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박징원의 처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조선의 왕녀/중종 ~ 철종)] ---- ||<-2> '''조선 광해군의 왕녀[br]{{{+1 박징원의 처 | 朴澂遠의 妻}}}''' || || '''출생''' ||[[1619년]]^^([[광해군]] 11년)^^ [[6월 23일]]|| || '''사망''' ||[[1664년]]^^([[현종(조선)|현종]] 5년)^^ [[11월 1일]][br]{{{-2 (향년 46세)}}} || || '''부왕''' ||[[광해군]] || || '''생모''' ||폐[[귀인 윤씨]] || || '''자녀''' ||'''슬하 2남 3녀''' 장녀 - 박일애(朴一愛, {{{-3 1645 ~ ?}}}) 차녀 - 박이애(朴二愛, {{{-3 1649 ~ ?}}}) 3녀 - 박삼애 (朴三愛, {{{-3 1650 ~ ?}}}) 장남 - 박태구(朴泰龜, {{{-3 1654 ~ ?}}}) 차남 - 박성구(朴聖龜, {{{-3 1656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제15대왕 [[광해군]]과 [[귀인 윤씨(광해군)|폐귀인 윤씨]]의 딸. [[광해군]]의 유일한 딸이자 서출자식으로 [[인조반정]] 후 박징원에게 시집을 갔다. == 생애 == 1619년 6월 23일, 당시 정2품 소의였던 [[귀인 윤씨(광해군)|윤씨]]에게서 태어났다.[* 《울진 나곡리 왕녀아기씨태실비(王女阿只氏胎室碑)》] [[광해군]]이 당시로서도 아주 늦은 나이인 44세에 얻은 늦둥이 딸이자 고명딸로 온 왕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어린시절을 보낸다. [* [[광해군]] 슬하에 당시 딸은 없었으나 [[폐세자 이지|폐세자]]의 후궁이 낳은 서손녀와 폐세자빈이 낳은 적손녀가 있었다. 적손녀는 일찍 죽고 서손녀는 뒷날 의성김씨 김문거에게 시집을 간다.] 1623년, 5살이었을 때 [[인조반정]]이 일어나 옹주 작위를 받지 못하였다. [[광해군|아버지]]는 폐위되어 귀양을 가고 어머니는 사형을 당해 외삼촌의 집에서 자랐다. 그 후, [[인조]]에게 재산을 받으며 지내다[* "폐인 지의 딸과 [[광해군|광해]]의 궁인이 낳은 딸이 장성할 때까지 해조에서 요미(料米)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인조 2년 3월 26일 경진 1번째기사》][* 쌀 10석과 콩 5석 및 각종 찬물(饌物)을 [[광해군]]의 딸에게 주어 제수(祭需)를 갖추게 할 것을 명하였다. -《인조 19년 9월 17일 경인 3번째기사》] 1643년에 [[광해군]]의 3년상을 마치고나서야 [[음성 박씨|박징원]](1625 ~ 1690)과 혼인을 할 수 있었는데 나이가 25살이었다.[* 해조에 명하여 [[광해군]]의 딸에게 혼수(婚需)를 주게 하였는데 바로 [[귀인 윤씨|폐숙의 윤씨]](廢淑儀 尹氏)의 소생이다. [[광해군|광해]]가 쫓겨난 뒤 그의 딸이 외삼촌집에 의지해 있으면서 나이가 20세가 되어도 감히 혼사를 의논하지 못하였었다. [[광해군|광해]]가 죽은 뒤에 상이 [[광해군|광해]]의 본궁(本宮)에 살게 하고 전택(田宅)과 노비를 넉넉히 주어 [[광해군|광해]]의 제사를 받들게 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상기(喪期)가 끝났으므로 이 명을 내린 것이다. -《인조 21년 4월 18일 신사 1번째기사》] 박징윈과의 사이에서 2남3녀를 낳았는데 처음 딸만 연이어 셋을 낳는바람에 박징원이 첩을 들여 아들을 보았다. 광해군의 유일한 혈육[* [[폐세자 이지]]는 일찍 죽었을 뿐더러 [[폐세자 이지|이지]]의 자식으로는 적녀 1명, 서녀 2명이 있었는데 적녀는 아기때 죽고 서녀는 1명만 장성하였다.]인지라 [[광해군]]의 제사는 옹주의 후손들이 주관하게 되었고 1717년, 민진후가 옹주의 후손들을 녹용해야한다고 건의하자 [[숙종(조선)|숙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광해군|광해주]](光海主)의 외손(外孫)으로서 [[광해군|광해주]]의 제사를 봉행(奉行)하여 온 사람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민진후(閔鎭厚)가 임금에게 건백(建白)하기를, "연산주(燕山主)의 황음(荒淫)과 무도(無度)함은 이전의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가 드문데도 그의 외손(外孫)으로서 제사를 봉행하여 온 사람을 특별히 녹용(錄用)하였으니, 인후(仁厚)한 성덕(聖德)이 천고에 탁월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광해주(光海主)의 외손(外孫)으로서 제사를 봉행하여 온 사람에게는 아직껏 녹용(錄用)하는 거조가 없었다 하니, 이는 필시 우연히 살피지 못했던 소치일 것입니다. 마땅히 똑같이 녹용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숙종(조선)|임금]]이 마침내 해조(該曹)에 분부(分付)하여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숙종 43년 7월 4일 병진 3번째기사》] 1664년 11월 1일에 사망하였다.[* [[광해군]]의 딸이 졸하였다.【[[광해군|광해]]는 곧 폐주(廢主)이다.】상이 호조에 명하여 장례 물품을 넉넉히 주게 하였다. -《현종 5년(1664년 청 강희(康熙) 3년) 11월 1일 )무자)》][* 묘비에는 10월 29일에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옹주가 사망한 뒤, 박징원은 [[전주 이씨]]와 재혼하였다. == 대중매체 == * [[보쌈-운명을 훔치다]]- [[유리(소녀시대)|권유리]] 박징원의 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로 이름은 이수경(水鏡). 드라마 상에서는 광해군 재위시절 이미 성년이 되어 "화인"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분류:조선의 왕녀]][[분류:1619년 출생]][[분류:1664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