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강준(북송)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송나라/인물]][[분류:1030년 사망]] [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姜遵 (? ~ 1030년) [[북송]]의 인물로 자는 종식(從式). == 생애 == 치주(淄州) 장산현(長山縣) 출신이다. 강준은 진사에 급제하여 봉래현위(蓬萊縣尉)가 되었고 등주(登州) 사리참군(司理參軍)으로 벽소되었으며, 개봉부(開封府) 우군연판관(右軍巡判官)을 맡았다. 당시 증거가 불충분하여 판결하기 어려운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사형을 당하려고 하자, 강준은 그의 무죄를 밝히고 석방해주었다. 강준은 뒤에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승진했고 왕증이 천거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으며,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개봉부판관을 역임하였다. 지길주(知吉州) 고혜련(高惠連)이 강준과 갈등을 빚어 강준이 여릉(廬陵)에 있을 때 뇌물을 받은 일을 고발했는데, 이를 조사하여 근거가 없음을 밝혀냈지만 강준은 연주통판(延州通判)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다시 입조하여 시어사, 판호부구원(判戶部勾院)이 되었다. 이주로(利州路)에 기근이 들자, 강준은 이주로의 기근을 진휼했고 지형주(知邢州)로 옮겼다. 1022년 [[진종(송)|진종]]이 승하하고 [[인종(송)|인종]]이 즉위하자, 강준은 지활주(知滑州)로 옮겼고 경동로전운사(京東路轉運使)가 되었으며, 경서로전운사(京西路轉運使)로 옮겼다. 뒤에 형부낭중(刑部郞中)의 신분으로 시어사지잡사(侍御史知雜事)를 겸임하였으며, 삼사(三司)와 개봉부의 관원들이 날마다 빈객을 접대하며 직무를 소홀히 한다고 건의하여 인종은 강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를 금지하였다. 이후 강준은 삼사부사(三司副使)를 역임하고 다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지영흥군(知永興軍)으로 옮겼으며, 함양(咸陽)의 부자 원씨(元氏)가 해마다 배를 바치는 것을 중단하도록 주청하였다. 강준은 1028년 추밀부사추밀부사(樞密副使)로 임명되다가 급사중(給事中)으로 전임되었으며, 1030년에 사망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추증되었다. == 기타 == 강준은 관리로서의 사무에 뛰어났으나 가혹한 정치를 펼쳐서 강준에게 주살된 이들이 매우 많았다. 영흥군에 있을 때 [[장헌명숙황후]]가 일찍이 승탑을 세우도록 명했는데, 강준은 [[한나라]], [[당나라]] 때 세워진 비석들을 헐었고 승탑이 완성된 뒤 부름을 받았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