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rr20240101판에서 저장되지 않은 문서입니다.자동으로 r20210301판 문서를 읽어왔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나순조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파일:나순조.jpg|width=300px]] || || 성명 ||나순조(羅順祚) || || 본관 ||[[나(성씨)|금성 나씨]] || || 생몰 ||[[1911년]] [[5월 10일]] ~ [[2001년]] [[2월 26일]] || || [[출생지]] ||[[전라남도]] [[나주시]] 세지면 죽동리[* 인근의 송제리와 함께 [[나(성씨)|금성 나씨]] 집성촌이다.] || || 사망지 ||[[광주광역시]]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나순조는 1911년 5월 10일 전라남도 나주시 세지면 죽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에 재학하다가 1930년 7월에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 학생에 대한 부당대우에 맞서기 위해 동맹휴학을 주동하다가 퇴학당했다. 이후 일본에 건너간 그는 1930년 11월에 성봉중학교 4학년에 편입했지만 이듬해 1월에 자퇴하고 귀국했다. 그는 고향에 돌아온 뒤 야학을 실시해 매일 밤 2~3시간 국어, 산술을 가르쳤고, 학생들에게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비판했다. 그러던 1932년 5월, 나순조는 이한기(李漢基) 등과 동지적 결연을 맺고 항일결사를 조직하기로 뜻을 모으고, [[나석현]], 나병환(羅炳煥), 박열석(朴烈錫), 김병옥(金秉玉) 등을 동지로 규합한 후 독서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1933년 2월에 이러한 활동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체포되었고, 1934년 3월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및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소 후에는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곤궁하게 지내다가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고, 광복 후에는 광주광역시에서 거주하다가 2001년 2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나순조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나순조가 사망한 지 이틀 후인 2001년 2월 28일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금성 나씨]][[분류:나주시 출신 인물]][[분류:1911년 출생]][[분류:200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분류:중동고등학교 출신]]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