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김복한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김복한}}}'''[br]'''金福漢'''}}}}}}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복한.jpg|width=100%]]}}} || || '''자 / 호''' ||원오(元五) / 지산(志山) || || '''본관''' ||[[신 안동 김씨|장동 김씨]][* 문충공 [[김상용|상용]](尙容)파 27세 한(漢) 항렬. 백야 [[김좌진]]에게는 21촌 지간의 족질(族姪)이 되며, [[김두한]]과는 같은 항렬이다.] || ||<|2> '''출생''' ||[[1860년]]([[철종(조선)|철종]] 11) [[7월 24일]] || ||[[충청도]] [[홍주목]] 고남면 조휘곡[br](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운곡리 조실골마을)[* [[https://smilebank.kr/lay1/bbs/S1T87C97/B/221/view.do?mode=view&article_seq=39782&cpage=27&rows=9&condition=&keyword=|#]]] || ||<|2> '''사망''' ||[[1924년]] [[5월 4일]][* 음력 4월 1일.][*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24051200209202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4-05-12&officeId=00020&pageNo=2&printNo=1353&publishType=00020|1924년 5월 12일 동아일보 기사]]에 '……홍성군 자택에서 신음 중이더니 지난 4일에 홀연히 장서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다만 [[국가보훈처]]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617|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24년 3월 29일로 적혀있고, 신 안동김씨 족보에는 1924년 3월 28일로 적혀있다. [[파일:김복한(신 안동 김씨) 족보 (안동김씨 대종중 홈페이지 참조).jpg]]] (향년 63세)||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마을 || || '''묘소'''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마을[* [[http://www.hj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5|#]]]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963년]] [[3월 1일]]에 추서. 추서 당시에는 '건국공로훈장 단장(建國功勞勳章 單章)'이었으며, [[1967년]]에 상훈법이 개정되면서 '건국훈장 국민장(建國勳章 國民章)'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다시 [[1990년]]에 법이 개정되면서 현재의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부르고 있다. 다 같은 명칭이니 오해하지 말 것. 여담으로 독립장은 건국훈장 중에서 제3등급에 속한다.] || >나는 대대로 녹을 받은 신하의 후손[*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의 후손인 점을 강조. 실제로 [[신 안동 김씨]]는 김상용, [[청음 김상헌|김상헌]] 형제 이후로 명문 가문으로 자리잡아 대대로 고위직에 올랐던 인물들이 많았다.]으로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평소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갑오년(1894년) 6월 이후에는 시골에 칩거하여 평생 자정(自靖-직역하면 스스로 평안해지다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쓰는 단어가 아니며 혼자서 조용히 살겠다는 의미인 듯.)하고자 하였더니, 지난해(1895년) 8월의 [[을미사변|대변]](大變)에 이르러서는 원통하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조금도 살 마음이 없던 중, 다시 11월 15일의 [[단발령|사변]](事變)이 일어났다. 이 역시 흉악한 역신들의 소행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의 욕됨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신민(臣民-신하와 백성으로 [[군주국]]에서 임금을 제외한 일반적인 사람들을 이르는 말[* 당연하지만, '''황국 신민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된 자의 박절(인정이 없고 쌀쌀하다)한 정이 격동하여 시세와 역량도 헤아리지 못하고 복수하고 설치(雪恥-치욕을 갚음)할 계획을 세우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을 도모함이 치밀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가볍게 일으켰다고 죄를 준다면 달게 받겠다. >- [[1896년]] 2월 25일 김복한의 법정 진술.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말기의 문신,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 초년기 ~ 관직 생활 === 김복한은 1860년(철종 11) 7월 24일 충청도 홍주목 고남면 조휘곡(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운곡리 조실골마을)에서 아버지 김봉진(金鳳鎭, 1826. 12. 25 ~ 1865. 1. 11)과 어머니 [[연안 이씨]](延安 李氏, 1824 ~ 1866. 11. 18) 이규(李圭)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 남동생 김교한(金喬漢, 1862. 11. 19 ~ 1940. 12. 15)이 있었는데, 23촌 지간의 족숙(族叔)인 김승진(金承鎭, 1841. 7. 22 ~ 1920. 3. 8)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후 김교한은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생가 친형 김복한의 차남인 김노동(金魯東, 1899. 1. 16 ~ 1958. 12. 20)을 양자로 들였다.]으로 태어났다. 그는 [[병자호란]] 때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정1품)으로 [[강화도]]에서 농성하다가 순절한 [[김상용]]의 후손[* 김상용의 셋째 아들인 김광현(金光炫, 호는 수북(水北), 1584. 9. 22 ~ 1647. 7. 23)은 부친이 순절한 이후, 홍주목 고남면 오두촌(현재의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으로 내려가 살았으며, 이조 참판(吏曹參判:종2품)에 올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김복한은 김광현의 직계 11대 종손이다.]으로 조상들이 대대로 현감(縣監:종6품)으로부터 [[군수]](종4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3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 [[전라도]] [[관찰사]](종2품), 이조 참판(吏曹參判:종2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관직에 출사한[* 11대조 김광현(金光炫, 1584. 9. 22 ~ 1647. 7. 23) : 1612년([[광해군]] 4) 증광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12_008347|생원시]]와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12_008518|진사시]]에 각각 1등 5위, 3등 46위로 입격 → 찰방(察訪:종6품)을 지내다가 1623년([[인조]] 1) 정시 문과에 병과 2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23_005316|급제]] →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을 지내다가 1626년(인조 4) 중시 문과에 병과 1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26_005469|급제]] → 이조 참판(吏曹參判:종2품)[br]10대조 김수인(金壽仁, 1608. 7. 13 ~ 1660. 6. 19) : [[음서]]로 익산군수(益山郡守:종4품)[br]9대조 김성우(金盛遇, 1630. 10. 16 ~ 1717. 12. 8) : 1652년([[효종(조선)|효종]] 3) 증광시 진사시에 3등 19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52_012070|입격]][br]8대조 김시걸(金時傑, 1653. 12. 5 ~ 1701. 6. 28) : 1681년([[숙종(조선)|숙종]] 7) 식년시 진사시에 1등 5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81_014818|입격]] → 1684년(숙종 10) 정시 문과에 을과 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84_007092|급제]] → [[전라도]] [[관찰사]](종2품)[br]7대조 김영행(金令行, 1673. 9. 3 ~ 1745. 12. 23) : [[음서]]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3품)[br]6대조 김이건(金履健, 1697. 6. 10 ~ 1771. 7. 15) : 1721년([[경종(조선)|경종]] 1) 식년시 생원시에 3등 34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721_019376|입격]]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br]5대조 김양순(金養淳, 1722. 3. 3 ~ 1798. 12. 1)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br]고조부 김회근(金晦根, 1745. 5. 26 ~ 1773. 10. 20)·증조부 김병정(金炳鼎, 1770. 3. 16 ~ 1815. 4. 7) : 출사 x[br]조부 김정균(金正均, 1797. 4. 21 ~ 1866. 11. 24) : [[음서]]로 고령현감(高靈縣監:종6품)[br]아버지 김봉진(金鳳鎭, 1826. 12. 25 ~ 1865. 1. 11)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 명문가의 자제였다. 그러나 6살 되던 1865년 아버지를 여의고 연이어 7살 되던 1866년 어머니 연안 이씨와 조부 김정균까지 세상을 떠나 천애고아가 되었지만, 다행히 18촌 지간의 고조부뻘인 김민근(金敏根, 1845 ~ ?. 6. 28)[* 고조부 김회근(金晦根, 1745. 5. 26 ~ 1773. 10. 20)과는 같은 항렬이지만 100살 차이가 난다.]의 손에 자라면서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이후 1890년([[고종(조선)|고종]] 27) [[음서]]로 [[선릉]] [[참봉]](종9품)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그해 세자익위사 우시직(世子翊衛司右侍直:정8품)을 지냈다. 1892년([[고종(조선)|고종]] 19) 세자익위사 좌시직(世子翊衛司左侍直:정8품)을 지내다가 그해 시행된 별시 문과에 병과 9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92_014919|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종5품)에 제수되어 [[고종(대한제국)|고종]]을 가르치는 [[경연]]을 하기도 하였으며, 그해 [[사간원]] 정언(正言:정6품), 부사직(副司直:종5품), [[사헌부]] 지평(持平:정5품), 부사과(副司果:종6품),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종6품), [[경연|경연청]] 검토관(經筵廳檢討官:정6품), 친군통위영군사마(親軍統衛營軍司馬), 서학 교수(西學敎授:종6품)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인 1893년에는 [[사간원]] 헌납(獻納:정5품), 부호군(副護軍:종4품),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 등을 지내다가 학문의 깊이를 인정받아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정6품)에 제수되어, 당시 [[왕세자]]였던 [[순종(대한제국)|순종]][* 1874년(고종 11) 태어나 이듬해인 1875년 2월 바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치는 서연(書筵)을 맡기도 했다. 그 뒤 응교(應敎:정4품),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종3품) 등을 지내다가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정3품)에 제수되면서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으며, 형조 참의(刑曹參議:정3품),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 등을 역임했다. 1894년 우부승지(右副承旨:정3품) 등을 지내다가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당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 항일 투쟁 === ==== [[을미의병|1차 홍주의병]] ==== 뒤이어 1895년에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연이어 터지자, [[홍주목|홍주부]] 관내의 유림 세력들을 모아 [[을미의병|의병 운동]]을 전개해 관아가 있던 [[홍주읍성]]에 들어가 창의소를 세우고 총수에 추대되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려고 했는데, 총수에 추대된 다음 날에 '''당시 홍주부 관찰사(이전의 홍주[[목사(관직)|목사]])인 이승우(李勝宇, 1841 ~ 1914)[*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로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1894년에 홍주목사 겸 초토사가 되어 당시 지역 내에 크게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동학농민군]]들을 진압했고, 이후 [[을미개혁]]으로 지방관제가 바뀔 때 홍주부 관찰사에 임명되어 있던 도중에 이 사건을 맞았다. 당시 본인은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김복한과 이설 등 의병을 주도한 지역 유림들이 의병에 반대하는 홍주부 참서관(參書官) 함인학(咸仁鶴)을 핍박해 내쫓고 경무관(警務官) 강호선(姜浩善)을 구타하며 이승우를 비난하자 마지못해 응했는데, 지도부 몰래 중앙의 관리들과 내통하고 지도부들을 체포한 것이다. 이후에는 [[관찰사]]와 규장각 제학을 지냈다.]가 끝내 배신'''하고 김복한과 이설 등 의병 지도부를 체포하면서 의병 운동은 허무하게 실패하였다. 체포된 그는 구금된 뒤 [[한성부]]에 소환되어 재판[* 『[[승정원일기]]』 - [[http://sjw.history.go.kr/id/SJW-K33020250-00400|원문]],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3_02A_25A_00050_2004_169_XML|번역문]].] 끝에[* 본 문서 위에 나온 진술 내용이 이 때 재판에서 김복한이 밝힌 것이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33_02A_25A_00050|10년 유배형에 처해졌지만]], [[을미의병]] 해산 조칙을 내리기 전의 일이고 [[명성황후]]에 대한 복수 및 [[친일파]] 처단이 취지였으므로 특별히 용서해주라는 [[고종(조선)|고종]]의 특지[* 『[[조선왕조실록]]』 -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304009_001|내용]] /『[[승정원일기]]』 - [[http://sjw.history.go.kr/id/SJW-K33020270-00400|원문]],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3_02A_27A_00050_2004_169_XML|번역문]].]를 받고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구금 과정에서 얻은 [[각기병]]으로 이후 보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해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33_05A_05A_00070|성균관장]](成均館長)에 제수되었으나 2달 만에 사직했고, 이어 1898년 [[중추원(대한제국)|중추원]] 2등 의관(二等 議官)에 제수되기도 했지만 역시 사직했다. ==== [[을사의병|2차 홍주의병]] ==== 1905년 [[을사늑약|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지이자 친척인 이설과 함께 그 해 12월 2일 서울로 올라가[* 본래는 지역 유림들을 모아 상소를 하려고 했지만, 이설은 유림의 뜻을 모아 상소를 지을 여가가 없다면서 바로 서울로 올라가자며 오히려 재촉하였다고 전한다.] [[을사오적]]의 처벌과 의병 세력들을 모아서 일본을 몰아내고, 왕실을 회복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지만, 이틀 뒤에 일본군과 친일파가 장악한 조정에서 체포해 효과가 없었다. 그 후에 풀려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나빠지게 되면서 재차 의병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안병찬 등 옛 동지들에게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해 이들은 민종식을 중심으로 의병의 기치를 내걸고 [[홍주읍성]]을 점령했지만,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의해 와해되었고 지도부들은 죽거나 체포되었다. 김복한은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공모한 혐의 등으로 여러 차례 체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순사들이 의병의 소재지를 대라면서 구타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위협까지 가했는데, 다행히 같이 있던 조선인 순검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1907년 12월에 결성군 산수동(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마을)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연이은 체포와 구금 등으로 인해 [[중풍]]에 걸려 남의 도움 없이는 생활을 하기 어려워졌다. === [[경술국치]] 이후 ===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죄인을 자처해 은거하였다. 그 뒤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고 [[3.1 운동]]이 일어나자 안병찬, 곽종석 등 [[충청도]] 및 [[영남]]의 유림 137명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하는 데 참여했는데, 이 일로 체포되어 1919년 6월 2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대구지방법원으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118&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4859&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이송되었으며]], 그해 7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201&evntId=0034988642&evntdowngbn=Y&indpnId=000001986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공주감옥에서 수 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병으로 [[형집행정지]]를 받아 출옥한 그는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후학들을 양성하고 지역 내 민족운동의 기반이 되는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에 참여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다가 1924년 5월 4일 향년 64세를 일기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24051200209202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4-05-12&officeId=00020&pageNo=2&printNo=1353&publishType=00020|별세했다]]. === 사후 === 그의 묘는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마을에 있으며, 전처인 [[연안 이씨]](이의익(李毅翼)의 딸, 1855. 7. 2 ~ 1893. 6. 29)과 후처 [[청주 이씨]](이주찬(李周讚)의 딸, 1882 ~ 1905. 2. 6[* 신 안동김씨 족보에는 '1965년 을사(乙巳)'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1905년'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과 같이 합장되었고, 해당 묘역은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9호로 지정(1984년 5월 17일 지정)되어 있다.[[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ulPageNo=2®ion=&searchCondition=&searchCondition2=&s_kdcd=31&s_ctcd=34&ccbaKdcd=31&ccbaAsno=01690000&ccbaCtcd=34&ccbaCpno=3413401690000&ccbaCndt=&ccbaLcto=40&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cbaPcd1=&chGubun=&header=region&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RegionList.do&pageNo=1_1_3_1|국가문화유산포털 홈페이지 - 김복한 묘(金福漢 墓)]] 한편, 21촌 지간의 족숙(族叔)인 [[김좌진]]이 1930년 암살을 당하고 나서 중화민국 길림성 해림현에 임시로 암매장되었다가 부인 오숙근 여사가 1940년 9월 해림현으로 가서 [[밀감]] 상자에 김좌진의 유해를 담아 와서 김복한의 묘소 인근에 가명을 써서 암매장했다고 한다.[* 다만, 대부분 관련 자료들에서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로만 적혀있을 뿐, 당시 묻혔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때 암매장되었던 김좌진의 유해는 1958년 장남 [[김두한]]에 의해 정식으로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에 안장되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공로훈장 단장(建國功勞勳章 單章)'(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후에 지역 유림들과 홍성군에서 묘소 아래에 '추양사(秋陽祠)'를 세워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제를 지내고 있다. 문집으로는 사후 후손들과 제자들이 편집한 『지산집(志山集)』이 있다. == 가족 관계[* '안동김씨 대종중' [[http://www.adkim.net/|홈페이지]]내 족보 내용을 참고하였다.] == * 김봉진(金鳳鎭, 1826. 12. 25 ~ 1865. 1. 11) = 연안 이씨(이규(李圭)의 딸, 1824 ~ 1866. 11. 18) → [[김상용]]의 3남 김광현(金光炫, 호는 수북(水北), 1584. 9. 22 ~ 1647. 7. 23)의 직계 11대 종손. * '''김복한''' = 연안 이씨(이의익(李毅翼)의 딸, 1855. 7. 2 ~ 1893. 6. 29) = [[청주 이씨]](이주찬(李周讚)의 딸, 1882 ~ 1905. 2. 6) * 김은동(金殷東, 1888. 6. 20 ~ 1945. 6. 24) * 김노동(金魯東, 1899. 1 .16 ~ 1958. 12. 20) → 상술한 각주의 내용처럼 23촌 지간의 족숙(族叔)인 김승진(金承鎭, 1841. 7. 22 ~ 1920. 3. 8)에게 양자로 들어간 김복한의 친동생 김교한의 양자로 들어갔다. * [[김명동]](金明東, 1903. 11. 25 ~ 1951. 12. 2) 두 부인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는데, 그 중 세 아들은 부친을 간병하면서 지역 내 민족 항일운동인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신간회]] 등에 참여했으며, 3남 김명동은 해방 이후 [[공주시|공주군]]에서 [[제헌 국회의원]]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제2대 국회의원]] 임기 중에 사망하였다.[* 여담으로 묘소의 위치를 알 수 없는 차남 김노동을 제외하고 장남 김은동의 묘는 공주시 금성동에, 3남 김명동의 묘는 세종시 장군면 금암리에 있다.] == 참고 자료 ==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21~222p * '안동김씨 대종중' [[http://www.adkim.net/|홈페이지]]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홍성군 출신 인물]][[분류:안동 김씨(후)]][[분류:1860년 출생]][[분류:192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