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바야돌리드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CE2B2B><:>{{{#gold {{{+3 바야돌리드 (카스티야이레온) [br] Valladolid}}}}}}|| ||<-3><:> [include(틀:지도, 장소=스페인 바야돌리드 주)] || ||||<#CE2B2B><:>{{{#gold {{{+3 바야돌리드 (바야돌리드) [br] Valladolid}}}}}}|| ||<-3><:> [include(틀:지도, 장소=스페인 바야돌리드)] || [[스페인어]]: Valladolid [목차] == 개요 == [[스페인]] 중서부의 도시. 인구는 310,000명으로 스페인에서 13번째로 큰 도시고 레온-카스티야 주의 사실상 주도 역할을 하는 도시다. 피수에르가 강과 에스구에바 강의 합류점 부근에 위치해 있고 도시 이름은 이슬람 아밀의 거주지를 나타내는 벨라드울리드에서 유래되었다. 1469년에 [[스페인 왕국]]의 발단이 된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간의 결혼식이 치러졌고 이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수도가 되는 등 중근세 스페인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세기 ~ 17세기의 문화 유산이 많이 남아있는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도시로 콜럼버스 박물관이 유명하다. == 역사 == 상고대에는 켈트-이베리아 (셀티베로) 족이 거주했고 로마 시대에 소규모 병영 도시가 있었다. 기독교화가 이루어지고 [[서고트 왕국]]을 거쳤다가 [[우마이야 왕조]]의 정복과 이슬람의 도래로 [[레콘키스타]] 초기에 황폐화되었다. 920년에 [[레온 왕국]]의 군주 [[오르도뉴 2세]]는 시민들을 [[레온]] 쪽으로 이주시켜 무슬림 세력인 [[후우마이야 왕조]]와의 완충 지대를 만들었다. 이후 1072년에 기독교도들이 궁전 등을 세우고 도시를 재건하였다. 바야돌리드는 12세기 ~ 13세기를 거치며 무역 특권을 얻어 번영했다. 1346년에는 바야돌리드 대학이 문을 열었고 1469년 10월에는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이사벨 1세]]의 결혼식이 치러져 스페인의 단합이 이루어졌다. 1506년에는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끝까지 자신은 인도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면서-- 사망한 도시가 되었다. 현재 그 위치에 콜럼버스 박물관이 있다. 1527년에는 유럽을 호령할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펠리페 2세]]가 태어났다. 바야돌리드는 15세기 ~ 16세기 전반에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가 되어 자주 의회가 열렸는데 1550년에는 종교계와 정치계 간의 누에보 에스파냐(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의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오]])에 대한 인권을 논의한 [[바야돌리드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585년에는 대성당이 완성되었다. 1591년에 도심을 덮친 화재로 쇠퇴하던 바야돌리드는 펠리페 2세의 명으로 복구되었고 [[펠리페 3세]] 시기인 1601년 ~ 1606년간 [[이베리아 연합]]의 공식 수도 역할을 수행했다. 19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 전쟁]] 시에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 군대가 도시를 폭격, 방화해 구시가지의 상당 부분이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스페인 내전]] 시에는 [[프란시스코 프랑코|프랑코]]와 군부의 거점이 되었다. 20세기 중반부터 식품가공, 섬유, 기계, 화학비료, 철강, 자동차 등의 산업이 발달한 공업 도시로 변모해 현재에 이른다. == 기타 == 15세기 ~ 17세기 동안 지어진 성당, 궁전, 학교들은 지금도 여행객들의 시선을 끈다. 1585년의 대성당과 성 그레고리오 교회(1480년 ~ 1496년)가 두드러진다. [[라리가]]에 소속된 [[레알 바야돌리드]]의 연고지기도 하다. [[스페인 내전]] 당시 내전 발발과 동시에 국민파 진영에게 넘어가고 공화파가 단 한번도 탈환하지 못했다. 이 시절 역사적 영향으로 인해 요즘 와선 점점 변하는 추세지만 한동안 [[인민당(스페인)|인민당]], [[복스(정당)|복스]] 등 보수 우익 일색이었던 지방이라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파차돌리드(fachadolid, 파쇼+바야돌리드)'란 멸칭이 붙기도 했다. 마드리드 고속도로 밖 [[전몰자의 계곡]] 정도로 존재감 쩔며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6/Monumento_de_On%C3%A9simo_Redondo_%28Valladolid%29.jpg|대놓고 파시스트 정권 선전물라고 광고하는 듯한]] 바야돌리드 바로 근처 언덕 위에 있던 팔랑헤 지도자 오네시모 레돈도 기념비도 2016년이나 돼서야 철거되었다. 역사적으로 카스티야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고, 유적도 많이 남아 있고, 스페인이 가장 최근에 겪은 전국적 전쟁의 참화인 [[스페인 내전]]의 피해도 크지 않은데 도시 경관 전반은 역사적 유물들이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현대 와서 대충 때려 지은 못생긴 싸구려 건물들이 조망을 가린다고 스페인 사람들 끼린 가장 보기 흉측한 도시 중 하나, 역사적 매력을 못 살리는 도시 중 하나로 꼽히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사실 바야돌리드도 도심으로 들어가보면 중세에서부터 내려온 수백 년 역사를 간직한 성당, 건물들이 많은데 이웃인 [[부르고스]], [[톨레도]], [[살라망카]], [[세고비아]] 같은 곳들은 당장 시내 중심부터 중세, 근세에 조성된게 눈에 확 띄는 반면, 바야돌리드는 도시 안으로 직접 들어가야 그 역사성을 체감할 수 있다.[* [[카스티야]], [[레온#s-2.2|레온]] 지방 자체가 역사는 깊고, 근대화에선 소외돼서 이런 문화 역사적 유물이 굉장히 풍부한데, 이 와중에서도 끝판왕은 아예 중세 성곽 자체가 완전 100% 보전되 있고, 전 세계에서 한 구간도 안 끊기고 중세 도시 외벽 전체가 남아 있는걸로 세계 기록을 달성한 [[아빌라]]이다.] 크게 원인을 찾아 보자면 스페인 내전은 비껴갔다 한들 그 이전 19세기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집중적인 피해를 받은 곳이기도 했고, 20세기 후반 지역 자체가 우경화 되면서 유적이나 문화재를 함부로 땅투기, 돈놀이로 삼은 인민당 일색 지방 정부의 탓이기도 한데, 비슷하게 가장 흉측한 도시로 꼽히는 [[우엘바]], [[알바세테]], [[시우다드 레알]] 같은 곳들은 거의 역사적 존재감이 없다가 19~20세기 들어서 급하게 조성된 도시라 이런 곳들과 비교당한다는거 자체가 바야돌리드 사람들(vallisoletano, 바이솔레타노)들에겐 상당히 굴욕적인 사실이다. [[분류:스페인의 도시]][[분류:스페인의 옛 수도]]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