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김진호(군인)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 {{{#FFFFFF '''역임한 직위'''}}}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 ---- [include(틀:제2작전사령관)] [include(틀:제11군단장)]}}}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801A24, #993334 20%, #993334 80%, #801A24)"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FFF 대한민국 제28대 합동참모의장}}}]][br]{{{#FFF {{{+1 김진호}}}[br]金辰浩 | Kim Jinho}}}'''}}}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2011031j0397_P2.jpg|width=100%]]}}} || ||<|2> '''출생''' ||[[1941년]] [[11월 13일]] || ||[[서울특별시|경기도 경성부]] [[전농동|전농정]] || || '''사망''' ||[[2022년]] [[9월 30일]] (향년 80세)|| || '''학력''' ||(전농초등학교)[[배재고등학교]] {{{-2 (졸업)}}}[br][[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학부/문과대학|문리과대학]] 문학부 {{{-2 (사학 / 학사)}}}[br][[고려대학교/대학원|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2 (부동산금융CRO과정[* [[최고위과정]]] / 수료)}}} || || '''경력''' ||[[한국토지공사]] 사장[br][[대한민국재향군인회|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회장]][br][[새천년민주당]] 안보위원장|| ||<-2> '''군사 경력''' || || '''임관''' ||[[학군사관]] {{{-2 (학군 / 2기)}}} || ||<|2> '''복무''' ||대한민국 육군 || ||[[1964년]] ~ [[1999년]] || || '''최종 계급''' ||[[대장(계급)|대장]] {{{-2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합동참모의장 || || '''주요 보직''' ||[[제37보병사단|제37보병사단장]][br][[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 [[정보참모|정보참모부장]][br][[제11군단|제11군단장]][br][[제2작전사령관|제2야전군사령관]]||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前군인으로 최종계급은 [[대장(계급)|대장]], 최종보직은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합동참모의장]]이다. 2017년 8월부터 2022년 초까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을 지냈다. [[학생군사교육단|학군사관후보생]](ROTC 2기) 최초로 [[대한민국 국군]] 서열 1위인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합참의장 시절인 1999년 [[조성태]] 당시 국방장관과 함께 [[제1연평해전]] 승리에 공헌했다. 퇴역 후인 2001년부터 2004년까지는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맡아 [[개성공단]] 사업을 주도하며 남측을 향한 북한군의 배치를 후퇴시키는 군사적 이익을 창출했다. == 생애 == === 초기 === 1941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전농동에서 김삼봉과 심학실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서울 전농동에서 살아온, 평범한 집안이었고, 비교적 유복한 가문이었으나, 1950년에 6.25를 맞이하여 온갖 고난을 겪었다. 그 당시 작은 형님이 국군을 죽이는 인민군이 싫다며 따발총의 실탄을 빼서 땅에 파묻어버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1954년에 전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배재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그 시절에 공부를 그렇게까지 잘 하지는 못했다. 한때는 가출을 한 적도 있었고, 고교 시절에는 우열반을 나눠서 편성했는데, 열반에 배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암기과목 위주로 노력했다. 잠을 쫓는 약인 ‘카페나’라는 각성제까지 먹어가며 새벽 2시, 3시까지 공부하였다. 그 덕분에 1960년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진학했다. 사학과에 진학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역사교사였던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그렇게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후 럭비선수로 크게 활약했다. 그리고 과대표 선거에도 출마했는데 낙마하였다. === 군인 초기 === 그 후 리더십과 순발력을 배우기 위해 [[학생군사교육단|ROTC]]에 지원하여 1964년에 2기로 임관했다. 첫 부임지는 [[강원도]] [[양구군]]의 [[제2보병사단]] 31보병연대의 어느 소대였다. [[소대장]]의 임무를 다 하면서도 군에서 [[스케이트]] 선수로 활약했다. 징계를 면하기 위해 [[권투]] 선수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의무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전역할 무렵에 당시 지휘관에게 "네가 제대하면 선수로 출전할 사람이 없지 않느냐"는 말을 듣고 전역명령을 취소시키며 그냥 군에 눌러 앉아 버렸다. 처음에는 [[대령]]까지 진급하는 게 목표였다. 그 뒤 1968년에는 [[베트남 전쟁]]에 군사장교로 참전하였다. 베트남에서 전투를 치르던 중 부친이 별세했지만, 모든 가족이 ‘흔들림 없이 군대에서 성실히 복무하라’는 의미에서 이를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알고 아버지께 드리려고 서울로 보냈던 라이터를 보며 통곡했다. 소령 시절에 [[장세동]]과 같이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했고, 이후 [[제5보병사단]] [[제35보병여단|제35보병연대]] [[대대장]][* [[노태우]]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손위 처남이자 당시 5사단장이었던 [[김복동]]에게 ‘아끼는 부하이니 잘 돌봐달라’는 손 편지까지 써주었다고 한다.]과 [[수도방위사령부|수경사]] [[제1경비단|제30경비단]] 부단장[* 이 당시 30경비단장이 바로 [[장세동]]이었다.고려대 동기인 [[박상범]] 경호관을 발견하여 병원으로 이송했다.]을 거쳐, 자신의 목표였던 대령까지 진급했다. 그러나 대령에 진급하고도 [[연대장]] 보직을 받지 못했다.[* 물론 이 당시만 해도 연대장은 대령 2~3차 보직이었다. 하지만 부지휘관을 두 번 연속으로 보낸 것은 충분히 좌천성 승진에 가깝다.] 당시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제3공수특전여단 [[부여단장]]이었다. 이것이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견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새벽 일찍부터 [[장세동]] [[대통령경호처|대통령경호실]]장에게 직접 전화로 따졌다.[* [[소령]]에서 [[대령]]까지 그와 세차례 같이 근무한 장세동은 그 즉시 하나회 핵심 관계자에게 “차라리 김진호를 전역시켜 버려라”고 강경한 어조로 항의했고, 그 덕분에 인사 불이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나회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전방 지오피([[GOP]]) 담당인 [[제3보병사단]] [[제22보병여단|22연대]]장으로 발령을 받고 지오피 연대장으로 근무할 때는 내무반 사고를 없애기 위해 전방 근무자를 세심하게 가려서 뽑는 한편 [[병영부조리]] 척결 및 선진병영문화에 온 힘을 쏟았다.[[http://www.newsgn.com/sub_read.html?uid=88224|관련 기사]] 이후 국방부 인사과장과 [[제51보병사단]] 부사단장을 역임했다. === 장군으로 === 그 뒤 비육사 출신으로 받을 수 있는 좋은 보직을 받으며 계속 승승장구했다. 준장으로 진급한 뒤 [[육군3사관학교]] 참모장을 지냈고,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제37보병사단]]장의 자리에 부임하였다. 그리고 1991년에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 육본 소장 보직 중 [[요직]]으로 많은 중장, 대장들이 이 보직을 거쳐갔다.]으로 승진했고, 1993년에는 중장 진급과 함께 [[제11군단장]]을 역임했다.[* 당시 하나회 숙청으로 인해 중장 자리가 많이 비던 상황이었다.] 1996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제2작전사령관|제2야전군사령관]][* 주로 비육사 출신 대장에게 돌아가는 [[T/O]]다.]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998년]] [[3월]]에는 제28대 합동참모본부 의장 겸 통합방위본부 본부장의 자리에 올랐다. 학군 출신으로는 전례 없는 승진이었다. 학군 1기인 [[박세환(군인)|박세환]]이 4성 장군으로 제2야전군사령관까지 올랐지만, 합참의장은 김진호가 처음이었다. 배재고등학교에서 배출한 4명의 4성 장군 중 한 명이다. 나머지 3명 중 육군대장은 2명으로 [[김계원]] 전 육군참모총장[* 박정희 정권에서 요직들을 거쳤는데 참모총장 끝나고 중앙정보부장, 다시 주 대만 대사를 거쳐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다만 마지막에 10.26 사건이 터지면서 더 이상의 공직을 맡을 수 없었다.](육사 2기)과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 및 전 국정원장(육사 25기)이 있다. 다른 1명으로는 현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공군참모총장]]인 정상화 공군대장(공사 36기)이 있다. === 합참의장 시절 === 합참의장으로 재임하면서 동해안 잠수정 침투, 여수 반잠수정 격침, 제1차 연평해전 등 다수의 북한 군사도발에 맞섰다. 그때 유난히도 북한 측의 공세가 더 거셌던 것은 당시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 정책을 시험하고, 더 많은 지원을 얻기 위하여 북한이 [[화전양면전술]]을 썼기 때문이었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90166-00_01160516.jpg]] 1999년 제1차 연평해전 당시, 존 틸럴리 주한미군 사령관과의 회동 모습 다행히 북한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도발에 우리 상하급부대가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1999년 [[제1연평해전]]을 압승으로 마무리하였다. 당시 김진호는 북한 경비정의 NLL 도발 시 교전규칙에 따라 강력한 대응을 주문했다.[* 그 후 김진호는 자서전에서 제1차 연평해전 당시 북측 피해 규모에 대해 "우리의 통신정보기관에서 북한의 교신 내용을 파악한 바로는 1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종전에는 북한군 사상자가 수십명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 전역 이후 === [[1999년]] [[10월]]에 명예로운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하였다.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지냈다. 2003년 4월 30일 개성공단 착공식을 한 뒤 북측에서 당초 80억원에 약속한 50년치 임차료를 갑자기 1200억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근거도 없는 이런 요구를 들어주면 분양가가 3.3㎡당 10만원에서 40만원으로 급증, 조성 계획에 큰 차질이 발생할 판이었다. 이 상황에서 통일부는 북한과의 다른 사업까지 막혔다며 모든 책임을 미뤘고, 김진호는 계약내용을 바꿀 수 없다며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다른 정부 부처에서도 “1200억원이 무슨 큰돈이냐. 군 출신의 고집”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2003년 12월 22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김진호 사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 김진호는 리언 J 러포트 주한미군 사령관을 만나 개성공단의 전략적 중요성을 설명하고 “훌륭한 사업”이란 평가를 받아 미국 측 협조를 이끌어낸 뒤 북한과 협상하여 보상비 120억원에 출입국관리사무소 건축비 40억원 등 160억 원으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2017년 8월 재향군인회장에 선출되어 2022년 초까지 재임후 퇴임하였으며, 2022년 9월 30일 별세했다. [[https://m.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16262&Newsnumb=20221016262|생전 마지막 인터뷰]] * 학군 출신의 동명의 후배 장군 [[김진호(학군31기)]]가 있다.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학생군사교육단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분류:1941년 출생]][[분류:2022년 사망]][[분류:동대문구 출신 인물]][[분류:배재고등학교 출신]][[분류:고려대학교 출신]][[분류:한국토지공사 사장]][[분류:문재인 정부/인사]][[분류:국민의 정부/인사]][[분류:육군 장교 출신]]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김진호, version=36)]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