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곽지운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fff '''당나라의 장군[br]태원위공(太原威公)[br]{{{+1 郭知運 | 곽지운}}}'''}}} || ||<:>'''{{{#fff 작위}}}''' ||개휴현공(介休縣公) → 태원군공(太原郡公) || ||<:>'''{{{#fff 시호}}}''' ||위(威) || ||<:>'''{{{#fff 성}}}''' ||곽(郭) || ||<:>'''{{{#fff 이름}}}''' ||지운(知運) || ||<:>'''{{{#fff 자}}}''' ||봉시(逢時) || ||<:>'''{{{#fff 출신}}}''' ||과주(瓜州) 상락현(常樂縣) || ||<:>'''{{{#fff 부친}}}''' ||곽사(郭師) || ||<:>'''{{{#fff 생몰년도}}}''' ||667년 ~ 721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장수로 자는 봉시(逢時). == 생애 == 곽지운은 과주(瓜州) 상락현(常樂縣) 출신으로 667년에 곽사(郭師)의 아들로 태어났다. 곽지운은 신장이 7척이었으며, 팔이 길고 힘이 있었으며 용맹하고 활쏘기를 잘 하였으며 담력이 매우 뛰어났다. 곽지운은 처음에 진주(秦州) 삼도부(三度府) 과의(果毅)의 자리에 올랐다. 뒤에 전공을 세워서 좌효위중랑장(左驍衛中郎將), 한해군(瀚海軍) 경략사(經略使)로 제수되었으며 또한 검교이주자사(檢校伊州刺史)로 전임되고 이오군사(伊吾軍使)를 겸하였다. 714년에는 [[곽건관]](郭虔瓘)을 따라 북정(北庭)에서 [[돌궐]]의 침입을 물리쳐서 개휴현공(介休縣公)으로 책봉되었으며 운휘장군(雲麾將軍)이 더해졌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으로 발탁되었다. 같은 해에 토번이 농우를 침공하여 군마를 약탈하고 떠나자, 조정에서는 곽지운과 [[설눌]]에게 다시 토번을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곽지운은 이때 전공을 세워서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으로 임명되고 임조군사(臨洮軍使)를 겸하였으며 태원군공(太原郡公)으로 진봉되었다. 곽지운은 이후 농우로 부임하여 선주(鄯州) 도독, 농우제군(隴右諸軍) 절도대사(節度大使)로 임명되었다. 716년, 돌궐의 아실란(阿悉爛)과 혈질사태(𨁂跌思太) 등이 무리를 이끌고 모반하여 선우부도호(單于副都護) 장지운(張知運)이 이들에게 사로잡히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다시 곽지운과 설눌에게 이들을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곽지운은 수주(綏州) 경계에 이르러 흑산(黑山) 호연곡(呼延谷)이라는 곳에서 이들을 격파하였고, 곽지운의 기세에 눌린 돌궐은 결국 장지운을 풀어주고 달아난다. 조정에서는 곽지운을 농우 경략사로 임명하고 유성(柳城)에 진수시켰다. 곽지운은 717년에는 토번을 토벌하였고, 다음 해인 718년에 다시 출병하여 무방비한 토번에게 승리하였다. 곽지운은 태원군공(太原郡公)으로 책봉되었고 홍려경을 겸하였으며 어사대부를 대행하였다. 720년, 강대빈(康待賓)이라는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키자 곽지운은 [[왕준(당나라)|왕준]] 등과 함께 강대빈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곽지운은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으로 임명되었다가, 721년에 사망하여 양주(涼州) 도독으로 추증되었고 중서령 [[장열]]이 곽지운의 비문을 지었다. 이후 [[대종(당)|대종]] 영태(永泰) 연간에 곽지운에게 위(威)라는 시호를 내렸다. == 참고자료 == * 『[[구당서]]』 * 『[[신당서]]』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67년 출생]][[분류:721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