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공소안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ece5b6 '''{{{+1 당나라의 대신[br]{{{+1 孔紹安 | 공소안}}}}}}'''}}} || || '''{{{#fff 성}}}''' ||공(孔) || || '''{{{#fff 이름}}}''' ||소안(紹安) || || '''{{{#fff 부친}}}''' ||공환(孔奐) || || '''{{{#fff 출생}}}''' ||577년 ~ 622년 || || '''{{{#fff 출신}}}''' ||월주(越州) 산음현(山陰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북조시대]] [[진(육조)|진나라]], [[수나라]], [[당나라]] 시대의 [[역사가]]로 [[공자]]의 33대손. 월주(越州) 산음(山陰) 사람이다. == 생애 == 양(梁) 영원지강공주부(寧遠枝江公主簿) 공치손(孔稚孫)의 손자이자 진(陳) 이부상서(吏部尙書) 공환(孔奐)의 아들로 어려서 형 공소신(孔紹新)과 더불어 문사(文詞)에 이름이 있었다. 그가 13세가 되던 해에 [[수나라]]의 침략을 받고 진나라가 멸망했는데 그는 경조(京兆) 호현(鄠縣)으로 거처를 옮겨 문을 닫고 고문(古文) 수십만 집(集)을 암송했는데 이것을 들은 외형(外兄) [[우세남]]은 감탄하여 남다르게 여겼다. 일찍이 형 공소신은 우세남에게 이르러 말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본조(本朝, 진나라)가 함락되어,인멸(湮滅)되었으나,동생을 볼때,조심스레 논평하자면 우리 가문은 망하지 않을 것 입니다!」이때 시인 손만수(孫萬壽)는 공소안과 친하게 지냈는데 사람들은 이 둘을 가르켜 손공(孫孔)이라고 불렀다. 공소안은 [[대업]] 말년에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는데 [[고조(당)|이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의 수하로 들어갔고 [[당나라]]가 건국되자 내서사인(內史舍人)까지 올랐다. 후에 공소안은 당고조의 칙명을 받들어 남량사(南梁史) 편찬에 착수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577년 출생]][[분류:622년 사망]][[분류:사오싱시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