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독재관 및 기병장관)] ||||<#800080> {{{#ffffff {{{+3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 }}}[br]{{{-1 [[라틴어]]: Gnaeus Fulvius Maximus Centumal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플레브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그나이우스 풀비우스(조부)[br]그나이우스 풀비우스(아버지)[br][[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형제)[br][[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아들)[br][[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손자) || ||<#800080> {{{#ffffff '''참전''' }}} ||[[삼니움 전쟁]] 등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98년 || ||<#800080> {{{#ffffff '''전임''' }}} ||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br][[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 ||<#800080> {{{#ffffff '''후임''' }}}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br][[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기원전 312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독재관]]. == 생애 == 기원전 4세기 후반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약한 풀비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그나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299년 집정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는 그의 형제로 추정된다. 기원전 302년 [[독재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휘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서 에트루리아인들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기원전 298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가 집정관으로서 보여준 행적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차이가 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삼니움으로 쳐들어가 보비아눔과 아우피덴나를 공략했고, 동료 집정관 스키피오는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 테베레강 북쪽의 에트루리아 도시 및 촌락들을 황폐화시켰다고 한다. 반면 프론티누스에 따르면, 그는 루카니아로 행진해 여러 번의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개선장군 목록>에 따르면, 그는 로마로 귀환한 뒤 에트루리아와 삼니움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반면 스키피오의 비문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삼니움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학자들은 리비우스가 자신의 선조의 업적을 부각시키려는 여러 가문의 기록 중 어느 쪽이 사실인지를 파악하는 데 혼란을 겪었을 거라고 추정하며,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기록을 볼 때 켄투말루스가 삼니움과 에트루리아 모두에게 승리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켄투말루스가 삼니움 연맹을 구성한 4개 부족 중 가장 큰 부족인 페트리 족의 수도인 보비아눔을 제3차 삼니움 전쟁이 발발한 첫해에 공략했다는 것은 명백한 과장이라고 간주한다. 다만 켄투말루스가 로마와 전쟁할 준비가 덜 되어 싸우기를 회피한 삼니움족 덕분에 여러 마을과 촌락들을 순조롭게 약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95년,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기원전 305년 집정관)|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와 함께 총독에 선임되어 각기 군단을 이끌고 로마와 에트루리아 사이의 국경지대를 지켰다. 그러던 중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로부터 에트루리아를 약탈해 에트루리아인들을 유인하라는 지시를 받자, 메겔루스와 함께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움브리아인들과 함께 그를 막으려 달려왔지만 격파당해 수천 명을 상실했다. 그 후 30여년간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다가 기원전 263년 [[독재관]]에 선임되어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해군을 창설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는 기원전 229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손자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211년 집정관을 맡아 [[한니발 바르카]]와 대적했지만 [[2차 헤르도니아 전투]]에서 전사했다. [[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독재관]][[분류:로마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