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류낙진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파일:external/img.hani.co.kr/005000000120050403R02331529_0.jpg]] 柳洛鎭 [[1928년]] [[8월 26일]] ~ [[2005년]] [[4월 1일]]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남조선로동당]]원, [[빨치산]] 출신 교육자, 서예가이다. 본관은 영광 류씨[*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문근영 가족 족보.png]]]이며, 연예인 문근영의 외할아버지다. == 생애 == 1928년 8월 26일,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과립리에서 태어나서, 5살이던 1933년 [[아버지]]를 따라서 [[일본]]으로 건너간 후 [[소학교]]를 거쳐, 히로시마 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2월 귀국하여 [[고향]]에 정착하였다. 1947년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1950년 [[한국 전쟁]]에서 남조선로동당 남원군당 선전부에 활동하였고 전라북도 순창 회문산 등지에서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1952년 3월 [[지리산]]에서 체포되어 광주 포로 수용소에서 군사재판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53년 민간 재판소로 이양되면서 5년으로 감형되었다. 1957년 출소한 뒤에도 계속 지하 활동을 하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혁신당 조직 활동으로 1964년 체포되었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세가 되던 해 인민군에 입대하여 지리산에 입산한 부인 신애덕을 만났다. 1953년 신애덕은 총상을 당한 채 붙잡혔다가 석방되었고, 류낙진은 이후 신애덕과 결혼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보성군]]의 예당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71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88년 다시 20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990년 전향서를 제출한 후 19년 만에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1994년 김영삼정부 때 사건 조작 논란을 낳은 구국전위사건으로 또 다시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하여 체포된 뒤, 광주 지역 재야 인사들의 석방 운동으로 1999년에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되었다. 이후 [[광주광역시]]에 거주하면서 수감 기간에 익힌 실력을 바탕으로 후진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면서 서예가로 활동하다가 2005년 4월 1일 [[사망]]하였다. [[향년]] 76세. == 여담 ==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할아버지]]이다[* 류낙진의 딸인 류선영(柳鮮瑛)이 그녀의 어머니다.].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당시 29살의 [[전남대]] [[휴학]]생이었던 동생이 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숨졌다. [[분류:1928년 출생]][[분류:2005년 사망]][[분류:남원시 출신 인물]][[분류:영광 류씨]]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