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파테르쿨루스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800080> {{{#ffffff {{{+3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파테르쿨루스''' }}}[br]{{{-1 [[라틴어]]: Gaius Sulpicius Patercul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퀸투스 술피키우스 파테르쿨루스(아버지) || ||<#800080> {{{#ffffff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58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기원전 259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br][[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플로루스]] || ||<#800080> {{{#ffffff '''동기''' }}} ||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br][[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집안인 술피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한다. 기원전 258년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기 이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동료가 시칠리아에서 작전을 수행할 때 그는 아프리카로 원정을 떠나는 임무를 맡았으나 풍랑 때문에 샤르데냐 해안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하지만 [[폴리비오스]]는 두 집정관이 처음부터 시칠리아 방면에서 작전을 수행했다고 밝혔으며, 현대 학자들은 폴리비오스의 기록이 사실에 근접한다고 본다. 그는 사르데냐섬을 약탈하던 중 한니발 기스코가 이끄는 카르타고 함대가 접근해오자 함대를 이끌고 출격해 맞섰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쌍방간에 손실을 입히고 철수했다. 이후 카르타고군이 술키 항구에 정박한 사이, 로마군은 안개가 짙게 깔린 틈을 타 안개 속으로 진격해 적 함대를 기습했다.([[술키 해전]]) 이로 인해 40척의 함대를 속절없이 상실한 한니발 기스코는 본국으로 패주한 뒤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일설에 따르면, 한니발 기스코는 함대를 잃고 육지로 도주한 뒤 그의 무능을 성토한 장병들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로마군은 이 승리 덕분에 올비아 요새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르데냐 일대를 복속시켰다. 그러나 올비아에 자리를 잡은 카르타고군이 거세게 저항했기 때문에 올비아 탈환에 실패했다. 이후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거행했으나,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