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고광수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고광수}}}'''[br]'''高光洙'''}}}}}} || || '''이명''' ||이원선(李元善), 지모사(池模士), 찌모시(Тимоши) || || '''본관''' ||[[제주 고씨]] || ||<|2> '''출생''' ||[[1903년]] [[12월 28일]] || ||[[강원도]] [[횡성군]] 군내면 읍상리[br](現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읍상리 326번지[* [[http://db.history.go.kr/id/had_143_0100|경성지방법원 검사국 경성부종로경찰서 고등계 비밀 제1390호]]에는 336번지로, [[http://db.history.go.kr/id/had_143_0320|경기도경찰부 고등계 비밀 제426호]]에는 335번지로 각각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 || || '''사망''' ||[[1930년]] [[2월 5일]] (향년 26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903년 12월 28일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군내면]](現 [[횡성군]] [[횡성읍]]) 읍상리 326번지의 농가에서 아버지 고석인(高錫仁)의 차남으로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332|태어났다]]. 1913년 4월 횡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17년 3월 졸업했고, 이후 1919년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횡성군 군내면 읍내를 중심으로 전개된 [[3.1 운동]]에 참여했다. 1920년 횡성군 출신 자산가이자 조부 뻘인 고창한(高昌漢)의 후원으로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 [[가회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208번지 대동학원(大東學院)에 있던 고창한의 저택에 거처하면서 그해 5월 [[중동중학교|경성부 중동학교 중등과]]에 입학했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1396|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춘천고등학교|춘천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상경해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332|독립운동인명사전]]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15|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기록을 따른다.] 그러다 2학년 재학 중이던 1921년 3월 1일 3.1 운동 기념 선전문을 인쇄하여 배포했다가 이 사실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동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자 1921년 6월 북간도로 망명했다. 1921년 9월 북간도 소재 '상해당 만주뷰로'에 입당했고, 곧 연해주로 이동해 [[러시아 내전]]에 참가하여 고려혁명운동 의용병대에 소속되어 러시아 [[백군]]과 맞서 싸웠다. 1922년 3월 대한의용군에 입대하여 8월까지 [[하바로프스크]]에 머물다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1925년 소비에트 러시아 공산청년회 및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1925년 10월 국내로 돌아왔고, 1926년 2월부터 7월 20일까지 [[조선노동당]]에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당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성동고등학교|경성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당국이 [[조선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조사하자, 고광수는 해외로 피신했다가 8월에 재입국했다. 이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청년동맹과의 통합에 노력하여 '통합 고려공청'을 탄생시키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는 국내외를 오가며 공산주의 청년단체의 통일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노력했다. 1929년 2월 11일 [[지린성]] [[지린시|지린현]](吉林縣) 하남가(河南街)[*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촨잉구(船營區) 허난제(河南街).]에서 최덕준(崔德俊)·염진(廉進)·[[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2488|박문병]](朴文秉)·강철(姜澈)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조직을 위해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으며, 임시중앙간부에 [[http://db.history.go.kr/id/su_009_1929_02_11_0720|선임되었다]]. 1929년 6월부터는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철도부설공사장 인부로 일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지하운동을 펼치다가 그해 9월 24일 북청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후 10월 6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예심을 받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폐결핵에 걸려 신음하다 1930년 1월 30일 오후 5시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결국 그해 2월 5일 오후 9시에 병사했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횡성군 출신 인물]][[분류:제주 고씨]][[분류:1900년 출생]][[분류:193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결핵으로 죽은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