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마츠키 켄지로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한신 타이거스 감독)] [include(틀: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enjiro_Matsuki_1937_2.jpg|width=450]] || |||| [[오사카 타이거스]] 선수 시절(1937년) || || 이름 || 마츠키 켄지로(松木謙治郞) || || 출생 || [[1909년]] [[1월 22일]] || || 사망 || [[1986년]] [[2월 21일]] (향년 77세) || || 국적 ||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 || 출생지 || [[후쿠이현]] [[쓰루가시]] || || 학력 || 후쿠이 현립 쓰루가 상업 고등학교 - [[메이지대학]] || || 투타 || [[좌투좌타]] || || 포지션 || [[1루수]] || || 신체 || 173cm / 79kg || || 소속팀[* 항목과 연도가 없는 팀은 [[사회인야구]] 팀이다.] || 나고야 철도국[* 現 [[JR 토카이]] 경식 야구부][br]다이렌 실업단[br][[한신 타이거스|오사카 타이거스/한신군]](1936~1941)[br]다이토 제강[br][[오사카 타이거스]](1950~1951) || || 지도자 경력 || [[한신 타이거스|오사카 타이거스/한신군]] 선수 겸 감독(1940~1941)[br][[오사카 타이거스]] 감독(1950~1954)[br][[다이에이 스타즈]] 타격 코치(1955~1956[* 1956년 시즌 도중 감독대행도 겸임])[br][[다이에이 스타즈|다이에이 스타즈/유니온즈]] 감독(1956~1957[* 1956년 시즌은 감독대행])[br][[토에이 플라이어즈]] 타격 코치(1958~1960)[br][[토에이 플라이어즈]] 감독(1969~1970.7[* 1970년 시즌 도중 퇴임]) || ||<-5><#000000><:>[[일본프로야구|[[파일:NPBLflag.jpg|width=50]]]] '''{{{#ffffff 1937년 춘계리그 일본직업야구연맹 수위타자}}}''' || || 1936년 추계리그[br][[나카네 스스무]][br]([[주니치 드래곤즈|나고야군]])[br].376 || → || '''마츠키 켄지로[br]([[오사카 타이거스]])[br].338''' || → || 1937년 추계리그[br][[카게우라 마사루]][br]([[오사카 타이거스]])[br].333 || ||<-5><#000000><:>[[일본프로야구|[[파일:NPBLflag.jpg|width=50]]]] '''{{{#ffffff 1937년 춘계리그 일본직업야구연맹 최다 홈런}}}''' || || 1936년 추계리그[br][[후지무라 후미오]][br]([[오사카 타이거스]])[br]야마시타 미노루[br]([[한큐 브레이브스|한큐군]])[br]후루야 쿠라노스케[br]([[나고야 킨코군]])[br]2홈런 || → || '''마츠키 켄지로[br]([[오사카 타이거스]])'''[br]나카지마 하루야스[br]([[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 쿄진군]])[br]'''4홈런''' || → || 1937년 추계리그[br][[타카하시 요시오]][br]([[고라쿠엔 이글스]])[br]6홈런 || ||||||||||<#fefe01> {{{#000000 '''[[한신 타이거스|'''{{{#000000 오사카 타이거스/한신군}}}''']] 역대 감독'''}}} |||||||| ||<:> 이시모토 슈이치 [br] (1936~1939) || → ||<:><#000000> '''{{{#ffffff 마츠키 켄지로}}}'''[br]'''{{{#ffffff (1940~1941)}}}''' || → ||<:> 와카바야시 타다시 [br] (1942~1944) || ||<:> 와카바야시 타다시 [br] (1947~1949) || → ||<:><#000000> '''{{{#ffffff 마츠키 켄지로}}}'''[br]'''{{{#ffffff (1950~1954)}}}''' || → ||<:> 키시 이치로 [br] (1955[* 시즌 도중 퇴임]) || ||||||||||<#006699> {{{#ffffff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ffffff 토에이 플라이어즈}}}''']] 역대 감독'''}}} |||||||| ||<:> [[오시타 히로시]] [br] (1968[* 시즌 도중 퇴임]) || → ||<:><#e6a722> '''{{{#000000 마츠키 켄지로}}}'''[br]'''{{{#000000 (1969~1970[* 시즌 도중 퇴임])}}}''' || → ||<:> [[타미야 겐지로]] [br] (1970~1973[* 1970년은 감독대행. 1973년 전기리그 종료 후 퇴임]) || [목차] == 개요 == [[일본]] [[후쿠이현]] [[쓰루가시]] 태생의 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단일리그 시대의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던 선수였으며 지도자로서도 어느 정도 좋은 수완을 보였다. == 선수 시절 == 쓰루가 상업 고등학교 - [[메이지대학]]으로 진학했으며 대학시절 도쿄 6대학 리그를 대표하는 슬러거로 명성을 날렸다. 광각타법의 시조로 불리기도 한다. 사회인 야구팀인 나고야 철도국과 다이렌 실업단을 거쳐 1936년 [[오사카 타이거스]]의 창단 멤버로 프로에 데뷔했으며, 팀의 초대 주장과 4번타자를 맡았다. 1937년 춘계리그에서 타격왕과 홈런왕을 동시에 석권했고 1940년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했지만 성적 부진을 이유로 1941년 시즌 종료 후 은퇴와 동시에 팀을 떠났다. 이후 군수회사인 '''다이토 제강'''에서 근무하였는데[*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징집을 피하려 한 수단이었다.], 당초 야구를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입사한 마츠키였지만 회사 전무의 간곡한 설득에 감읍하여 회사 야구팀에 코치 겸 선수로 참가하여 팀을 도시대항 야구대회 준우승으로 이끄는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 출신으로 아마추어 야구에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며 마츠키는 이후 다이토 제강을 떠났고, 1943년 군에 징집당해 [[오키나와]] 전선에 복무하던 중 1945년 전투중에 [[박격포]] 파편에 중상을 입고 미군에 포로로 잡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수용소 생활을 했다. == 지도자 시절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Kenjiro_Matsuki_1952-1953.jpg]] [[오사카 타이거스]]로 복귀한 마츠키(1953년) 수용소에서 풀려난 마츠키는 이전 직장인 다이토 제강에 복귀하여 근무하다가 가업인 철공소를 물려받아 사장으로 일하던 중, 1950년 구단의 요청으로 [[오사카 타이거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복귀하며 다시 야구계에 발을 들였다.[* 당시 마츠키의 아내는 남편이 출장을 간다길래 그러려니 했지만, 우연히 [[라디오]] 야구 중계를 듣다가 마츠키가 선수로 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라이트 노벨|철공소 사장인줄 알았던 우리 남편이 사실은 현역 프로야구 선수였다고?!]]~~] 다만 타석에 들어선 건 2년간 단 14번 뿐이었고 그 외엔 사실상 감독으로써만 임무를 수행했다. 1951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완전히 끝마치게 된다. 그 후 감독직에만 전념하며 팀을 이끌었지만 1954년 7월 25일, 경기 도중 팀의 중심타자인 [[후지무라 후미오]]가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을 폭행하여 퇴장 처분을 당하자 관객들이 그라운드에 난입하여 경기는 엉망이 되어버렸고[* 당시 후지무라는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이어가고 있던 중이라, 후지무라가 심판 멱살을 잡고 손찌검을 하자 출장정지 등 징계를 피하게 하고자 마츠키 감독이 직접 전면에 나서 심판의 허리를 부여잡고 다리를 거는 등 일부러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둘 다 퇴장에 출장정지 처분만 받았다.] 그날 시합은 오사카의 [[몰수 게임]] 패배로 처리되었다.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마츠키는 시즌 종료 후 [[오사카 타이거스]]의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다이에이 스타즈]]의 코치와 감독을 거쳐 1958년부터 60년까지 [[토에이 플라이어즈]]의 타격 코치를 지냈다. 토에이 타격 코치 시절인 1959년, 구단주 [[오카와 히로시]]로부터 새로 입단한 유망주 [[장훈(야구선수)|장훈]]을 "개막전에 4번타자로 즉시 투입할 수 있도록 키우라"는 엄명을 받고 장훈을 전지훈련 내내 맨투맨으로 달라붙어 지도하였다. 어릴 적 화상으로 불편한 장훈의 오른손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도 스윙만으로 오른손이 약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오른손 만으로 배트를 휘두르게 하고 샌드백을 두드리게 하는 등 오른손을 강화하는데 집중하는 한편으로 고교 시절 슬러거였던 장훈에게 프로에서 오래 살아 남으려면 확률높은 중거리 타자를 노리는 게 유리하다고 설득하여 자신의 특기였던 광각타법을 전수하는 데 힘썼다. 마츠키의 열정적인 지도에 힘입어 장훈은 입단 첫해부터 중심타선에서 맹활약하며 이후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로 남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961년 계약 만료로 마츠키가 팀을 떠난 이후에도 장훈은 슬럼프에 빠질 때 마다 마츠키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1961년부터 68년까지 [[NHK]] 야구해설가로 활동하였으며 1969~70년 시즌엔 [[토에이 플라이어즈]] 감독으로 야구계에 복귀했으나 눈에 띄는 성적은 거두지 못한채 1970년 시즌 도중 퇴임했다. == 말년 == 그라운드를 떠난 이후 [[TBS 테레비]]의 해설가로 일하였고, 1978년 [[야구전당]]에 입성했다. 1973년에 저서 "타이거즈의 성장 과정 - 한신구단사"를 출간하였는데, 당시 1리그 시대[* 1936년 프로 출범 후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로 분할된 1950년 이전의 시절]의 정보가 빈약했던 터라 마츠키의 저서는 야구계의 귀중한 자료로 남았고 이후 한신 타이거즈의 역사에 관한 책자나 자료는 거의 마츠키의 저서를 참고한 것이라 한다. [[한신 타이거즈]]가 구단 사상 최초로 일본시리즈를 제패한 1985년, 우승기념 파티에 전임 감독 자격으로 초대받은 바도 있다. 1986년 2월 21일 향년 7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 기타 == * 그는 현역 시절 [[교진군]]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이를 가는 안티 교진의 화신이었다. 이는 다이렌 실업단 시절 만주 순회경기 때 맞붙은 [[사와무라 에이지]]에게 3타석 연속 삼진을 당한 울분에서 비롯되었다고. * 힘이 장사여서 1킬로그램이 넘는 연습용 배트를 젓가락 다루듯 했고 싸움에도 능하여 경기중 [[벤치 클리어링|난투]]가 벌어지면 항상 선봉장으로 나서곤 했다. 특히 상대가 [[교진군]]이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지라 교진 선수들은 전부 마츠키를 진정으로 두려워 했다. * [[한국프로야구]] 출범 당시 내한하여 서울에서 세미나를 가진 적도 있다. [각주]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일본의 야구감독]][[분류:1909년 출생]][[분류:1936년 데뷔]][[분류:1951년 은퇴]][[분류:1986년 사망]][[분류:츠루가시 출신 인물]][[분류:메이지대학 출신]][[분류:좌투좌타]][[분류:내야수]][[분류:한신 타이거스/은퇴, 이적]][[분류:일본야구전당 헌액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