 일본서기의 다른 기록에서도 성(城)과 대응될 뿐더러 신라 [[향가]] [[혜성가]]의 '*자시(城叱)' 및 [[중세 한국어]]로 성을 뜻하는 '잣'과 일치한다. 따라서 한자 띠 대(帶)에 대응되는 단어는 남은 부분인 '시토로(シトロ)'가 된다.] * '꼴(가축에게 먹이는 건초)'의 중세 국어 형태는 'ᄭᅩᆯ'인데, 이는 《[[계림유사]]》의 질고(質姑)와 연결된다.[* 당시 [[중고한어|중국어]]에는 ㄹ로 끝나는 한자음이 없었으며 질(質)의 말음은 [t\]였으므로 실제 발음은 '지골'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ㅈ이 ㅅ으로 약화되고 모음 탈락이 이루어진 것이다. [[제주 방언]]에는 ㅈ 대신 ㄱ이 ㅎ으로 약화된 뒤 ㅈ과 결합해 거센소리 ㅊ이 된 것으로 보이는 '촐'이라는 어형이 남아 있어 이 설을 뒷받침한다. 실제로 같은 과정을 거쳐 ㅺ과 ㅊ이 공존하게 된 경우는 여럿 있는데, 대표적으로 '[[도끼]]'의 중세 국어 어형으로 '돗귀'와 '도최'가 있으며 '[[꼬리]]'의 어형으로는 'ᄭᅩ리'와 '초리'가 있었다.] 1. [[방언]]에 ㅅ발음의 흔적이 남아있다. 예) [[서북 방언|평북 방언]] '시더구' - '떡'[* 신성한 의식이나 제사에 쓰이는 특별한 떡을 의미하는 일본 고어인 시토기(しとぎ)와도 유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일본에서 쓰이는 일반적인 떡을 가리키는 표현은 '모치(もち)'이다.], [[제주 방언]] '시동' - '똥', '시꾸다' - '꾸다' 등. 1. [[불경]] 범어 표현에서 [[산스크리트어]] 어두자음군을 ㅅ계 합용병서로 대역했다. 1. '사나이'의 고어 'ᄮᅡᄒᆡ'의 ㅻ형은 ㅅ이 [s] 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파악할 수밖에 없다. 1. 고려사지사[* 'ᄭᅮᆯ'을 'スコル(sukuru)'로, 'ᄭᅯᆼ'을 'スコク(sukoku)'로, 'ᄭᅩᆯ'을 'スコル(sukoru)'로, 'ᄯᆞᆯ'을 'スタリ(sutari)'로, 'ᄯᅴ'를 'ステイ(sutei)'로, 'ᄯᅩᆼ'을 'ストン(suton)'으로, 'ᄯᅩ'를 'スト(suto)'로, '아니ᄭᅩ블가'를 'アニスコブルカ(anisukoburuka)'로 전사하였다.], 조선물어, 왜한삼재도회(이상 [[일본어]]), 북부 및 동부 아시아 지리지([[네덜란드어]])[* 네덜란드의 니콜라스 비첸(Nicolaas Witsen)이 1692년 발간한 서적으로, 1668년까지 [[헨드릭 하멜]]과 함께 조선에 억류되어 있던 선원 마테우스 에보켄(Mattheus Eibokken)의 증언을 인용해 조선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정보를 수록했다. 이 책에서는 뺨을 Spaem, 떡을 Stock으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하멜 일행이 체류하던 전라도 지역의 방언으로 보인다.] 등 한국어 어휘가 수록되어 있는 외국 책들을 살펴 보면 s에 해당하는 소리가 어떤 식으로든 전사되어 있다. 1.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설명하는 ㅂ계와 ㅅ계 합용병서의 특징에 차이점이 없다. 만약 ㅂ계는 어두자음군, ㅅ계는 된소리 표기였다면 훈민정음 해례본에 표음주의적이지 못한 ㅅ계 합용병서의 발음법을 알려주는, 즉 ㅂ계와는 차별화되는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따른 된소리 설 측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1. 다수의 ㅅ계 합용병서 어휘 중에서 몇몇 사례의 방언에서만 ㅅ음을 확인하는 것은 이례적인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1. 외국어 자료의 특수 표기일 뿐이며, 오히려 모음 조화에 따라 기본 모음인 'ㆍ/ㅡ'를 삽입하여 표기한 경우도 있다. (svaha → ᄉᆞᄫᅡ하 → 사바하) 1. 외국 문헌에서 s에 해당하는 소리가 전사되어 있는 것은 실제 발음과는 다르지만 [[훈민정음]]의 합용병서 표기를 반영한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대체로 표기 자체의 오류를 지적하기보다 '이례적인 예외에 불과하다'라는 것이 주된 의견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자료의 분량이 '이례적'이라 할 만큼 월등히 적은지에 대해서는 재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경음설(된소리설) ==== 된소리설의 근거로는 다음이 있다. 두 가지 모두 15세기에 출현하는 ㅅ계 합용병서에 대하여 논하고 있음에 유의. 조선 중후기의 ㅅ계 합용병서는 이미 된소리로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므로, ㅂ계 합용병서든 평음이든 된소리로 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ㅂ계 합용병서]]의 대부분은 된소리의 단계를 거쳐 조선 중후기에는 표기상으로는 ㅅ계 합용병서로 등장하는 일이 많다.(ᄠᅳᆮ → ᄯᅳᆮ) 1. '[[딸]]'은 《[[계림유사]]》에서 寶妲로 나오는 것으로 볼 때([[https://zh.wikisource.org/wiki/%E9%9B%9E%E6%9E%97%E9%A1%9E%E4%BA%8B|#]]) 寶라는 글자로부터 ㅂ으로 시작하는 2음절 어휘였거나 ㅳ계 어두자음군 어휘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훈민정음 창제 시기에는 ㅅ계 합용병서 'ᄯᆞᆯ'으로 변화하였다. ㅅ계 합용병서에서 ㅅ음이 발음이 되었다면 '딸'이라는 어휘의 첫 초성은 ㅂ음에서 ㅅ음으로 변한 것인데, 이러한 변화는 설명하기 어렵다. 1. 끌다, 찧다는 원래 초성이 예사소리였다가 (ㅅ계 합용병서가 어두자음군일지도 모를 15세기에도) ㅅ계 합용병서형이 등장하게 되는데 ㅅ계 합용병서에서 ㅅ음이 발음된다면 왜 갑자기 어휘 앞에 ㅅ음을 덧내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따른 어두자음군 설 측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1. ㅅ계 합용병서가 단순히 된소리 표기법이라면 중세국어 표기에서 두번째 음절 초성의 ㅅ계 합용병서 ㅅ이 첫번째 음절의 종성으로 이동하는 표기법을 이해하기 어렵다. 훈민정음 시기 종성 ㅅ은 마찰음 [s]로, 실제로 발음되는 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절충하는 설명으로 영어에서 [s] 음 뒤의 [k], [p], [t] 음이 무기음이 되는 것처럼 종성 마찰음 [s] 뒤의 장애음이 경음화되는 현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성규(2009), "중세국어 음운론의 쟁점", '국어사학회' 9, 41-68.] 또한, 훈민정음 창제 시기에도 ᄣᅢ와 ᄠᅢ를 혼동하는 등의 현상이 존재했는데 이를 근거로 '딸'이 본래 'ᄣᆞᆯ'였다 재구하면 계림유사에서의 '딸'의 표기에서 중세국어의 '딸'로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1. 또한 [[계림유사]]의 '寶妲(보달)'은 '實妲(실달)'을 잘못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현전하는 [[계림유사]] 판본은 [[오탈자]]가 만연하기 때문에 이 사례 또한 같은 경우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이 사실일 경우, '딸"은 원래부터 ㅅ으로 시작하는 2음절 어휘였거나 ㅼ으로 시작하는 어두자음군 어휘였을 것이다. 실제로 계림유사에서 '寶(보)'는 이 부분 빼고는 전혀 나오지 않으나 '實(실)'은 여러 번 등장한다.[* 또 다른 근거로, 계림유사에서 중세 국어 '[[쌀|ᄡᆞᆯ]]'에 해당하는 어휘는 菩薩(보살)로 표기했으며, 이를 통해 '딸'이 ㅂ 음가로 시작했었더라면 계림유사에서 한자로 옮길 때 菩(보)로 옮겼을 것이고 굳이 寶(보)로 옮기진 않았으리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보살]]이라는 표기에 이끌린 것일 수도 있으나, 薩(살)은 다른 위치에서도 등장한다. 또는 'ᄢᅳᆷ'과 '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냥 같은 뜻을 가진 두 가지 어휘일 수도 있다.] 1. 끌다, 찧다 모두 예사소리와 ㅅ계 합용병서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15세기 당시는 어두자음군이 존재했을 막바지 시절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 === 근대 한국어와 그 이후 === 이러한 의견 대립은 15~16세기 음가에 국한되고 있으며, [[근대 한국어]] 시기에는 된소리로 발음되었다. 어두자음군은 늦어도 근대 한국어 전에 모두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ㅅ계 합용병서가 된소리를 표기하는 데 주로 쓰이고, 오늘날 된소리를 표기하는 데 쓰이는 각자병서는 도리어 잘 쓰이지 않았다.[* 조선 초기 당시 한자의 발음을 정리, 명시한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동국정운]](東國正韻)에서 각자병서가 한자의 전탁음(유성음)을 표기하는 데 쓰였다.] 왜 'ㅅ'이 된소리 표기에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직관적으로 와닿지는 않으나, [[사이시옷]]에서도 보듯 'ㅅ'이 오랜 세월 동안 선행음절의 [[불파음|폐쇄]]를 표기하는 용도로 쓰인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 현상은 16세기를 지나 음절말 [s\]이 소멸하고 음절말 [t\]로 통합된 뒤(음절말 'ㅅ'과 음절말 'ㄷ'이 같은 소리를 나타내게 됨) 음절말 [t\]의 표기로 'ㄷ'이 아닌 'ㅅ'를 사용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타났다. 음절말 [t\]의 'ㅅ' 표기는 17~18세기 경 [[일본어]] 역학서 류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어째서 'ㄷ'이 아닌 'ㅅ'을 주된 표기로 사용하게 됐는지 이유는 알기 어렵다.] 초성에서의 [s]가 아니라 종성의 [t]를 표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잇따르는 자음이 된소리가 되는 것도 자연스럽다.[* 20세기 초 [[지석영]]은 "원래 'ㄸ'처럼 각자병서를 써야 하는데 [[〃]] 같이 한자에서도 자주 쓰는 [[반복 부호]]를 'ㅅ' 비슷하게 쓴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근대에 박승빈은 이 때문에 도리어 각자병서보다는 ㅅ계 합용병서를 쓰는 것이 음운론적으로 자연스럽다고 하였다. ㅅ계 합용병서를 쓰면 '냇가' 같은 [[사이시옷]] 표기의 발음을 적을 때 [내ᄭᅡ]가 되는데, 표기상으로 선행음절 종성 'ㅅ'이 초성으로 옮겨간 것처럼 보여 자연스럽다. 다만 ㅎ이 이와 유사하게 [[거센소리]]화 역할을 한다고 해도 거센소리가 된 그 음소를 'ㅎㄷ' 식으로 적지는 않는 것처럼, 사이시옷이 경음화를 일으킨다고 해서 경음화된 음소를 ㅅ과 함께 써야 할 필연성은 없다. 'ㅅ+ㄷ'이 합쳐져 'ㄸ'라는 음소가 되었다고 해석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박승빈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불파음 - 경음화의 틀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ㄹㄹ'까지 'ㅅㄹ'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더욱 음운론적 근거가 떨어진다.][* 특이하게도 일본어에서 간혹 박승빈의 주장과 유사한 표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외국어의 /l/발음을 표기하려 원래 /r/에 가까운 발음을 나타내는 ラ행 앞에 위의 'ㅅ'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ッ'을 덧붙이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ッ'를 단순한 입성(-k, -t, -p)이 아니라 후행하는 자음의 복자음화(-kk-, -tt-, -ss-, -pp-, -ll-)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의 최고신인 [[알라]]를 'アラー'(아라)가 아니라 'アッラー'(앗라)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표기는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외래어 표기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근대 시기(19~20세기)에는 된소리의 표기로 각자병서와 ㅅ계 합용병서 둘 중 무엇이 타당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열띠게 벌어졌다. [[한국어/맞춤법/역사|맞춤법의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엎치락뒤치락하였다. 조선 중후기에는 주로 ㅅ계 합용병서가 관습적으로 우세하였으나 맞춤법을 제정해나가는 과정에서 《[[훈민정음]]》에서의 세종의 의도를 생각하면 각자병서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우세해지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각자병서를 쓰는 것으로 명문화된 것은 잘 알려진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이다. [[일제강점기]]까지도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 등이 ㅅ계 합용병서를 표준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 초기의 문헌들은 ㅅ계 합용병서를 쓰는 일이 많다. 그 유명한 김소월의 [[진달래꽃]] 역시 원문은 '꽃'이 아니라 'ᄭᅩᆺ'이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제공되는 20세기 초 [[동아일보]] 기사도 입력이 각자병서로 되어 있어서 그렇지[* 그밖에 [[ㆍ]]가 일괄 [[ㅏ]]로 변환되어 입력되어있다.] 본문을 확인해보면 ㅅ계 합용병서인 것들이 많다. [[한글 점자]]에도 ㅅ계 합용병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된소리]] ㄲ, ㄸ, ㅃ, ㅆ, ㅉ의 초성을 적을 때에는 같은 초성을 두 번 적는 것이 아니라 초성 ㅅ(⠠)을 ㄱ, ㄷ, ㅂ, ㅅ, ㅈ 앞에 붙여 ㅺ, ㅼ, ㅽ, ㅆ, ㅾ으로 적는다. 초성이 아닌 종성의 경우 받침 ㄲ을 받침 ㄱ + 받침 ㄱ으로 적는 것과는 대조적인데, 초성 된소리와는 달리 ㄲ 받침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고 나서 ㄲ이라는 철자로만 쓰이기 시작했기(즉 ㄲ 받침은 ㅺ으로 적힌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분류:옛한글]] 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