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백년전쟁 (r3 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백년전쟁]]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다큐멘터리, rd1=민족문제연구소, other2=컴투스에서 개발한 동명의 게임, rd2=, rd2_1=서머너즈 워 : 백년전쟁, other3=아바타 아앙의 전설의 배경, rd3=백년전쟁(아바타 아앙의 전설))] || '''{{{#000 백년 전쟁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영불관계 관련 문서)] ---- [include(틀:프랑스의 대외전쟁)] ---- [include(틀:잉글랜드 왕국의 대외전쟁)] ---- }}} || ---- ||<-3><#C0C0FF><:>{{{+3 '''백년 전쟁''' }}}{{{-1 百年戰爭}}}[br]{{{-1 Hundred Years' War(영어)}}}[br]{{{-1 Guerre de Cent Ans(프랑스어)}}}|| ||<:><#C0C0FF> '''시기''' ||<-2>[[1337년]] [[5월 24일]] ~ [[1453년]] [[10월 19일]](116년) || ||<:><#C0C0FF> '''장소''' ||<-2>[[프랑스]], [[잉글랜드]], [[이베리아]], [[저지대]] || ||<:><#C0C0FF> '''원인''' ||<-2>아키텐의 종주권을 가진 프랑스 국왕과 아키텐 공작이자 대등한 주권자인 잉글랜드 국왕 간의 영토분쟁. || ||<#C0C0FF><:>'''교전국'''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width=20]] '''[[발루아 왕조]]'''[br][[파일:800px-Royal_Arms_of_the_Kingdom_of_Scotland.svg.png|width=20]] [[스코틀랜드 왕국]][br][[파일:800px-Coat_of_Arms_of_John_of_Bohemia_(the_Blind)_as_King_of_Bohemia_and_Count_of_Luxembourg.svg.png|width=20]] [[보헤미아 왕국]][br][[파일:800px-BlasonLorraine.svg.png|width=20]] 로렌 공국[br][[파일:800px-Armoiries_Majorque.svg.png|width=20]] 마요르카 왕국[br][[파일:800px-Evolution_Coat_of_Arms_of_Navarre-3.svg.png|width=20]] [[나바라 왕국]]→[br][[파일:800px-Royal_Coat_of_Arms_of_the_Crown_of_Castile_(1284-1390).svg.png|width=20]] [[카스티야 연합 왕국]][br][[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45px-Armoiries_G%C3%AAnes.svg.png|width=20]] [[제노바 공화국]] ||[[파일:1280px-Royal_Arms_of_England.svg.png|width=20]] '''[[플랜태저넷 왕조]]'''[br][[파일:800px-Arms_of_the_Prince_of_Wales_(Ancient).svg.png|width=20]] 웨일스 공국[br][[파일:가스코뉴 공작 문장.svg|width=20]] 가스코뉴 공국[br][[파일:800px-Arms_of_Aquitaine_and_Guyenne.svg.png|width=20]] 아키텐 공국[br]←[[파일:800px-Blason_de_Bretagne.svg.png|width=20]] 브르타뉴 공국[br]←[[파일:800px-Arms_of_Flanders.svg.png|width=20]] [[플란데런 백국]][br][[파일:800px-Hainaut_Modern_Arms.svg.png|width=20]] 에노 백국[br]←[[파일:800px-Arms_of_Philippe_le_Bon.svg.png|width=20]] [[부르고뉴 공국]]|| ||<:><#C0C0FF> '''지휘관[br](1337 ~ 1360)''' ||[[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width=20]] '''[[필리프 6세]]'''[br][[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width=20]] [[장 2세]][br][[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width=20]] [[샤를 5세]][br][[파일:800px-Blason_famille_Quieret_de_Fransu.svg.png|width=20]] 위그 키에레†[br][[파일:800px-Armoiries_Brienne-Eu.svg.png|width=20]] 라울 2세 드 브리엔☠[br][[파일:800px-Alençon_Arms.svg.png|width=20]] 샤를 2세 달랑송†[br][[파일:800px-Philippe_de_France,_comte_de_Poitiers.png|width=20]] 필리프 도를레앙[br][[파일:220px-Arms_of_Philippe_le_Hardi.svg.png|width=20]] 용담공 필리프[[포로|◎]][br][[파일:800px-Arms_of_Robert_de_Clermont.svg.png|width=20]] 피에르 1세 드 부르봉†[br][[파일:800px-Armoiries_Famille_Brienne.svg.png|width=20]] 월터 6세[br][[파일:800px-Blason_Guy_Ier_de_Clermont_de_Nesle.svg.png|width=20]] 장 드 클레르몽†[br][[파일:800px-Douglas_Arms_2.svg.png|width=20]] 윌리엄 더글러스[br][[파일:800px-Arms_of_the_House_of_la_Cerda.svg.png|width=20]] 샤를 드 라 세르다[br][[파일:800px-Coat_of_Arms_of_John_of_Bohemia_(the_Blind)_as_King_of_Bohemia_and_Count_of_Luxembourg.svg.png|width=20]] [[얀 루쳄부르스키]]†[br][[파일:800px-BlasonLorraine.svg.png|width=20]] 루돌프†[br][[파일:800px-Arms_of_Flanders.svg.png|width=20]] 루이 1세 [br][[파일:Arms_of_Blois.png|width=20]] 루이 2세 드 샤티용†[br][[파일:800px-Royal_Arms_of_the_Kingdom_of_Scotland.svg.png|width=20]] 다비드 2세[br][[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45px-Armoiries_G%C3%AAnes.svg.png|width=20]] 안토니오 도리아||[[파일:410px-Royal_Arms_of_England_(1340-1367).svg.png|width=20]] [[에드워드 3세]][br][[파일:800px-Arms_of_the_Prince_of_Wales_(Ancient).svg.png|width=20]] '''[[흑태자 에드워드]]'''[br][[파일:800px-Arms_of_the_House_of_de_Bohun.svg.png|width=20]] 윌리엄 드 보훈[br][[파일:800px-Arms_of_Edmund_Crouchback,_Earl_of_Leicester_and_Lancaster.svg.png|width=20]] 랭커스터의 헨리[br][[파일:800px-Arms_of_John_III_of_Grailly.svg.png|width=20]] 장 3세 드 그레일리[br][[파일:800px-Thomas_de_Beauchamp_Arms.svg.png|width=20]] 토머스 뷰챔프[br][[파일:800px-Thomas_de_Beauchamp_Arms.svg.png|width=20]] 기 드 뷰챔프 2세[br][[파일:800px-MontaguArms_Unquartered.png|width=20]] 윌리엄 몬타구[br][[파일:800px-Blason_Jean_Chandos.svg.png|width=20]] 존 챈더스[br][[파일:800px-Blason_province_fr_Artois.svg.png|width=20]] 아토이스의 로버트 3세[br][[파일:800px-Neville_arms.svg.png|width=20]] 랄프 네빌[br][[파일:800px-Modern_arms_of_Percy.svg.png|width=20]] 헨리 퍼시 || ||<:><#C0C0FF> '''지휘관[br](1369 ~ 1389)'''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width=20]] '''[[샤를 5세]]'''[br][[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width=20]] '''[[샤를 6세]]'''[br][[파일:발루아부르고뉴 문장(1364-1404)-2000px.png|width=20]] 용담공 필리프[br][[파일:800px-Blason_Maison_de_Sancerre.svg.png|width=20]] 루이 드 상세르[br][[파일:800px-Blason_du_Guesclin.svg.png|width=20]] [[베르트랑 뒤 게클랭]][br][[파일:800px-Blason_Clisson.svg.png|width=20]] 올리비에 드 클리송[br][[파일:800px-Blason_Jean_de_Vienne,_Amiral_de_France.svg.png|width=20]] 장 드 비엔느[br][[파일:Blason_Castille_Léon.svg.png|width=20]] 암브로시오 보카네그라 ||[[파일:410px-Royal_Arms_of_England_(1340-1367).svg.png|width=20]] '''[[에드워드 3세]]'''[br][[파일:800px-Arms_of_the_Prince_of_Wales_(Ancient).svg.png|width=20]] '''[[흑태자 에드워드]]'''[br][[파일:410px-Royal_Arms_of_England_(1340-1367).svg.png|width=20]] '''[[리처드 2세]]'''[br][[파일:800px-Arms_of_John_of_Gaunt,_1st_Duke_of_Lancaster.svg.png|width=20]] 곤트의 존[br][[파일:800px-Arms_of_Edmund_of_Langley,_1st_Duke_of_York.svg.png|width=20]] 랭글리의 에드먼드[br][[파일:800px-Arms_of_John_III_of_Grailly.svg.png|width=20]] 장 3세 드 그레일리[br][[파일:800px-Arms_of_Knollys_(Knolles,_Knowles).svg.png|width=20]] 로버트 놀스 || ||<:><#C0C0FF> '''지휘관[br](1415 ~ 1453)'''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width=20]] '''[[샤를 6세]]'''[br][[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width=20]] '''[[샤를 7세]]'''[br][[파일:잔 다르크 문장.svg|width=20]] '''[[잔 다르크]]'''‡[br][[파일:800px-Arms_of_the_Dauphin_of_France.svg.png|width=20]] [[루이 11세]][br][[파일: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Arthur_de_Richemontt.png|width=20]] [[아르튀르 드 리슈몽]][br][[파일: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Jean_d'Orléans_(argent).png|width=20]] 장 드 뒤누아[br][[파일:800px-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La_Hire.svg.png|width=20]] [[라 이르]][br][[파일:800px-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Jean_Poton_de_Xaintrailles.svg.png|width=20]] 장 포통 드 생트라유[br][[파일:800px-Armes_alençon_moderne.png|width=20]] 장 2세 달랑송[br][[파일:800px-Blason_Riom-ès-Montagnes_15.svg.png|width=20]] 앙투안 드 샤반[br][[파일:800px-Armes_bourbon_moderne.png|width=20]] 샤를 드 부르봉[br][[파일: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Ambroise_de_Loré.png|width=20]] 앙브루아즈 드 로레[br][[파일:800px-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Jean_de_Brosse.svg.png|width=20]] 장 드 브로세[br][[파일:800px-Blason_JeanBureau.svg.png|width=20]] 장 뷔로[br][[파일: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Gilbert_Motier_de_La_Fayette.png|width=20]] 질베르 모티에 드 라 파예트[br][[파일:800px-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Gilles_de_Rais_(augmentées).svg.png|width=20]] '''[[질 드 레]]'''[br][[파일:800px-Coat_of_arms_of_Charles_dAlbret.svg.png|width=20]] '''샤를 달브레'''†[br][[파일:800px-Boucicaut.svg.png|width=20]] 장 2세 르 맹그르[br][[파일:800px-Armes_Ducs_d'Orléans.png|width=20]] 샤를 1세 도를레앙[br][[파일:800px-Blason_John_Stuart_(2e_comte_de_Buchan).svg.png|width=20]] 존 스튜어트†[br][[파일:800px-Douglas_Arms_2.svg.png|width=20]] 아치발드 더글러스†[br][[파일:800px-Blason-John-Stuart-of-Darnley.svg.png|width=20]] 단리의 존 스튜어트†||[[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width=20]] '''[[헨리 5세]]'''[br][[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width=20]] [[헨리 6세]][br][[파일:800px-Arms_of_John_of_Lancaster,_1st_Duke_of_Bedford.svg.png|width=20]] 랭커스터의 존[br][[파일:800px-Arms_of_Thomas_of_Lancaster,_1st_Duke_of_Clarence.svg.png|width=20]] 랭커스터의 토머스[br][[파일:800px-Arms_of_Humphrey_of_Lancaster,_1st_Duke_of_Gloucester.svg.png|width=20]] 랭커스터의 험프리[br][[파일:800px-Arms_of_Edward_of_Norwich,_2nd_Duke_of_York.svg.png|width=20]] 노리치의 에드워드†[br][[파일:800px-Richard_of_York,_3rd_Duke_of_York_(Variant).svg.png|width=20]] [[요크의 리처드]][br][[파일:800px-Arms_of_Thomas_Beaufort,_1st_Duke_of_Exeter_moderne.svg.png|width=20]] 토머스 보퍼트[br][[파일:800px-Arms_of_Thomas_Beaufort,_1st_Duke_of_Exeter_moderne.svg.png|width=20]] 에드먼드 보퍼트[br][[파일:800px-Montacute_Arms.svg.png|width=20]] 토머스 몬타구†[br][[파일:800px-Talbot_arms.svg.png|width=20]] 존 탈보트†[br][[파일:1200px-Blason_John_Fastolf.svg.png|width=20]] 존 패스톨프[br][[파일:800px-Blason_Thomas_de_Scales.svg.png|width=20]] 토머스 스케일스[br][[파일:800px-Arms_of_De_La_Pole.svg.png|width=20]] 윌리엄 드 라 폴[br][[파일:Armoiries_Jean_de_Luxembourg-Ligny.png|width=20]] 장 2세 드 룩셈부르크[br]←[[파일:800px-Arms_of_Philippe_le_Bon.svg.png|width=20]] [[선량공 필리프]] || ||<:><#C0C0FF> '''결과''' ||<-2>[[발루아 왕조]]의 최종 승리.[br][[칼레]]를 제외한 잉글랜드의 프랑스 대륙 영토 상실. || ||<:><#C0C0FF> '''영향''' ||<-2>[[잉글랜드 왕국]]의 [[장미 전쟁]] 발발.[br][[봉건제]]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 || [목차] [clearfix] == 개요 == 백년 전쟁은 중세 서유럽의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중세 유럽의 역사구분을 간단히 나누었을 때, ([[라벤나 함락|서로마 멸망]])-[[프랑크 왕국]]-[[이교도 대군세|바이킹 지배]]-[[십자군 원정]]에서 이어지는 큰 변환점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의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여,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자본의 이동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발전을 일으키는 대대적인 변혁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 전쟁이다.[* 같은 시기 동유럽에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멸망]]하면서 큰 변화를 겪는다.] 근대까지도 이 둘의 자존심 대결은 유럽 분쟁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프랑스는 흑사병 이전을 기준으로 인구 1600만 이상의 강대국이었고[* 1328년 프랑스 왕실 재무부는 과세 대상 가구 조사에서 세금이 면제된 대귀족과 왕족들의 영지를 제외하고 2만 4천 개 교구의 247만 가구를 집계했다], 잉글랜드는 인구가 프랑스의 절반도 안되는 500만 정도인 데다 한때 이웃 왕국인 [[스코틀랜드]]한테도 털리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했다. 그러나 이때의 실전 경험으로 쌓은 용병술을 통하여 프랑스군과 승리할수 있었는데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내부를 휘저으며 돌아다녔고, 프랑스의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며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비교적 빠른 시기인 [[장 2세]] 치세부터 군제개혁을 시작해서 136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기동전술을 잉글랜드군보다 잘 구사했고,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해서 한타를 걸어오는 잉글랜드군을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1370년 퐁발랑(Pontvallain)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면서 크레시 전투 이후 24년간 지속된 잉글랜드군의 야전 무적 신화를 종결시켰다. 이름은 백년 전쟁이지만 양국이 116년 동안 지속해서 싸우지는 않았고, 단지 처음 선전포고를 한 1337년 이래 완전한 종전 선언이 발표되기까지 116년이나 걸렸다. 중간에 몇 차례 휴전과 종전이 있었다. 시작은 보통 가스코뉴 지방에서 벌어진 전면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기 구분에서 1360년의 휴전까지를 1기로 두는 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가끔 1380년대로 두는 케이스도 있는데 이런 경우엔 간헐적인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흑태자 에드워드의 사망을 휴전기의 기준으로 한 것. 그러나 이후 구분이 문제인데, 심재윤의 《서양중세사의 이해》는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2기(잉글랜드 우위)와 3기(프랑스 우위)를 가르고 있고, 위키피디아와 Osprey 출판사는 1429년 잔다르크의 활약을 계기로 2, 3기와 4기를 가른다.[* 이는 중간기를 길게 잡았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는 1369년부터 1389년까지를 프랑스가 영토를 탈환하는 2기, 이후 잠시 휴전기를 두었다가 1415년부터 1429년을 잉글랜드 재우세의 3기로 보고 있고(즉, 사실상 다섯 국면의 구분이다), Osprey 출판사는 헨리 4세의 즉위년인 1399년을 기준으로 2기와 3기를 가르고 있으나 이는 잉글랜드적인 기준에 가깝다.] 끝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1396년[* 아르들 회의가 있던 해.]과 양측의 왕이 모두 사망한 1422년을 기준으로 나누고 있다. [[http://blog.gorekun.com/1347|#]] 뒤에 보듯 휴전으로 취급되는 여러 기준도 1340년~1355년도, 1375년, 1396년도 등이 있어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다. 비슷한 개념으로 [[17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9년 전쟁]](일명 팔츠계승전쟁)-[[스페인 왕위계승전쟁|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미국 독립전쟁]]-[[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이어진 양국 간의 충돌을 제2차 백년 전쟁(1701~1815)[* [[루이 14세]] 시절부터 [[나폴레옹 1세]]가 프랑스에서 쫓겨날 때까지 114년의 기간을 자랑한다.]으로 부르기도 하나, 잉-프 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전쟁들은 잘 통용되지 않는다. == 배경 == 전쟁의 단초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 === 가스코뉴의 주권 (1259~1327) === [[파일:Gascony around 1300.png |width=60%]] >이들의 크고도 좋은 사무실은 궁전 북벽에 특별한 출입문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여기에서 처리되는 까다로운 업무들이 고도의 평온함과 완벽한 칩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고등법원 판사들이라고 부르는 언제나 깨어있는 노련한 인사들이 그들의 법정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법과 관습법에 대한 확실한 지식들로 노련하고도 관대하게 소송들에 대해 논의하고 결정적 선고를 벼락같이 내리친다. 이 선고들은 어느 누구도 또 어느 배석자들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신과 법에 대한 관조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백한 자들과 정의로운 자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플랜태저넷 왕조|악한 자들과 불경한 자들]]은 자신들의 불공정함에 비례하여 고난과 불행에 빠져들게 된다. >---- >장 드 장덩 저, 홍용진 역, '파리 예찬', 1322 >13세기와 14세기 초 프랑스 국왕들은 서서히, 그러나 가차 없이, '''어쩌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종주권(suzerainty)을 주권(sovereignty)으로 승격시키고, 공작의 영주권(lordship)을 지주권(landlordship)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 >Kenneth Alan Fowler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윌리엄]]이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이후 잉글랜드의 국왕은 왕이긴 한데 프랑스 왕의 신하기도 하다는 기묘한 위치였다. 이는 프랑스 왕국의 봉작인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프랑스의 봉신인 것이며, 잉글랜드 국왕이라는 직위가 프랑스의 국왕보다 하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래도 12세기 중반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봉건제]]'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작 중세인들은 '중세 봉건제'라는 개념을 알지도 못했고, 봉건제(feudalism)라는 용어는 1800년경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당시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불합리한 과거의 관습이나 사회현상은 전부 봉건제라고 불렀다. 당장 '봉건계약'의 종류가 위키백과 목록에 있는 것만 해도 수십 개는 되는 이유다. 따라서 '중세시대에는 봉건제 때문에 이러이러한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일이 있었다'는 식의 설명은 대개 선후관계가 뒤바뀐 설명이다.] 단순히 이전까지는 [[카페 왕조]]의 권위가 일드프랑스를 넘어서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이 7세]]와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나 [[리처드 1세]]에게 감히 신하로서 신서를 하거나 부조를 바치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하지만 1200년 [[존 왕]]이 필리프 2세에게 신서를 하고 프랑스 영토에 대한 대가로 2만 마르크를 바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얼마 뒤 존 왕이 대륙 영토를 한방에 다 잃어버리는 대사건이 벌어지면서 거의 반세기 동안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헨리 3세]]는 1259년 파리 조약으로 가스코뉴의 영토를 보장받는 대신 신서를 다시 시작했고, 그렇게 잉글랜드의 왕들은 프랑스 땅의 영주로서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었다. 노르망디 공작위는 몰수당했지만 [[가스코뉴]]의 일부 영토와 함께 아키텐 공작으로서의 지위가 남아 있었다. 가스코뉴 지방은 아키텐 영지의 일부로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상속녀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이 지방을 가져갔다. 12세기까지만 해도 북쪽의 푸아투에 비하면 가난하고 낙후된 지방이었지만 존 왕이 가스코뉴를 제외한 대륙 영토를 전부 잃은 뒤로 잉글랜드의 와인 수요를 독점하면서 이후 100년 동안 꾸준히 개발이 이루어졌다. 특히 다섯 개의 강과 바다가 교차하는 지점을 통제하는 최요충지에 위치한 보르도 시는 바다를 통한 곡물 수입과 와인 수출에 의존하는 내륙 도시들의 목숨줄을 대놓고 쥐고 있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왕들은 보르도 시민들의 충성심만 유지해도 지역 전체를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고, 들인 노력에 비해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보르도 시의 면적은 100년 사이 3배까지 늘어났으며 가스코뉴에서 왕실이 얻은 수입은 1307년 17000파운드, 1324년 13000파운드로, 평시에 13000파운드 정도[* 전시에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서 최대 8배까지 늘릴 수 있었다.]였던 잉글랜드 양모 관세 수입과 비슷했다. 그러나 13세기와 14세기초 프랑스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면서 가스코뉴의 영지는 단지 평생에 한두 번 자존심을 굽히고 프랑스 왕에게 찾아가서 신서를 하는 것 이상의 가혹한 대가를 잉글랜드 왕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갈등의 핵심은 프랑스 왕이 아키텐의 주권자로서 가진 사법권이었다. 로마법의 영향을 받은 중세 후기의 국가이론에 의하면 프랑스 왕의 신하인 가스코뉴인들은 왕의 대관이 주재하는 지방의 국왕법정이나 1270년대에 확립된 파리고등법원에 항소를 제기할 권리를 가졌고, 프랑스의 왕은 항소를 수리하고 봉신인 아키텐 공작을 법정에 소환할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아키텐의 공작일 뿐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이기도 한 그들에게 프랑스 왕의 법정에 출두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피해야 하는 굴욕이었다. 가스코뉴인들은 프랑스 왕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헨리 3세 이후로 외국인이나 다름없어진 공작들[* 에드워드 1세는 전쟁을 제외하면 2년 머물렀고, 후대의 왕들은 백년전쟁에서 패배하고 가스코뉴를 완전히 잃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에게 마음 깊이 충성하는 것도 아니라서 기회만 있으면 파리고등법원에 찔렀다[* 프랑스에서 가장 공정한 판결을 한다는 당시 파리고등법원의 선전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라서 1311년에는 작은 농촌 마을인 쿠슈의 주민들이 대귀족이자 왕의 측근인 부르고뉴 공작을 상대로 승소한 적도 있었다. 초기 파리고등법원은 귀족들의 법정과 경쟁 중이었는데, 다른 법정과 똑같다는 평판은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 왕의 대관들이 조사를 하기 위해 파견될 때마다 보르도에 있는 공작의 정부는 마비되었고 권위에 손상을 입었으며 재정적 피해가 발생했다. 결국 1293년 보르도와 바욘에서 반프랑스 폭동이 발생했고 프롱삭에서는 국왕의 세관원 4명이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필리프 4세]]는 가스코뉴에 대관들을 파견해서 폭동에 책임이 있는 도시 유력자들의 신병을 양도하라고 명령했고, [[에드워드 1세]]가 이를 거부하자 그를 파리고등법원에 소환했다. 에드워드가 소환 명령에도 불응하자 필리프는 에드워드에게 사실상 자치권은 인정할 것이니 왕으로서 위신을 지키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항복하고 대관과 일부 수행원들을 주요 도시에 입성시키라고 요구한다. 완벽하게 속은 에드워드는 이 거래를 받아들이고 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혼인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필리프는 애초부터 아키텐을 먹을 생각인터라 '수행단'의 행렬은 몇 주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에드워드에게 내린 소환 명령도 취소되지 않았다. 당연히 에드워드가 나타나지 않자 필리프는 공작령 몰수를 선언하고 가스코뉴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플랑드르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까지 엮이게 된 이 전쟁은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들이 플랑드르 반란군에게 예상 밖의 대패를 당하면서 정체 국면에 빠졌다. 이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은 보르도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프랑스 주둔군을 쫓아냈는데, 프랑스군은 보르도 시 없이는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03년 5월 평화조약이 맺어지면서 에드워드는 마침내 대륙 영토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상태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간신히 벗어났고, 1308년 [[에드워드 2세]]가 [[프랑스의 이자벨|이자벨 공주]]와 결혼하면서 일시적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에드워드가 이 전쟁에서 가스코뉴를 방어하는 데 소모한 전비는 총 40만 파운드로, 공작 정부의 10년치 수입을 훨씬 상회했다. 필리프는 비록 에드워드를 상대로는 판정승을 거두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왕과 파리고등법원 관료들의 선전과 달리 프랑스군은 무적이 아니며 다구리에 장사 없다는 한계를 노출시킴으로써 후대의 왕들에게 불안 요소를 남겨두었다.[* 프랑스에 비해 인구와 자원이 부족한 잉글랜드의 입장에서 최선의 방어는 공격. 즉 끝없이 밀려오는 프랑스군을 방어하다가 말라죽는 것보다는 사방에서 동맹을 끌어들이고 자신도 직접 프랑스 북부를 침공해서 파리와 일드프랑스를 위협함으로써 프랑스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어 전략이자 대전략이었다. 앞서 이 전략을 사용한 에드워드 1세는 간신히 현상을 유지하는 것에서 그쳤지만 손자인 [[에드워드 3세]]에게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통해 단련된 군사들과 [[발루아 왕조]]의 비교적 약한 정통성, 그리고 [[카를로스 2세(나바라 왕국)|나바라의 왕 샤를]]의 내부 트롤링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19세기경에는 (중세에 대한 전통적인 폄훼의 연장으로) 에드워드 3세와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에게는 전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백년 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의 거의 모든 군사작전은 약탈물에 대한 욕심과 개인의 기분에 따른 비이성적이고 즉흥적인 결정에 불과했다고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찰스 오만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68003877|The Art of War in the Middle Ages]]》가 대표적이다. 무려 1885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토크멘터리 전쟁사]] 같은 현대의 역사 교양프로에서도 오만의 평가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최근의 연구들은 장궁병이나 하마기사 같은 무기체계보다는 잉글랜드군의 [[https://gall.dcinside.com/m/rome/736013|행정 조직]]의 정교함과 군사작전의 전략적 타당성에 주목한다.] 프랑스 왕과 아키텐 공작 중 누구도 전쟁으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고, 가스코뉴는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파리고등법원이 항소를 수리하고 대관을 파견하고 반프랑스파가 폭동을 일으키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하지만 이제 관계의 주도권은 완전히 프랑스로 넘어갔고 시간은 프랑스 편이었다. 1313년 보르도의 파산한 공작 정부는 필리프 4세가 스스로 일으킨 전쟁으로 황폐화된 아키텐의 '폭력, 약탈, 무정부 상태'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들을 임명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323년 10월에는 내륙 개척지의 작은 마을인 생사르도스가 프랑스 왕의 특허를 받고 이주민을 끌어모으기 시작하자 노동력을 빼앗긴 것에 불만을 품은 지역 귀족 레몽 베르나르가 마을을 습격해서 불태우고 프랑스 왕의 대관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합리적 의심에 따라 프랑스인들은 모두 보르도의 공작 정부를 배후로 지목했고 [[샤를 4세]]는 에드워드 2세에게 책임자들을 넘기라고 요구한다. 에드워드와 그의 무능한 정부 고문들이 외교적 대응이건 전쟁 준비건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1324년 7월 공작위 몰수 선언과 함께 전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고작 1년도 안 돼서 아키텐 공작의 영토는 가스코뉴 서부 해안의 얇은 면으로 축소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결국 항복하고 1325년 8월 이자벨 왕비와 열두 살 된 어린 아들 에드워드를 파리로 보내서 샤를 4세에게 신서를 하게 했다. 하지만 이자벨 왕비는 외교 임무를 수행하는 대신 애인인 로저 모티머와 함께 프랑스에서 모집한 용병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온다. 그동안 잇따른 실정으로 런던시를 포함해 잉글랜드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지를 잃고 있었던 에드워드 2세는 한순간에 몰락하고 퇴위당한 뒤 1327년 9월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사망한다. === 프랑스 왕위 계승권 (1328~1331) === [[파일:Edward_III_Plantagenet_of_England_pays_homage.jpg |width=70%]] >에드워드가 스스로 프랑스의 왕이라고 주장할 바에야, 차라리 바빌론의 술탄이나 천국의 왕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 >로체스터의 익명의 연대기 작가. (Historia Roffensis: BL, Cotton MS Faustina B.V, fol.88) 왕위 계승권 문제는 기존 [[카페 왕조]]의 왕인 [[샤를 4세]](재위 1322~1328, 단려왕)가 직계 없이 6년 만에 사망하면서 시작된다. 이때 샤를의 뒤를 이을 후보로는 [[프랑스의 이자벨|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3세]], 그리고 사촌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살리카법]]은 여성이 포함된 가계로의 상속을 명시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에드워드의 계승권이 높다고 볼 수 있었지만, 굳이 살리카법을 확대해석하지 않더라도 프랑스 귀족들이 그를 거부해야 할 이유는 많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외국 이름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30년 가까이 프랑스의 왕과 귀족들과 대립했고 프랑스의 영토를 불법적으로 침공하거나 점령하기도 했다. 어머니인 이자벨은 왕족이지만 특유의 성격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인망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악명만 넘쳤다. 반면에 발루아의 필리프는 프랑스의 대귀족으로서 프랑스 귀족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었으며, 카페 왕조 말기의 위기 때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항상 솔선수범했던 리더로써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아버지 샤를[* 1325년 사망]의 후광을 입고 있었다. 결국 귀족들의 만장일치로 발루아의 필리프가 섭정이 되었고, 샤를 4세의 유복자를 임신한 왕비가 아들이 아닌 딸을 낳자 즉시 [[필리프 6세]]로 즉위하여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이자벨 왕대비가 보낸 사절단은 프랑스에 발을 딛자마자 잉글랜드로 쫓겨났으며, 그녀와 달리 프랑스에서의 이해관계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이었던 잉글랜드 귀족들은 의회에서 에드워드에게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라고 조언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1329년 9월 프랑스를 방문해 아키텐 공작으로서 필리프에게 신서를 함으로써 그를 프랑스 왕으로는 인정했지만, 의식 도중 손을 맞잡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공작령에 대해 그가 가진 주권을 부정했다. 이자벨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분명한 이 어설픈 반항에 대해 필리프는 1330년 7월까지 기한을 주고 완전한 신서를 다시 하지 않으면 공작령을 몰수하겠다고 경고했다. 예고한 기한이 지나자 필리프는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으며, 잉글랜드 왕실은 이번에는 진짜로 가스코뉴를 완전히 상실할 위험에 처한다. 결국 1330년 10월 로저 모티머를 축출하고 모후 이자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에드워드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멈추기 위해 이듬해 4월 신서를 다시 함으로써 필리프를 프랑스의 모든 영토에 대해 주권을 가진 명실상부한 프랑스 왕으로 인정했다. 필리프는 에드워드의 아버지(2세)는 명백히 반역죄를 저질렀으므로 과거 생사르도스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점령한 영토를 돌려줄 수는 없지만, 대신 올해 초의 군사원정으로 에드워드가 입은 피해는 배상하겠다고 관대하게 제안했으며, 에드워드는 필리프가 계획 중인 [[십자군]]에 동참하고 싶다고 대답함으로써 호의를 표했다. 이듬해 호아나 2세의 아들인 [[카를로스 2세(나바라 왕국)|나바라의 샤를]]이 태어나면서 에드워드의 계승권은 법적으로도 근거가 미약해졌다. 그렇게 프랑스 왕위 계승권 문제는 해결되는 듯 보였다. === 스코틀랜드 침공 (1332~1337) === [[파일:edward and balliol.jpg |width=35%]] >[[로버트 1세|로버트 경]]이 우리 민족을 구원했고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므로 우리는 왕국의 법과 그가 쌓은 공로 때문에 그를 신하로서 섬기며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따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시작했던 일을 포기하고 우리 왕국이나 민족을 잉글랜드 왕이나 잉글랜드인들에게 바치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지체 없이 그를 그 자신의 권리와 우리의 권리에 대한 배신자이자 우리의 적으로 규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왕으로 추대할 것입니다. '''고작 백 명의 스코트인이라도 남아있는 한, 우리는 절대 잉글랜드인들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영광도 부유함도 명예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자유, 의로운 사람이라면 목숨을 버릴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 >아브로스 선언, 1320년 >프랑스의 필리프 왕은, 잉글랜드의 왕이 스코틀랜드인들을 모욕하는 일에 그토록 힘써왔으므로 그를 완전히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그로 인해 자신이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왕이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했다. >---- >헨리 나이튼의 연대기 이런저런 갈등이 씨앗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필리프 6세는 [[아비뇽 유수]]를 통해 확립한 프랑스 국왕의 기독교 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1331년부터 십자군을 준비한다. 목적지인 레반트의 도시들에 첩자들이 파견되었고, 왕실 기술자는 공성무기에 대한 논문을 작성했으며, 대규모 군대와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상이 이루어졌다. 결국 출항일이 1336년 8월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1332년 8월 11일,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스코틀랜드의 왕위주장자 에드워드 발리올이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다섯 배가 넘는 [[스코틀랜드]] 군대를 격파하고 9월 24일 스콘에 입성해 대관식을 치르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얼마 못 가서 발리올은 휴전 조약을 맺고 방심한 틈에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기습을 받고 칼라일로 쫓겨났지만, 에드워드 3세는 이를 오랜 원수인 스코틀랜드를 끝장낼 기회로 여기고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발리올과 그의 동맹인 잉글랜드군이 1333년 7월 19일 할리돈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고 로우랜드를 장악하자 어린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한다. 한편 필리프의 [[매제]]인 아르투아의 로베르는 부르고뉴 공작부인으로부터 아르투아 백작위를 빼앗기 위해 문서를 위조한 혐의로 수배중이었는데, 에드워드는 1334년 봄에 그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교활한 음모가인 로베르가 어린 에드워드를 부추겨서 전쟁을 일으키고 프랑스 왕위까지 주장하게 만들었다는 음모론이 유행했지만, 당대 잉글랜드측 연대기나 공문서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가설은 나중에 잉글랜드로도 건너와 후대의 잉글랜드 작가들에게 수용된다. 필리프는 잉글랜드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주요 동맹국이 몰락한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인 잉글랜드 왕을 뒤에 남겨두고 원정을 떠날 수 없었다. 1334년 5월 에드워드는 생사르도스 전쟁으로 몰수된 땅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신도 십자군에 동참하겠다는, 스코틀랜드만 제외하고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절충안을 내놓지만 필리프는 스코틀랜드인들에 대한 동정심 또는 왕으로서의 명예 때문에 거부한다. 그는 아직 십자군 왕이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잉글랜드를 대놓고 적대할 수 없었지만 그 대신 스코틀랜드의 저항군에게 동맹으로서 자금을 지원하고 영불해협에서 스코틀랜드와 노르망디 사략선의 활동을 허가하는 등 간접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프랑스의 지원이 효과가 있었는지 1334년 8월 스코틀랜드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발리올이 또다시 쫓겨났다. 에드워드도 단념하지 않고 또다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지만 유난히 혹독했던 그해 겨울 날씨 때문에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났다. 하지만 이듬해 7월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서 로우랜드 전역을 휩쓸기 시작한다. 이에 필리프는 시테 왕궁에 모인 관료들 앞에서 선대 왕들이 스코틀랜드와 맺은 동맹 조약을 언급하며 스코틀랜드에 중기병 1000명이 포함된 6000명의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갑작스럽게 발표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었으므로 어쩌면 스코틀랜드가 다시 침공당한 동시에 자신의 [[장 2세|유일한 후계자]]가 중병에 걸려 쓰러진 일을 신이 내린 벌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8월에는 스코틀랜드인과 프랑스인 선원들을 태운 사략선 3척이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해서 마을들을 습격했다가 수비군에게 격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제 필리프가 누구의 편인지는 분명해졌고, 정부의 지령을 받는 잉글랜드의 교구 사제들은 미사 시간마다 '스코틀랜드의 배후에 있는 외국 동맹군'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했다. 한편 필리프는 에드워드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공동 중재자 역할을 제안했지만,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던 교황은 노골적으로 데이비드 2세의 편을 들고 있는 필리프에게는 중재자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며 혼자서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필리프 6세와 데이비드 2세는 결국 발리올과 에드워드 3세 측이 제안한 모든 협상안을 거부했고, 1336년 4월 에드워드는 휴전 기간이 끝나는 즉시 스코틀랜드를 재침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자신이 파견한 중재인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교황은 필리프에게 십자군을 취소할 것을 제안했다. 1336년 6월 에드워드는 약속대로 스코틀랜드를 다시 침공했지만 이번에는 대군을 이끌고 가지 않았다. 그의 최우선 목표는 이제 프랑스군의 스코틀랜드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기병을 포함한 수천 명의 병력이 상륙하고 보급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은 북동부의 비옥한 해안 평야뿐이었다. 에드워드는 800명의 병력만 이끌고 해안가를 휩쓸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경작지를 불태우고 가축들을 도살하고 수도원의 식량창고를 약탈한 뒤 마지막으로 애버딘을 철저히 파괴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십자군 원정을 위해 준비된 프랑스 남부 함대가 노르망디에 도착해서 북부 함대와 합류했으며, 8월 20일 파리에서 진행된 협상에서 필리프는 이 함대로 잉글랜드를 침공해 동맹인 스코틀랜드인들을 해방할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곧바로 프랑스 군함이 와이트 섬과 서퍽주의 해안을 습격해서 마을과 도시를 불태웠고, 가스코뉴 국경에도 새로운 세네샬이 임명되는 등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다. 반역죄와 아키텐 공작위 몰수를 선언하기 위한 밑작업으로 파리고등법원은 우선 나바유 영주가 에드워드에게 제기한 소송에 대해 3만 플로린이라는 거액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12월에는 문서위조범 아르투아의 로베르의 신병을 양도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맞서 에드워드도 1337년 2월 가스코뉴를 방어하기 위한 함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북동부 해안을 불태운 작전이 너무 성공적이었는지 필리프가 스코틀랜드에 지원군을 상륙시킨다는 처음의 계획을 바로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기껏 모인 함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 마을들을 불태우는 의미 없는 무력시위만 반복했고 에드워드는 이를 잉글랜드 내부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잘 활용했다. 이제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인들의 오랜 원수인 스코틀랜드인들의 친구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스코틀랜드에 프랑스군이 이미 상륙해 있고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 상인들과 순례자들이 학살당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항구에는 군함 700척이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337년 4월 30일 신민소집령(arriere-ban)이 프랑스 왕국에 선포되었고, 곧이어 파리에서 열린 대심의회는 반역죄를 저지른 에드워드의 아키텐 공작위를 몰수하는 것에 동의했다. 7월경에는 1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침공해서 마을과 소도시를 불태우기 시작했지만 끝내 요충지에 자리 잡은 요새들을 함락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에드워드와 그의 동맹들은 프랑스 북부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의 동맹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는 평소 필리프 6세를 '자칭 프랑스 국왕'이라고 부르며 공공연히 깎아내렸는데, 이 명칭은 1337년 10월부터 잉글랜드의 공문서들에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반역 혐의를 반박하고 가스코뉴 지방에 대한 필리프의 주권을 부정하기 위해 그의 정통성을 부정했을 뿐 아직 스스로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필리프가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자칭 왕일 뿐이라면 진정한 왕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는 신중하게 무시되었다. === 독일 저지대 국경 분쟁 (1330~1338) === [[파일:Edward_III_becomes_Vicar.jpg |width=60%]] >제국의 모든 영주들이 할레 시에 모여 오랫동안 논의한 뒤 잉글랜드 왕에게 말했다. "전하, 프랑스 왕은 제국에 속한 것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내용의 고대 법령이 있습니다. 지금 필리프 왕은 캉브레지의 크레브쾨르 성, 아르투아의 아를뢰 성, 그리고 캉브레 시를 소유하고 있으니, 우리의 명예를 위해 황제의 동의를 구해주십시오." >그 후 황제의 칙령이 공개적으로 낭독되었고, 이로써 잉글랜드 왕은 황제의 대리인이자 보좌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이름으로 모든 신민에게 법과 정의를 집행하거나 금과 은으로 돈을 주조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았다. >----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독일 저지대 지역은 비록 명목상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봉신이었지만 사실상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공국들로 이루어졌으며, 13세기부터 이미 프랑스의 세력이 강하게 침투해 있었다. 직물 산업이 발전한 브라반트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전부 넓은 영토에 비해 생산력은 낮고 인구도 적은 가난한 농업국에 불과했으므로 감히 프랑스 왕의 권위에 대항할 수 없었고 프랑스의 지원 없이는 다른 공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치적인 동기 외에도 독일의 귀족들 중에는 필리프 6세의 열성적인 지지자이자 훗날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한 룩셈부르크 백작 요한처럼 프랑스어를 쓰며 프랑스의 궁정 문화에 애착을 가진 이들이 많이 있었다. 브라반트 공국은 1278년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지만 아키텐 공작위 몰수로 시작된 전쟁이 필리프 4세의 판정승으로 끝나자 1303년부터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을 지켰다. 에노 백작 기욤은 심지어 에드워드 3세의 장인이었지만 1328년 필리프의 왕위 계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카셀 전투에도 참전했다. 캉브레 주교는 부르고뉴 출신으로 프랑스 왕실의 후원을 받아 주교가 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1330년대 초부터 저지대 지역 전체가 왕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프랑스 상서성(Chancery) 관료들의 급발진은 프랑스에 호의적인 군주들마저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1337년 2월 필리프가 프랑스와 저지대 공국들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캉브레 시와 주변 성채들을 구입하자 불안감은 분노로 바뀌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도 이에 강력히 항의하며 명목상 봉신인 캉브레 주교에게 거래를 취소하라고 명령했지만 주교는 그냥 무시해버렸다. 저지대의 군주들은 필리프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황제한테 도움을 요청해서 공국에 간섭할 빌미를 주기는 싫었으므로 대신 프랑스 왕의 맹렬한 적이자 에노 백작의 사위인 잉글랜드 왕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편 에드워드는 1337년 초까지만 해도 직접 함대를 이끌고 가스코뉴에 상륙해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방어할 계획이었지만, 의회는 언제라도 잉글랜드 본토가 침공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국왕이 주력군과 함께 원정을 나가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며 그렇게 멀리 떠나있으면 위급할 때 제시간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1337년 8월 발랑시엔과 프랑크푸르트에 파견된 사절단이 저지대 군주들과 독일 황제가 동맹의 대가로 요구한 조건들을 가지고 돌아오자 에드워드는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솔즈베리 백작을 비롯한 왕의 고문들은 과거 에드워드 1세가 독일인들에게 당한 배신을 상기하며 그들을 믿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에드워드는 무시했다. 그는 모든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며 곧 군대를 이끌고 저지대에 상륙해서 11월 30일까지 황제의 군대와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전비 조달에 실패하면서 원정은 지연되었다.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각계각층에 널리 퍼져 있기는 했지만 당장 영불해협을 넘나드는 함대를 어찌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독일인들에게 20만 파운드를 바치면서까지 바다 너머의 프랑스 영토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원정이 지연되면서 12월부터는 에드워드가 독일인들에게 동맹의 대가로 지불해야 할 금액이 27만 파운드로 늘어났다. 그해 의회에서 승인된 약 5만 파운드의 전쟁세는 전부 저지대와 이탈리아의 은행들에게 진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고, 에드워드의 유일한 희망은 양모에 부과된 관세뿐이었다. 양모 관세 수입은 평시에는 13000파운드였지만 에드워드 1세 시절에 이미 의회의 승인을 받고 6배까지 늘린 전례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른 완벽한 계획이 준비돼 있었다. 우선 잉글랜드 전역에서 양모 3만 자루를 최저 가격으로 징발한 뒤, 작년의 수출 금지령으로 가격이 폭등한 양모를 왕실과 계약을 맺은 잉글랜드 상인들이 저지대 도시들에 가져가 비싸게 팔아넘기며, 그 수익의 절반을 챙기는 대가로 20만 파운드가 마련되는 즉시 왕에게 대출한다. 이렇게 해서 왕실은 간편하게 전비를 마련하고, 잉글랜드 농촌의 소작농들과 지주들은 조금 낮은 가격이지만 양모값을 받고, 무역상들은 큰 이익을 얻으며, 외국인들만 고통받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농민들의 저조한 참여 때문에 양모 징발과 운송이 지연되자, 조급해진 왕실 관료들은 저지대에 양모 1만 자루가 도착한 즉시 모든 양모를 징발한 뒤 현지 상인들에게 직접 팔았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당장 필요한 27만 파운드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상업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호구만 잡히고 4만 파운드밖에 못 벌었다. 상인들과 맺은 계약이 일방적으로 파기되면서 남은 2만 자루를 받지도 못하게 됐고 정부의 신용은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필리프는 독일에 많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와 저지대 군주들이 잉글랜드와 맺은 동맹이나 프랑스 북부 침공 계획에 대해서는 자세히 파악했지만 잉글랜드 내부의 최신 정보는 전혀 알 수 없었다. 1337년 9월 프랑스 정부 고문들은 11월쯤 연합군의 침공이 시작될 것이라 확신했고, 분노한 왕과 황제가 얼마나 많은 군사를 소집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7월부터 가스코뉴를 침공해서 이제야 간신히 보르도 포위전을 시작한 프랑스 남부군은 북부 전선에서 왕의 군대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 회군한다. 과정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에드워드의 대담한 결단은 결과적으로 가스코뉴를 침공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1338년 2월 잉글랜드 의회는 상인들과 맺은 계약이 파기된 뒤 남은 양모 2만 자루를 징발하겠다는 왕의 요청을 승인했고, 7월 22일 에드워드는 결국 350척의 함대를 이끌고 안트베르펜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에드워드를 맞이한 저지대 군주들은 거의 반년 동안 징발된 양모가 3000자루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8월부터 전쟁세 평가 금액을 기준으로 해서 헌드레드마다 양모 할당량을 부과한다는 특단의 조처를 하기는 했지만 당장은 돈이 없었다. 에드워드는 동맹들에게 약속한 보상의 일부라도 지불하기 위해 대관식 왕관을 저당 잡히고 이탈리아와 저지대의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슬슬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갑자기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치솟은 저지대 군주들은 황제의 승인 없이는 외국 영토를 공격할 수 없다며 발을 빼기 시작했고, 황제 자신은 필리프와 협상 날짜까지 잡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경악한 에드워드는 12000파운드를 수레에 싣고 코블렌츠로 달려가 황제에게 약속한 돈의 1/5인 6000파운드를 지불하고 나머지는 황제의 가족과 측근들에게 뇌물로 뿌렸다. 다행히 기분이 풀린 황제는 9월 5일 선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에드워드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했고, 에드워드의 전쟁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제국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며 이에 대한 불복종은 황제에 대한 반역이라고 선언했다. 에드워드는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오자마자 황제 대리인의 이름으로 불복종 시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하며 저지대 군주들을 소환했고, 10월 12일 내륙에 있는 소도시 헤르크에서 그들 모두의 충성 맹세를 받았다. 프랑스 침공은 이듬해 7월로 예정되었다. === 플란데런 반란 (1323~1338) === [[파일:Battle_of_Courtrai.jpg |width=60%]] >"잉글랜드 왕의 호의가 없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다. 플랑드르는 옷감을 만들어서 먹고 사는데 양모 없이는 옷감을 못 만드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잉글랜드를 친구로 삼아야 한다." >---- >프랑스 대연대기 [[플란데런 백국|플란데런]]은 지금의 [[벨기에]] 지방으로 북부 유럽 상권의 중심지로 유명한데, 프랑스의 세력권이었지만 잉글랜드와 경제적으로 밀접한 지방이라 항상 갈등이 존재했다. 잉글랜드는 양모 수출국이었고 플랑드르는 유명한 모직물 제조 지역이었다. 결국 1302년 5월 브뤼헤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 주둔군과 친프랑스파 유력자들이 학살당한다. 한달 뒤에는 기병대도 없이 급하게 소집된 방직공, 축융공, 소작농들의 군대가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 플랑드르는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긴장은 지속되었고, 1322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작이 된 느베르의 루이가 대놓고 친프랑스 정책을 펼치자 다시 브뤼헤에서 직물 노동자들의 봉기가 터졌다. 봉기는 플랑드르 전역의 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었고 불만을 품은 하층민들이 프랑스인이나 친프랑스파 귀족들과 유력자들을 보이는 대로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군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해 있었던 백작이 1328년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필리프 6세]]의 도움을 받아 카셀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봉기는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브뤼헤의 시장도 에드워드 3세에게 필사적으로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때는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맞서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시장은 프랑스군에 붙잡혀 반역죄로 교수척장분지형에 처해진다. 이후 플랑드르에서는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심이 한층 더 깊어진 백작에 의해 반프랑스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공포 통치가 시작되었다. 전쟁 직전 잉글랜드 상서성의 정부 회의 기록에서 언급된 비유처럼 플랑드르는 더도 덜도 아닌 '프랑스의 스코틀랜드'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문제로 시작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1336년 8월 에드워드 3세가 양모 수출 금지령을 내리자 프랑스 정부는 플랑드르에 대한 통제력을 빠르게 상실해갔다. 플랑드르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1337년 8월에는 이전의 반란에 대한 배상금을 감면했고 11월에는 전액 면제한다는 특단의 조처까지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1337년 12월 헨트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이후 7년 동안 플랑드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될 헨트 상인 야콥 반 아르테벨데를 필두로 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1338년 1월 헨트 임시정부는 곧바로 도착한 잉글랜드 사절단과 협상을 벌여,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플랑드르의 도시들이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앙모 수출 금지령의 해제를 약속받았다. 4월에는 플랑드르 백작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귀족들로 이루어진 진압군을 격파한 뒤 브뤼헤로 진격해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백작의 항복을 받아냈다. 궁지에 몰린 필리프는 1338년 6월 '생계수단을 잃은 헨트 시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임시정부가 잉글랜드와 맺은 중립 조약을 인정하고 반역죄를 사면할 수밖에 없었다. == 제1기 (1337~1360) == === 사우샘프턴 습격 (1338) === [[파일:hywech14.jpg |width=50%]] >경도 충분히 잘 알고 있으며 아마도 이제는 전 세계 모든 지역에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프랑스 왕은 짐의 가스코뉴 땅을 부당한 이유로 몰수함으로써 불법적이고 교활한 방식으로 약탈했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사기와 불의에 만족하지 않고 짐의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거대한 함대와 수많은 전사를 모아 왕국의 영토와 국민들을 맹렬히 공격했으며 이제는 자신의 힘이 주님께서 금하신 혐오스러운 계획을 완수하기에 충분하다면 이 세상에서 [[영어]]를 완전히 제거할 작정이다. >---- >에드워드 1세의 1295년 의회 소집장 영불해협과 비스케이 만에서 프랑스 함대는 습격의 강도를 점차 높여나갔다. 1338년 3월에는 칼레에서 출항한 갤리선 함대가 포츠머스에 상륙해 교회와 구호소를 제외한 도시 전체를 불태우고 돌아갔다. 그처럼 규모가 큰 해안 도시가 함락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잉글랜드 정부는 첩보를 통해 이 계획을 이미 2개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함대에 징발된 대형 상선들로는 갤리선의 기동력에 대응할 수 없었다. 5월이 되자 필리프가 제노바와 카스티야에서 고용한 갤리선 80척이 추가로 도착했다. 9월에는 주요 무역 거점 중 하나인 건지섬을 갤리선 2척을 잃는 치열한 전투 끝에 점령했고, 10월에는 수천 명의 프랑스군이 솔렌트에 상륙해서 대도시인 사우샘프턴을 습격했다. 수비대가 이를 격퇴했지만 이날 입은 피해로 사우샘프턴의 상업은 거의 1년 동안 마비되었다. 잉글랜드인들은 이 일련의 습격을 잉글랜드 전역을 점령하고 학살을 벌이기 위한 대대적인 침공의 전조로 받아들였으며, 독일인들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겠다는 에드워드의 계획은 갈수록 지지를 잃어갔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그들이 걱정하는 일이 계획되고 있었다. 1339년 4월 필리프는 노르망디에서 대형 상선 200척과 선원 수만 명을 징집했다. 이 대규모 함대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연 30만 리브르(약 5~6만 파운드) 이상의 비용은 노르망디 지역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필리프는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교회 성직록을 제외한 모든 토지를 노르망디의 교회와 수도원과 귀족과 도시 정부들에 분배하기로 약속했다. 한편 보르도의 공작 정부는 1337년 프랑스군의 첫 번째 침공을 막아냈지만 이듬해인 1338년에는 이미 저항할 힘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군대의 약탈과 파괴로 와인 생산과 수로 운송이 방해받으면서 공작 정부의 주된 수입원인 통행세와 관세 수입이 1/5로 감소했고 이제는 병사들에게 줄 봉급도 없었다. 프랑스 함대가 해상에서의 우위를 확정하기 시작하면서 바다를 통한 곡물 공급도 어려움을 겪었다. 수백에서 수천 파운드의 빚을 져가며 자비로 군대를 유지한 충성스러운 요새 주둔군 지휘관들이 여름에 시작된 남부 프랑스군의 침공을 또다시 막아냈지만, 이제 잉글랜드와 독일 연합군의 실체를 충분히 파악한 필리프가 11월부터 북부 프랑스에서 모집된 주력군을 가스코뉴 방면으로 돌리자 지난 2년 동안 무너지지 않은 요충지의 요새들마저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기 시작했다. 1339년 7월에는 1만이 넘는 프랑스군이 보르도를 포위했다. 미리 매수된 시민들이 성문을 열면서 프랑스군이 도시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그 뒤에 벌어진 시가전에서 주둔군과 민병대의 반격에 격퇴당했다. 프랑스군은 도시 내부에 심어둔 배신자들에게 모든 걸 걸었고 장기적인 포위 공격을 위한 공성 장비나 보급 계획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 라 카벨 대치 (1339) === [[파일:hywnf1339.jpg |width=60%]] >추기경이 대답했다. "프랑스는 폐하의 왕국의 모든 힘을 동원해도 끊을 수 없는 비단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성 마태오 축일 전야 에드워드 왕은 기치를 들며 중장병 12000명을 이끌고 출정해 프랑스 왕의 도시와 성들을 가는 곳마다 불태우기 시작했다. 매우 어두운 밤, 왕의 사법관인 제프리 스크롭 경이 추기경을 높은 탑의 꼭대기로 안내했다. 그리고 불길에 휩싸인 15리그 내의 모든 장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하, 프랑스를 둘러싼 비단실이 끊어진 것 같지 않습니까?" >추기경은 두려움과 슬픔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죽은 듯 쓰러졌다. >---- >제프리 베이커의 연대기 >프랑스인들은 두 편으로 갈라져 서로 정반대의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국왕이 자신의 왕국을 공격한 침략군에게 도전장을 보냈으면서도 전투 대형을 이룬 적들을 눈앞에 두고 물러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다른 이들은 적들과 맺은 약속을 믿고 싸우는 것은 미친 짓일 뿐이며 만약 운이 따르지 않아서 국왕이 전투에서 진다면 왕국 전체가 위험에 처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이기더라도 잉글랜드 왕과 그의 동맹들을 상대로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적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과, 현자이자 위대한 점성가인 시칠리아 왕의 예언에 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불안에 빠졌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프랑스 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원했지만, 너무 많은 반대 의견에 설득되어 다음 날 전군을 주둔지로 철수시켰다. 그는 매우 낙심했지만 고문들을 그가 올바른 결정을 내렸고 용감하게 진군해서 적들을 왕국 밖으로 쫓아냈으며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를 멸망시키려면 이번과 같은 원정을 아주 많이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1339년이 되자 에드워드의 재정은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 추가로 징발된 양모 1만 자루는 이미 작년에 진 빚의 일부를 갚는 데 전부 사용되었다. 올해는 추밀원 의원인 링컨 주교와 솔즈베리 백작과 더비 백작을 보증인으로 내놓는 대신 저지대의 상인들에게 엄청난 이자율로 다시 돈을 빌렸지만 7월로 예정된 프랑스 북부 침공에 필요한 전비를 마련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출정 예정일을 이미 넘긴 8월, 파산 직전에 몰린 에드워드는 마지막 남은 체면도 벗어던지고 저지대 군주들 앞에서 그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나가서 프랑스군과 싸우다 명예롭게 죽을 생각이라며 협박했다. 저지대 군주들이 마지못해 이를 말리자 에드워드는 그들에게 왕실 가신단 기사 여섯 명을 인질로, 그리고 남작 여섯 명과 백작 네 명과 주교 세 명을 보증인으로 한 채권을 강매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고도 돈이 부족했다. 마지막 순간 에드워드를 구원한 것은 킹스턴의 부유한 양모상이자 왕의 총신인 윌리엄 폴이었다. 이미 지난 1년 동안 왕실보다 높은 신용으로 10만 파운드 이상을 대출해서 에드워드에게 빌려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또 어디선가 1만 파운드 이상의 거금을 구해서 빌려준 것이다. 그는 이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는다. [[파일:hywnf1339map.png |width=70%]] 9월 20일 연합군은 드디어 발랑시엔에서 출정해 캉브레지로 진군했다. 원정을 오래 지속할 여력이 없었던 에드워드는 프랑스의 주력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여 격멸하기 위해 일부러 프랑스군이 주둔한 성채와 마을들을 점령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필리프는 연합군의 두 배 이상인 25000명의 병력을 콩피에뉴에 집결시켰지만[* 물론 현대 역사학자들이 추정한 병력수고, 연대기에 따르면 연합군은 잉글랜드군 1만 2천을 포함한 2만 7천, 프랑스군은 중기병 4만 5천과 보병 6만으로 구성된 10만 대군이었다.] 에드워드의 희망과 달리 캉브레지의 주둔군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오지 않았다. 그는 에드워드의 파멸적인 재정 상태를 이미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방식으로 독일 황제와 저지대 군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캉브레지에서 한발 물러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드러내면 연합군을 간단히 분열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필리프가 꼼작도 하지 않자 조급해진 에드워드는 10월부터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영토로 진입했다. 결국 10월 14일 양측 군대는 페론 시 앞에서 대치하지만, 에드워드는 애초에 필리프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야전을 벌이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만약 이곳에서 연합군이 패배한다면 저지대 군주들의 영지로 후퇴하기 위해 캉브레지를 통과하는 동안 사방에서 튀어나온 프랑스 주둔군과 친프랑스파 민병대들에게 신나게 사냥당하다가 주력군에게 따라잡힐 것이다. 그날 밤 연합군은 야음을 틈타 동쪽으로 신속하게 후퇴한다. 프랑스군을 따돌린 연합군은 생캉탱 동쪽의 소도시인 오리니를 점령한 뒤 사방으로 흩어져 성채와 마을과 소도시들을 약탈하고 불태우며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런 광경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필리프는 10월 17일 에드워드에게 야전으로 한판 붙자는 내용의 도전장을 보냈고, 에드워드는 이를 수락한 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에노 백령과의 국경 방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원래 에드워드는 장인인 에노 백작의 동생의 사위의 영지인 기스 시의 다리를 통해 우아즈강을 건널 생각이었지만 예상과 달리 도시 수비대는 연합군을 통과시키기를 거부했다. 이에 연합군은 근처의 모든 마을을 불태우면서 우아즈강을 따라 동쪽으로 행군하다가 10월 21일 저녁 에노 백령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소도시 라 카벨을 점령한 뒤 도시와 북서쪽의 숲 사이의 경사진 장소에 진지를 세웠다. 이곳은 방어와 후퇴에 모두 유리한 완벽한 위치였다. [[파일:lcp1339map.png |width=70%]] 숲과 도시 사이를 가로지르는 참호 뒤로 웨일즈 경보병들이 배치되었고, 양 끝에는 장궁병들이 배치되었다. 경보병들 뒤로는 말에서 내린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이 배치되었고, 독일 맨앳암즈들은 두 번째 열과 후위에 배치되었다. 7년 전 더플린 무어와 할리돈 힐에서 몇 배는 많은 스코틀랜드군을 전멸시켰으며 7년 뒤 크레시에서 프랑스의 수많은 기사와 제후들을 학살할 때와 똑같은 진형이었다. 반나절이 지나서 도착한 프랑스군도 전투 대형을 이룬 채 연합군과 대치했다. 이후 지휘본부에서 왕실 고문들과 귀족 지휘관들은 하루종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우회할 공간은 없는데 정면으로 공격하면 참호와 경보병들에게 붙잡혀있는 동안 양쪽에서 화살세례를 받아 전멸할 게 분명하고,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더라도 뒤에서 대기중인 맨앳암즈들에게 얻어터질 것이다. 반면에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이 몇 달만 기다리면 에드워드는 파산하고 독일인들은 협상 자리에 나올 것이다. 하지만 국왕이 자신의 왕국을 약탈하고 불태운 적들 앞에서 두 배나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싸우지 않고 도망친다면 바보나 겁쟁이로 보일 것이다. 결국 필리프는 왕실 고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후퇴 명령을 내린다. 전략적으로는 옳은 결정이었지만 북부 프랑스의 귀족과 성직자와 평민들은 모두 이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자신들의 왕이 겁쟁이라고는 차마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그 대신 왕의 옆에서 눈을 가리고 있는 간신들을 비난하고 조롱했다. 이렇게 프랑스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비단실 중 하나가 끊어졌다. 그리고 프랑스 동부의 소도시 라 카벨은 크레시처럼 유명해질 기회를 잃었다. 에드워드는 필리프가 도망쳤으므로 자신이 전투의 재판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한 뒤 국경을 넘어 저지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인 10월 13일에서 28일 사이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왕의 대리인으로서 남작들과 평민 대표들 앞에서 에드워드의 북부 프랑스 침공 작전의 끔찍한 현실을 보고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왕실이 진 빚은 30만 파운드가 넘으며 이걸 다 갚으려면 그동안 거의 1년에 한 번씩 걷은 전쟁세를 7번은 걷어야 할 지경이었다. 세금을 추가로 걷어서라도 빨리 빚을 갚아야 한다는 점에는 양원 모두 동의했다. 하지만 하원은 자신들이 동의해도 지역민들은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미리 경고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지불된 징발 명령을 전부 취소하고, 앞으로 정부 도급업자들이 징발한 물건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반드시 체포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요구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를 받아들였고, 라 카벨에서 양군이 대치한 사건과 그 결과가 전해지기 직전에 회기가 종료된다. === 슬로이스 해전 (1340) === 1340년 1월 26일 헨트에서 에드워드가 스스로 프랑스 국왕이라 선언하고 플랑드르의 합법적인 주권자로서 자치권과 보상을 약속하자 플랑드르 시민 정부는 중립 조약에서 벗어나 연합군에 합류한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의회에 직접 참석해서 추가적인 전쟁세를 승인해줄 것을 간청하기 위해 곧바로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4월 초, 에드워드가 없는 동안 잉글랜드, 독일, 플랑드르군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투르네로 진격하는 삼로병진작전을 시작한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행군 도중 릴에서 출격한 기동타격대의 기습에 지휘부가 궤멸되면서 허망하게 흩어졌다. 릴은 필리프 4세 시절 왕실에 의해 몰수된 플랑드르 영토 중 하나였고, 플랑드르 시민 정부가 연합군에 합류한 순간부터 이미 프랑스군 지휘부의 관심이 집중된 긴장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무시한 채 충분한 대비 없이 너무 가까이 지나간 것이다. 포로로 잡힌 솔즈베리 백작과 서퍽 백작은 파리의 샤틀레 감옥에 수감되었다. 저지대 군주들은 티에라슈에 새로운 프랑스 군대가 집결 중이라는 잘못된 첩보를 믿고 편제가 완료되기 전에 기습하러 간답시고 시간만 낭비하다가 다른 곳에서 소집을 끝낸 프랑스군이 진격해오자 근처 마을 수십 곳만 약탈한 뒤 후퇴했다. 유일하게 투르네 시에 도착한 플랑드르군은 잉글랜드와 독일 군대의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고 회군한다. 1340년 6월 24일 슬로이스에서 프랑스 함대 및 잉글랜드, 그리고 플랑드르 간의 대규모 해전이 발생했다. 플랑드르의 도움을 받은 잉글랜드 해군은 프랑스 함대 190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노르망디에서 소집된 함대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전투에서 생존한 노르망디 지방 유력자들은 이제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대가로 많은 토지를 분배받기는커녕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의 최전선에서 침략군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게다가 나중에는 크레시 전투를 시작으로 잉글랜드군이 북부 프랑스의 주력군을 오는 족족 야전으로 갈아버리면서 거의 20년 동안 프랑스 왕실은 노르망디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없었고, 일드프랑스의 방위도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 투르네 포위전 (1340) === 생토메르 전투와 투르네 포위전에서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잉글랜드의 진격을 저지했다. 결국 1340년 9월 25일 양국은 2년 동안 휴전하기로 결정했다. === 브르타뉴 공위 계승 전쟁(1341~1364) === 하지만 휴전은 1년 만에 깨졌다. 1341년 4월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하면서, 브르타뉴 공작령에서 후계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브르타뉴 공작령은 프랑스 발루아 왕가,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지역이었다. 장 3세의 조카인 잔느(팡테블 여백작 - 계승순위가 우선됨)와 장 3세의 배다른 동생인 장 드 몽폴(몽폴 백작 - 어머니의 여백작 지위를 승계)간의 후계 대결이 발생했다. 프랑스 왕실령과 달리 브르타뉴에서는 자체 관습법에 의해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될 때 프랑스는 살리카법을 옹호하지 않았는데, 이때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살리카법을 옹호하면서 장 드 몽폴과 손을 잡았다. 에드워드 3세의 지원을 받은 몽폴은 반대하는 대다수의 제후를 무찌르고 브르타뉴의 수도인 [[낭트]]를 손에 얻었다. 그러자 프랑스는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브르타뉴에 공격을 가했고, 잉글랜드가 이에 맞서 개입했다. 프랑스는 10월 몽폴을 포로로 잡았으나 아내 잔느(후계자 잔느 여백작과 이름이 같다)가 몽폴의 아들인 장(장 4세)의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서부 브르타뉴의 에느본에서 강경하게 농성했다. 그래서 "두 명의 잔느가 싸웠다"라고 일컬어진다. 1342년에 벌어진 브르타뉴에서의 일련의 전투는 무승부로 끝나며 다시 한번 일시 정전이 체결되었다. 정전이 종결되고 1346년 에드워드 3세와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다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에드워드 3세는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가면서 전쟁을 벌였고, 이 여파로 [[이탈리아]]에서 잘 나가던 가문 하나[* 이탈리아의 바르디 가문과 페루치 가문이다. 잉글랜드 양모 수출 독점권과 여러 혜택을 조건으로 하여 에드워드 3세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이를 통해 에드워드 3세는 전쟁 자금을 얻었고, 두 가문은 막대한 이익을 얻으며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했기 때문에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지만 에드워드 3세가 돈을 갚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엄청난 타격을 받아 두 가문 모두 몰락하고 만다.]가 파산하기도 했다.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서 플랑드르까지 가는 동안 프랑스군은 거의 저항을 하지 않았으며, 잉글랜드군은 비용을 자체 조달하고 프랑스군을 끌어내기 위해 [[약탈]] 행렬(chevauchee)을 자행했다. 가는 길에서 돈이 되는 건 다 약탈하고 불 지르고 다니면서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런 약탈은 중세 전쟁에선 기본이었으나 잉글랜드군은 아예 싸그리 털어먹고 불 질러버린다는 점에서 한층 더 악독했다(...). 또한 프랑스 북부의 중요한 항구이자 양모 가공업이 발달한 산업 도시인 [[칼레]]를 1347년에 함락했다. 이때 '칼레의 시민들'이란 유명한 야사가 있다. 이 부분은 칼레 문서를 참고할 것. 1351년엔 브르타뉴에서 일명 30인의 전투(Combat of the Thirty/Combat des Trente)라고 부르는 독특한 전투도 벌어졌는데 '''[[기사도]] 정신에 따라 30인의 프랑스 기사와 30인의 잉글랜드 기사가 각국을 대표하여 전투를 벌인 것이였다''' 사실 이 전투는 본래 프랑스의 기사 장 드 보마누아르와 잉글랜드의 기사 로버트 벰버러 간의 1:1 결투였으나 점점 30:30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결국 토너먼트 형태가 되며 2차전까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6명 전사, 잉글랜드는 지휘관이던 로버트 벰버러를 포함해 9명이 전사하며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는 당시에도 모범적인 [[기사도]]의 사례로 꼽히며 전투 자체도 전사자는 있었지만 평화롭게 마무리 되었음에도 훗날 민족주의 이후에는 프랑스에선 영국(잉글랜드)의 기사가 반칙을 했다거나, 반대로 영국에선 프랑스가 반칙을 했다는 식으로 서로를 비하하는 내용으로 변질되었다. === 크레시 전투 (1346) === 결국 프랑스군은 약탈 행렬을 더 두고 보기도 그렇고 충분한 군대도 모으고 해서 1346년 8월 26일 프랑스 크레시에서 잉글랜드군과 격돌했다. 하지만 중세 전쟁사에 유명한 [[크레시 전투]]는 10,000명의 잉글랜드군이 '''30,000명의 프랑스군을 패퇴시키며''' 잉글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단,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사료마다 다르다. 잉글랜드군은 6,000~12,000명, 프랑스군은 20,000~100,000명으로 나온다. 잉글랜드군은 10,000~12,000명, 프랑스군은 30,000~40,000명으로 보는 게 중론이다. 중기병 수로는 잉글랜드가 2,300~4,000기 대 프랑스가 최소 2/3에서 대부분이 기병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4,000~6,000명이 제노바의 석궁병들이다. 여하간 프랑스가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장궁]]을 이용한 강력한 투사 무기를 이유로 드는데 사실 좀 더 복합적이다. 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잉글랜드군이 언덕 위에서 좋은 자리 잡고 있음. * [[롱보우]]를 이용해서 상대를 투사 무기로 압도함.[* 프랑스군은 제노바 용병 석궁병들이 [[석궁]]을 썼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다.] * 잉글랜드군이 계속 화살을 퍼붓자 프랑스군이 어쩔 수 없이 언덕 위로 올라옴. * 잉글랜드군이 양 날개에서 화살비를 쏟아붓고 프랑스군은 화살비를 피하느라 중앙으로 밀리는 바람에 과다 밀집 상태에 빠짐. * 프랑스 기마대는 일단 말뚝과 목책에 저지되고 지친 프랑스군을 언덕 위에서 쉬고 있던 잉글랜드 하마(下馬) 기사[* 말에서 내린 [[기사]]를 뜻한다. 절대 동물 [[하마]]를 타고 다니는 기사가 아니다!]가 격퇴. * 프랑스군이 퇴각하면 잉글랜드의 하마기사들이 다시 말을 타고 프랑스군을 추격. 라는 식으로 기본형이 만들어진다.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0,000~30,000명으로 추정되며 제후 11명과 기사 1,200여 명이 포함된 수치라고 한다. 그리고 사망자 중에는 필리프 6세의 동생인 알랑숑 백작 샤를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친부인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국왕]] 겸 [[룩셈부르크]] 백작 [[얀 루쳄부르스키]] 등 화려한 인사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는 이 전투가 끝나고 2달 후인 10월에 프랑스의 부름[* [[필리프 6세]]는 크레시 전투 2달 전부터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동안 씹고 있었다.]으로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으나 '''네빌스크로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대에 패해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고 1357년 풀려났다. 결국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잉글랜드군은 이제 프랑스 북부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방 천지로 약탈 행렬을 자행하기 시작, 프랑스 전역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 교황의 중재와 휴전, [[흑사병]] 창궐 (1347 ~ 1350) === 이런 가운데 양측은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중재로 1355년까지 휴전 협정을 맺는 문제를 협상했고, 그 와중에 흑사병이 널리 퍼지자 아예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자는 이야기도 나오게 되었다. 휴전 협정 교섭 중 필리프 6세가 사망했고(1350) 그 뒤를 이어 [[장 2세]](1350~1364, 선량왕)가 즉위했다. === 소규모 교전과 나바라파의 등장 (1351 ~ 1354) === 필리프 6세가 사망함으로써 휴전은 선언된 지 2개월 만에 파기되었다. 이후 전쟁은 가스코뉴의 요새들을 하나씩 점령해서 최종적으로 방어선을 붕괴시키려는 프랑스군과 프랑스 북부를 위협해서 가스코뉴에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하려는 잉글랜드 원정군의 싸움으로 전개되었다. 초기 전황은 프랑스에 매우 유리하게 돌아갔다. 1351년 4월 프랑스군은 보르도와 베르쥬락 간의 조운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몽트라벨 성을 기습해서 점령한 반면,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북부에서 벌인 기마행군은 모두 눈에 띄는 성과를 얻지 못했거나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9월 장 2세는 셍장덩주엘리의 요새를 할양받는 등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352년은 프랑스가 처절하게 굴욕을 당한 해였다. 한 잉글랜드 향사가 1월 휴전 조약을 위반하고 북프랑스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중 하나인 긴느 성을 기습해서 점령했다. 격분한 프랑스인들은 긴느 성을 포위하고 수개월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7월 밤에 늪지대를 가로질러 기습을 걸어온 잉글랜드군의 공격에 포위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잉글랜드군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여 10년 전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가스코뉴의 요충지인 블레유를 탈환했고, 10월 초에는 타른 강의 조운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라프랑세즈를 점령했다. 한편 전쟁이 재개된 이후 장 2세는 거의 모든 왕실 부채의 상환을 중단해야 했고, 전황까지 나빠지면서 급격히 인기를 잃어갔다. 새 왕과 총신들의 무능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왕족이자 뛰어난 정치가인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나바라 왕국)|카를로스 2세]]를 중심으로 정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결국 1353년 1월 카를로스 2세와 그의 지지자들이 장 2세의 측근이자 프랑스의 총사령관인 샤를 드 에스파냐를 암살하면서 파국이 시작되었다. === 흑태자 에드워드와 [[푸아티에 전투]] (1356) === > 그 후로는 통치 질서가 붕괴되고 따라서 국방이 약화되어 프랑스인들에게 끊임없이 재난과 불행, 그리고 위험이 다가왔다. >---- > 14세기 중반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1354년 아비뇽에서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는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장 2세에게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거나 그 대신으로 아키텐 영토의 인정 및 투레인, 앙주, 메인 등의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장 2세는 이를 거부했고 이듬해 1355년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다. 전투가 재개되자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프랑스를 약탈하며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나아갔고, 마침내 율리우스력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에서 흑태자의 잉글랜드군과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일전이 벌어졌다. 당시 프랑스군의 병력이 잉글랜드군보다 세 배나 많았기 때문에 장 2세는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이번에도 결국 패배하고 말았고, 장 2세를 비롯한 프랑스군 지휘부가 대거 포로로 사로잡히고 만다. [[흑태자]]는 장 2세를 극진히 대우하긴 했지만 결국 몸값은 다 뜯어냈고, 심지어 프랑스가 몸값을 지불할 돈이 없자 장 2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직접 잉글랜드로 건너가 스스로 [[포로]](!)가 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기사도 돋네~~ 좋게 말하면 [[대인배]]지만 왕으로서는 확실히 글러먹었다. 프랑스에선 왕까지 사로잡히자 장 2세의 아들인 샤를 왕세자(뒤의 샤를 5세, 현명왕)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삼부회]]의 평민 의원들은 에티엔느 마르셀을 중심으로 [[입헌군주제|국왕이 국정 운영하지 못하게 하자]]라는,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제안'을 하는 바람에 1년여에 걸쳐 협상을 끝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평민 의원들과 협상을 포기한 샤를 왕세자는 자신을 국왕 섭정으로 선포하고 1358년 프로방스와 콩피에뉴에서 별도의 삼부회를 소집해 군자금을 확보했다. 농민들에 의한 [[자크리의 난]]이 일어나자 샤를 왕세자는 이를 평정하고 [[파리(프랑스)|파리]]로 쳐들어가 파리를 포위하고 파리 내에 내분을 유도해 에티엔느 마르셀을 척살하는 데 성공했다. 곧 휴전 기간이 끝나면서 전쟁이 재개됐지만, 프랑스군이 결전을 피하고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잉글랜드군 진영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에드워드 3세는 어쩔 수 없이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1360년 에드워드 3세는 확장된 아키텐과 [[칼레]](Calais), 퐁티웨(Ponthieu)와 푸아투(Poitou)를 보장받는 대신 프랑스 왕을 칭하는 것을 그만두었으며, 이 '''브레티니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한편 장 2세는 1364년 [[런던]]에서 죽었다. == 제2기 (1369~1389) == === 끝나지 않는 전쟁과 프랑스의 재기 (1360~1366) ===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북부에는 잉글랜드, 가스코뉴, 에스파냐, 나바라, 독일, 스코틀랜드 등 온갖 지역에서 몰려온 자유계약 용병들[* '프리컴퍼니'(free company:자유부대) 또는 '루티에'(routiers:부대원들)라 부른다. 둘 다 그냥 용병대라는 뜻이지만, '루티에'는 특히 백년 전쟁 중기에 프랑스에서 악명을 떨친 잉글랜드 용병들(다양한 지역 출신들이었지만 주로 잉글랜드인들이 중심이 된)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였다. 루티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존 호크우드'''는 초기에 잉글랜드군 소속으로, 프랑스에서 프랑스인들을 털다가, 1360년 브레티니 평화 조약 이후에는 '그레이트컴퍼니'라 불리는 비적떼의 일원으로서 아비뇽의 교황청을 털었고, '화이트컴퍼니'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간 뒤에는 콘도티에레로서 이탈리아인들을 털었다. 결국 비스콘티 가문의 사생아를 아내로 얻고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다가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다.]이 프랑스의 마을과 요새를 점거하고 주민들로부터 보호비를 갈취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1360년 브레티니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이들은 모두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시에 프랑스인들로부터 돈을 뜯어낼 명분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들은 얌전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랑드 콩파니'(Grandes Compagnies)라고 불리는 대군세를 이루어[* 단순히 머릿수만 많은 오합지졸도 아니고, 기사 등 [[맨앳암즈]] 3,000명과 보조병 9,000명이 포함된 정예부대였다] 남동쪽으로 행군하며 프랑스 동부를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브리네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는 교황이 거주하고 있던 아비뇽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교황에게서까지 보호비를 뜯어내는 업적을 달성한 다음, 유명한 잉글랜드인 용병 존 호크우드를 비롯한 군대의 절반 가량은 아비뇽의 교황에게 고용돼 이탈리아 등지에서 교황의 적들과 싸우게 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프랑스 각지로 흩어져서 이전처럼 계속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프랑스 민중과 지방 중소귀족들의 미래는 여전히 암울해보였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 왕국과 [[샤를 5세]]에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약탈을 일삼는 이들 용병 무리를 진압할 정규군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1363년부터 마침내 '주민세'(fouage)가 시행된 것이다. 1363년 11월 아미엥에서 소집된 삼부회는 그랑드 콩파니라는 국가적인 재앙에 맞서 "우리 왕국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6,000명의 전사([[맨앳암즈]])를 상시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의 몫을 부담하며(le fort portant le foible) 가구 소득에 따라 최하 1프랑에서 최고 9프랑까지 평균 3프랑의 주민세를 부과[* 걸인이나 날품팔이 등 극빈층은 가구 수 산정에서 제외되었다.]한다는 데 동의했다. 샤를 5세와 샤를 6세 시기 프랑스 발루아 왕실의 연간 조세수입은 이전의 3~5배인 200만 프랑 내외에서 최대 240만 프랑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백용, <14세기 후반~15세기 초 프랑스 왕정과 북부 도시들의 반란: 국가 재정의 문제를 중심으로>] 참고로 전신갑옷과 각종 무기 및 2~3필 이상의 군마를 소유한 맨앳암즈 6,000명 + 준마나 조랑말을 탄 경기병과 승마궁수 18,000명 + 조랑말을 탄 종복 6,000명으로 구성된 기병대 30,000기의 365일치 봉급이 186만 프랑이었다. 샤를 5세는 이후 10년 이상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였음에도 1380년 사망했을 때 아들인 [[샤를 6세]]에게 상당한 액수의 유산을 남겨줄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통일적이고 정기적인 조세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프랑스 재정사의 한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처음 2~3년 동안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었던 용병 도적떼들은 현지 주민들의 비협조와 방해, 내부 분열을 겪으며 서서히 프랑스군에 매수되거나 진압됐다. === 프랑스의 반격과 재정복 (1366~1389) === 1366~1369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s-2.3|제1차 카스티야 내전]]에 잉글랜드[* 알폰소 11세의 적자인 보르고냐 왕조의 페드로를 지지]와 프랑스[* 알폰소 11세의 서장자이자 페드로의 이복형이며,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시조인 엔리케 2세를 지지]가 둘 다 끼어들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푸아티에 패전 이후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전역에서 깽판을 치고 다니던 시기에 [[게릴라]] 전술로 전공을 세워서 명성을 얻었던 기사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때부터 프랑스의 총사령관으로서 활약했다. [[브르타뉴]]의 최하층 신사 집안 출신 용병대장이었던 게클랭은 탁월한 게릴라 전술을 바탕으로 약탈 행위를 거듭하는 잉글랜드군을 기습하여 격파했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먼치킨(클리셰)|먼치킨]] 유닛 [[흑태자 에드워드]]는 각지에서 프랑스, [[카스티야 연합 왕국|카스티야]]군을 쳐바르면서 다녔지만[* 게클랭도 정면 대결에선 흑태자를 못 이겼다. 아니, 게클랭 자체가 정면 대결에서 승률이 영...] 건강이 악화되어 후기에는 가스코뉴 지방에만 웅거했고, 그 사이에 게클랭은 다른 잉글랜드 군대를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는 한편 착실히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프랑스 성채를 회복했다. 장 2세의 뒤를 이은 '현명왕' [[샤를 5세]]와 게클랭의 노력으로 프랑스는 1375년 부르지에서 휴전 협정을 맺고, 1380년대에 이르러 '''노르망디와 가스코뉴를 제외한 기존 영토를 거의 다 회복했다'''. 이런 와중에 때마침 흑태자 에드워드가 병에 걸려 죽었다(1376). 브르타뉴 공위 계승 전쟁은 1364년 올레 전투에서 결국 친영파인 몽폴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끝났다. 최후의 결전에서 샤를 드 브로와가 사로잡히고, 게클랭이 포로가 되면서(!) 잔느 여백작은 승계를 포기했고, 결국 몽폴의 아들 장 4세가 브르타뉴의 공작이 되어 프랑스와 화해했다. 그러나 장 4세가 몰래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으려고 했던 것이(1372년) 발각되면서 장 4세는 다음해 추방되고 브르타뉴는 프랑스의 직속영지(1378년)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잔느 여백작까지 브르타뉴의 독립을 위해 들고 일어나면서(!) 샤를 6세의 즉위에 따라 1381년 장 4세가 다시 복귀했다. 전황이 불리한 가운데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잉글랜드 의회는 극빈자를 제외한 왕국의 모든 신민에게 인두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취했고, 결국 1381년 5월 분노한 평민들[* 농노나 하층 임노동자들만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자유민 부농과 도시 장인들, 그리고 자의든 협박에 의해서든 젠트리 계층도 많이 가담했다.]로 구성된 수만 명의 반란군이 런던으로 진격했으나([[와트 타일러의 난]]) 지도자인 와트 타일러가 협상 자리에 나갔다가 런던 시장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진압되었다. 1385년 5월에는 장 드 비엔느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 맨앳암즈 1,000명, 그리고 전원이 기병으로 추정되는 궁수 500명과 나머지 보조병들]이 스코틀랜드에 상륙했고, 그해 가을 스코틀랜드군 4,000명[* 맨앳암즈 1,000명, 경기병 3,000명]과 연합해 잉글랜드 북부 노섬벌랜드를 침공했다. 대륙 영토를 대부분 상실한 데 이어 본토를 공격당한 것에 위기감을 느낀 잉글랜드는 맨앳암즈 6,000명, 장궁병 6,000명으로 주력 전투병만 12,000명, 보조병 포함 20,000명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고,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포함해 로우랜드 지방의 대부분을 약탈하고 불태웠지만 연합군이 결전을 회피하고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겨울이 다가오자 결국 보급 문제로 회군했다. 하지만 삼촌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왕위를 노리지 않을까 우려하던 리처드 2세가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원정을 일찍 중단한 것이라는 소문이 당대에 돌았다.[* 결국 14년 뒤 존의 아들 헨리가 반란을 일으켜 리처드 2세를 끌어내리고 헨리 4세로 즉위한다.] 한편 스코틀랜드 측에서는 이 잉글랜드 원정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닌 프랑스의 이득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온 귀족들을 강제로 억류한 채 프랑스 발루아 왕실에 피해 보상금을 요구했고,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의하면 이 사건으로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와 2, 3년 정도 평화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해서 완전히 파괴하자"는 여론이 생겼을 정도로 동맹국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392년의 아미앵 회의와 1393년의 루랑쟝 협상, 1396년의 아르들 회의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은 적대행위를 종결하고 이후 1415년까지 평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화평을 빌미로 잉글랜드는 내전이 벌어지니... == 양국의 내전과 전쟁의 재개 (1390~1415) == === 잉글랜드의 내전과 랭커스터 왕조 설립 (1399) === 흑태자의 요절에 이어 [[에드워드 3세]]도 사망하자(1377)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가 즉위했으나, [[인두세]] 문제로 잉글랜드는 내전에 휩싸인다.[* 1380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런던이 점령되었고, 1387년의 라드콧 브릿지 전투로 국왕에 동조하는 화평파 귀족들이 반대파에게 크게 졌다.] 화평이 대강 종결되고 나자 리처드 2세는 반격에 나서 글로스터 공과 알란델 백작을 처형(1397년)했으나, 아일랜드 원정에 빈틈을 보이며 결국 패배해 런던탑에 유폐되었다. 그렇게 랭커스터 공작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랐다([[랭커스터]] 왕조, 1399년). 잉글랜드 중부의 노섬벌랜드와 [[웨일즈]], 웨일즈 근처의 변경 영주들이 헨리 4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헨리 4세는 치열한 전투 끝에 이들을 제압했다. === 프랑스 내전 (1407~1435) === 한편 프랑스는 샤를 5세(재위 1364~1380)의 아들인 [[샤를 6세]](재위 1380~1422, 친애왕)가 [[발작]]으로 미쳐버렸다. 결국 부르고뉴파[* 프랑스 왕 장 2세의 막내아들 호담공 필리프 2세로부터 시작된 가문이다.]와 아르마냑파[*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아들 샤를이 결혼한 아르마냑 백작가의 이름을 땄다. 후에 [[부르봉 왕가]]가 되는 부르봉도 이 파에 협력했다.]가 [[섭정]] 후견의 실권을 두고 박터지게 싸우기 시작했다.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은 모두 왕의 방계 후손이었다.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 2세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는 숙부와 조카 사이였다. 두 파벌의 정쟁은 결국 극단으로 치달아, 1407년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 플랑드르 백작을 겸임한 호담공 필리프 2세의 아들이었다.]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재무장관 겸 아키텐 총독)[*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아들로 샤를 6세의 동생이었다.]를 살해하면서 내전이 터지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전이 발생한 주된 원인은 샤를 5세가 지난 세대 동안 공들여 이룩한 중앙집권화된 왕권이었다. 당시 부유한 백작령이나 공작령의 연간 조세수입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2~30만 프랑 전후에 불과했던 반면에, 프랑스 왕실의 수입은 200만 프랑을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유력한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고 국고를 전용하기 시작하면 반대 파벌과 어마어마한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경쟁상대를 간단히 말려죽일 수 있었다. 실제로 1404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 2세가 죽은 직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각종 연금과 증여 수익을 독점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된 용맹공 장 1세는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면서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었다. 이런 이유로 장 1세는 사촌을 암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심복들은 수사 끝에 암살자들이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와 접촉한 정황을 밝혀냈다. 오를레앙 공작의 시종이 회의에서 저택 수색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자, 부르고뉴 공작 장 1세는 자신이 '악마의 꾐에 빠져서' 사촌의 암살을 지시했음을 자백하고는 영지인 플랑드르로 달아났다. 이후 벌어진 내전의 초기 전황은 아르마냑파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1414년 아르마냑파는 부르고뉴를 침략해서 장 1세를 끌어내겠다고 공언할 정도로 기세가 올랐다. 하지만 바로 그때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아르마냑파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같은 기간에 교황청마저 분열되었다(...). 1378년 로마로 돌아간 교황의 후계가 누가 정통이냐는 문제가 불거져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의 아비뇽 교회(친프랑스)와 교황 우르바노 6세의 로마 교회(반프랑스)로 분열되었다.[* [[아비뇽 유수]] 문서의 서방 교회의 대분열 대목 참조.] == 제3기 (1415~1453) == || [include(틀:위키미디어 공용,파일이름=La guerre de 100 ans (de 1415 à 1453).svg,높이=200,너비=640,옵션=align=center)] || || 1415년~1453년의 전황 || === 아쟁쿠르 전투 (1415) === [[헨리 4세]](재위 1399 ~ 1413)의 뒤를 이은 [[헨리 5세]](재위 1413 ~ 1422)는 [[의회]]의 지지를 끌어내고 세력 정리도 할 겸 이 기회에 다시 내분에 빠진 [[일본을 공격한다|프랑스를 공격했다]]. 1415년 부르고뉴 공작파와 친교를 맺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헨리 5세는 [[칼레]]까지 진군했고, 샤를 6세(정확히는 샤를 달브레 장군이 대행)도 여기에 맞서서 응전을 준비했는데 [[에드워드 3세]]가 처음에 겪었던 일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지친 잉글랜드군을 향해 프랑스군이 집결해 공격한 것까진 좋은데 1415년 벌어진 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크레시 전투]]처럼 처절한 삽질을 거듭하다 대패한다. 안 그래도 점성높은 아쟁쿠르의 [[진흙]]탕(뻘밭)+장마비에 병목지형으로 프랑스군이 우르르 밀려드는데 잉글랜드군이 [[장궁]]으로 반격하자 밀려난 부대가 뒤로 후퇴하다가 뒤섞여버린 것. 그래도 프랑스군은 어떻게 잉글랜드군 본진까지 밀어붙이긴 했는데 프랑스 하마 기사들이 잉글랜드 하마 기사들과 싸우다가 잔뜩 지친 가운데 경무장한 잉글랜드군 궁수들이 측면을 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버렸다. 총사령관인 샤를 달브레도 여기서 전사했다. ===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 급사 (1422) === 부르고뉴파의 도움까지 얻은 잉글랜드군은 베르네유(Vernile)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이 전투에서 본격적으로 [[플레이트 아머]]vs[[장궁]] 대결이 벌어지긴 했다. 일단 승리는 [[플레이트 아머]]. 근데 [[이탈리아]] [[용병]]들은 잉글랜드군 측면을 공격한 게 아니라 본진을 털러 가다가 반격크리 먹고 달아나버렸다... 가우가멜라도 그렇고 라피아, 마그네시아 등등에서 발견되는 고전적인 패배 [[플래그]]인 듯 싶다.] 이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제임스 1세]][*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와는 다르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선 제임스 6세였다.]의 지원군을 격파하며 승기를 확실히 잡았다. 1418년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수도 파리를 점령하자 도팽 샤를은 파리에서 도망쳤다. 1419년 샤를의 계책으로 부르고뉴파는 잠시 이탈했으나, 당사자인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거리에서 오를레앙파에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인 선량공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에 확실히 달라붙게 되었고, 결국 1420년 프랑스 왕비 이자보가 샤를 6세가 죽으면 자기 아들인 도팽 샤를 대신 사위인 헨리 5세에게 계승권을 준다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헨리 5세가 골골한 샤를 6세에 이어 프랑스의 [[앙리 2세]]가 될 수 있던 순간이었다.[* 그 때까지 프랑스에서 '앙리'라는 이름을 사용한 왕은 단 한 명이었다.] 그러나 샤를 6세보다 18세나 어려 거의 확정적으로 샤를 6세 사후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라 예상되던 헨리 5세가 1422년 35세의 나이에 이질로 급서하고 말았고, 잉글랜드 왕위를 이어 백년 전쟁을 마무리해야 했을 [[헨리 6세]]는 젖먹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샤를 6세는 그로부터 정확히 2개월 후에 사망했다. === 잉글랜드군의 루아르 강 남하 (1428)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Guerre_de_cent_ans_%281435%29.svg.png|width=350]] 당시 잉글랜드, 프랑스의 전황. 하지만 잉글랜드는 아직도 여러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잉글랜드는 [[언플]]로 도팽 샤를이 샤를 6세의 친자가 아니고, 오를레앙 공작과의 [[스캔들]]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퍼트렸다. 그렇기에 트루아 조약이 성립이 가능했다는 논리였고, 또 오를레앙 공작의 땅에 있는 샤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에도 매우 적절한 선전이었다. 거기에 잉글랜드는 또 하나의 정통성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랭스]]였다. 프랑스 왕은 대대로 파리가 아닌 대성당이 있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했는데 샤를이 정식으로 프랑스 왕권을 주장하려면 파리뿐만 아니라 랭스까지 회복을 해야 할 판이었다. 덧붙이면 프랑스는 아비뇽 교회마저도 교황이 난립하는 반면 잉글랜드는 어떻게든 한 명의 로마 교황이 있었다. 오늘날 가톨릭에선 분열시대의 아비뇽 교황은 정통 교황이 아닌 대립 교황으로 본다. 게다가 잉글랜드군은 아직 건재했다. 쐐기를 박기 위해 섭정인 [[랭커스터의 존|베드퍼드 공작 존]]과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는 남진을 계속했으며 기어이 1428년에는 샤를의 본거지가 목전인 루아르 강까지 남하했다. 잉글랜드군의 다음 목표는 [[오를레앙]]이었다. 오를레앙은 앞서 말했듯 샤를을 돕는 마지막 대영주의 영지였으며, 중부 프랑스의 요충지로서 함락될 경우, 잉글랜드군이 루아르 강을 건너 도팽[* 직역하면 [[돌고래]]지만 여기서 사용되는 의미는 도팽 공작위를 뜻한다. 잉글랜드의 제1계승권자인 왕자에게 주어지는 작위인 웨일스 공과 마찬가지로, 도팽 공작의 칭호는 프랑스의 왕자에게 주어졌다.] 샤를([[샤를 7세]], 재위 1422~1461, 도팽 즉위는 1417년)의 본거지인 시농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오를레앙 공이 잉글랜드군에 붙잡혀 오를레앙이 혼란에 빠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중세에는 영주가 부재 중인 도시를 공격하는 것은 비열한 짓으로 간주받았고, 오를레앙의 시민과 주둔군들은 오를레앙 공을 붙잡고 도시를 포위해 온 잉글랜드군에 분개하여 결사항전했다. 문제는 장기간의 포위와 프랑스군의 구원 실패로 인해 물자와 식량이 부족해지고 방어 능력도 떨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여기까지는 프랑스 왕국의 [[사망 플래그]]였다. 하지만 그렇게 잉글랜드군이 주변 요새를 전부 다 무력화 시키고 오를레앙을 꿀꺽하려던 순간 '''한 인물이 등장하였으니...''' === [[성녀]]의 등장과 대반전 (1429) === 바로 그 유명한 '''[[잔 다르크]]'''. 잔 다르크와 프랑스군은 성공적으로 오를레앙에 입성한 뒤 '''농성이 아닌 야전으로''' 잉글랜드를 몰아내버렸다(1429년 5월). '''오를레앙 공방전'''의 승리 이후 잔 다르크는 1429년 6월 '''[[파타이 전투]]'''에서 전설적인 명장 탈보트 경의 군대마저 아쟁쿠르와 똑같은 방식으로 [[역관광]]을 시켰고 심지어 '''트루아와 랭스[[https://areyoukorean1.tistory.com/11|#]]까지 함락시키면서(1429년 7월)''' 부르고뉴를 관광시켜버리고 샤를을 정식 프랑스 왕 [[샤를 7세]]로 즉위시키면서 전장의 추를 프랑스 쪽으로 돌려놓는다. === 잔 다르크 화형 (1431) === 잔 다르크 자신은 [[파리(프랑스)|파리]]까지 수복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일단 왕위에 오른 뒤 상황을 안정시키려던 온건파 샤를 7세와 기존 프랑스 귀족의 견제를 받다 파리 탈환의 기회를 놓쳐버린다. 더불어 잔 다르크는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사로잡혀 [[1431년]] 루앙에서 화형당했다. 잔 다르크(1412~1431)가 '''활약한 시간은 채 2년이 되지 않지만 백년 전쟁에서 [[잔 다르크]]의 역할은 지대하다.''' 잔 다르크의 승리 요인으론 역시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는 것. 잔 다르크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뒤노아]] 경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 1,000명이 잉글랜드군 200명만 만나도 튈 정도로 심각한 모랄빵 상황이었는데 잔 다르크의 등장 이후 이것이 사라졌다고 한다. 아마 성처녀라는 이미지에 스스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는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 [[장 뷔로]]를 비롯한 유수의 [[대포]] 전문가의 활약도 들긴 하는데 대포가 활약하려면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이유는 아닐 것 같다. === 부르고뉴 공작과 프랑스 왕의 화해 (1435) ===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그동안 앙숙이던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필리프 3세]]가 프랑스 왕 샤를 7세와 화해하고 잉글랜드와의 동맹 관계를 단절하면서 더이상 프랑스 내에서의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샤를 7세는 마콘 백작령, 폰티우 백작령, 오세르 백작령 및 아미앵, 기타 도시의 영유권을 필리프 3세에게 양도하고, 프랑스 왕에 대한 종속의 예를 평생 면제하였다. 반면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와의 동맹 관계를 정식으로 파기하였으며, 그 결과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다년간에 걸친 항쟁에 종지부가 찍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 동맹을 잃었기 때문에 백년 전쟁 종결을 위한 조건이 정비되었다. 그리고 잉글랜드를 손절하며 독립각을 잡던 부르고뉴는 용담공 샤를의 전사로 프랑스에게 합병당한다. === 파리 수복 (1436) === 이후 프랑스군은 [[아르튀르 드 리슈몽]] 경과 [[라 이르]] 같은 장수들의 활약으로 1436년 [[파리(프랑스)|파리]]를 수복하고 1437년 파리를 다시 프랑스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전세를 역전해 본격적으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는데 당시 잉글랜드군은 설상가상으로 요크파와 랭커스터파간의 대립이 슬슬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어서 제대로 전력 투입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둘이 본격적으로 격돌하는 게 [[장미전쟁]]이다.] === 프랑스의 영토 수복 (1441 ~ 1453) === 프랑스군은 1441년 상파뉴를 수복하고, 1450년 '''포미니(폴미니) 전투'''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사실 대포 자체가 살상력이 어마어마했다기보다는 프랑스군이 [[대포]]로 포격하자 잉글랜드군이 장궁으로 언덕 위에서 버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우세한 프랑스 병력과 기마대에 쳐발린 식이었다. 포미니 전투를 끝으로 오랫동안 잉글랜드령이었고, 잉글랜드 왕의 근거지였던 [[노르망디]][* 그런데 노르망디는 사실 존엄왕 [[필리프 2세]] 시절 프랑스가 잉글랜드의 [[존 왕]]으로부터 무력으로 빼앗았다가 백년 전쟁 때 다시 잉글랜드에게 빼앗긴 땅이다.]마저 프랑스 손에 떨어졌으며 앙주 일대 멘까지 수복했다.[* 전통적으로 노르망디의 일부였던 [[채널 제도]]는 프랑스가 빼앗지 못해서 프랑스 본토 코앞에 있는 이곳은 영국의 영토로 확정된다. 조그만한 섬들이라 영국이 이곳까지 다스리긴 하지만 채널 제도는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고 있는 영국 왕실 영토이다.] 뒤이어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장 뷔로가 이끄는 군대가 마지막으로 탈보트 경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분전을 분쇄하고, 보르도 시를 포함한 가스코뉴를 점령해,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버렸다. ===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475) === 나약한 헨리 6세가 칼레를 지키기 위해 잃어버린 [[노르망디]]와 [[아키텐]] 영지의 영유권을 포기하면서([[1475년]]) 잉글랜드는 더 이상 프랑스에 전쟁을 걸 명분을 상실했고, 이것이 백년 전쟁의 끝이었다. 샤를 7세는 나라를 구원한 승리왕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칼레]][* 영국 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 땅.]는 [[1558년]]까지 잉글랜드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칼레는 잉글랜드산 양모를 집산하는 [[항구]]로 기능하며, 잉글랜드 재정 수입의 35%를 담당하는 노른자 땅이었지만, 이후 [[잉글랜드]]의 [[메리 1세]]가 남편 [[펠리페 2세]]를 도와 함께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가 이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되찾지 못하면서 [[잉글랜드]]는 진짜로 [[섬나라]]가 되었다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지브롤터]]를 차지하면서 유럽 개입 교두보를 다시 확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역사적 의의 == 백년 전쟁의 주요한 의의는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백년 전쟁을 통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화가 완료되었다. 13세기 이전에는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왕이나 정치 체계가 달라도 딱히 서로를 구분하지 않았다. 예컨대 프랑스 귀족이 잉글랜드 귀족이기도 했고, 잉글랜드 왕의 측근이 프랑스에 영지를 갖고 있기도 했으며, 프랑스에 영지를 갖고 있었던 귀족이 잉글랜드 국왕 편을 들기도 했다. 존 왕이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잉글랜드의 상인들이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플랑드르의 외국 상인들과 본격적인 무역분쟁을 시작하게 된 헨리 3세 시절부터 잉글랜드인의 국민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1세]]는 고대에 브리튼섬 전체를 통치했다는 전설적인 [[브루투스]] 왕과 [[아서 왕]]의 후계자를 자칭하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주장했고, 필리프 4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영어 사용을 금지시킨다는 '주님께서도 눈을 돌리실 혐오스러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전시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며 잉글랜드 신민들의 지지를 요구했다. 이렇게 싹트기 시작한 국가의식은 백년 전쟁이 시작되고 에드워드 3세와 헨리 5세의 크레시, 푸아티에, 아쟁쿠르에서의 기적적인 대승으로 주입된 민족의식과 그럼에도 결국 자신들을 패배시킨 프랑스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잉글랜드인의 호전성과 민족의식은 이후에도 유럽 대륙 전역에서 유명했고, 헨리 7세 치세에 잉글랜드인들은 '외국인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으며 외국인들이 그 섬나라로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그 섬을 지배하고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고 일컬어졌다. 존엄왕 필리프 2세 이후 프랑스 왕들은 중앙집권을 시도하며 왕권을 강화해갔다.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삽질 때문에 흔히 보수적이고 무능한 이미지로 알려진 장 2세도 군대의 지휘계통을 왕권 아래로 통합하는 군제개혁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백년 전쟁을 프랑스 왕권의 영향력 확대에 위협을 느낀 독립세력들의 최후의 저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4세기 초의 대기근과 14세기 중엽의 흑사병을 극복하고, 116년 동안 간헐적으로 이어진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이후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해갔다. 샤를 7세는 정부 조직을 재편하고 고등법원을 일부 지방에 설치했으며, 1438년의 부르주 칙령으로 프랑스의 교회가 [[교황청]]이 아닌 왕의 직속에 가깝게 되면서 왕권(특히 세금)이 증대되었다. 또 1448년에는 새로운 상비군 조직이 완료되었다. [[루이 11세]](재위 1461 ~ 1483) 때는 부르고뉴 공의 군대가 먼치킨 [[스위스]] 용병대에게 쳐발리자 프랑스는 부르고뉴·오를레앙·브르타뉴에 이어 [[앙주]], [[프로방스]]를 차례로 직속으로 흡수했다. [[프랑스군]]은 스위스 용병을 적극적으로 고용하고 포병 전력을 증강시켜 1500년대 초에는 유럽 최강국으로 떠오른다. 잉글랜드는 잉글랜드대로 카스티용 전투에서 탈보트 경이 전사하자 더이상 [[요크 가문]]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지게 되었고, 나약한 헨리 6세 치세하에서 랭커스터•요크 양 세력은 [[장미 전쟁]]으로 격돌하게 되었다. 백년 전쟁과 장미전쟁을 거쳐 잉글랜드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그렇게 하여 등장하는 왕가가 바로 [[튜더 왕조]]였다. 추가로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하게 된 잉글랜드는 대륙국가에서 완전한 섬나라/해양국가화하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해양진출에 목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돈이건 병사건 여유만 생기면 프랑스 영지 확대에 몰두하던것에서 벗어나 해양산업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면서 잉글랜드는 섬나라의 특성을 살려 맹활약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산업혁명]]을 이루어내며 막강한 해군력과 식민지를 통해 얻은 풍부한 자원으로 전 세계의 패권을 쥐어나갔다. 백년 전쟁의 패배가 잉글랜드에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 셈이다. 물론 잉글랜드가 이 시기에 프랑스 영토 정복에 성공했었더라면, 혹은 애초에 [[존 왕]]이 [[플랜태저넷 왕조#s-2.3|원래 물려받았던 프랑스 영토들을 잃지않고 유지만 했었더라면]] 그 풍족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유럽 및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플랜태저넷 왕조 당대의 지배층이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가 통합되었다면 프랑스어가 오히려 오늘날 영어를 대신했을 수도 있다. 결국 백년 전쟁은 양국 모두에게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을 알리는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초엽[*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이후 1802년 [[아미앵 조약]]이 맺어지면서 영국 왕의 문장에서 [[백합]]이 삭제되었다. 허나 충돌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까지 가는 오랜 라이벌 대결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우연히도 같은 1453년에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하면서, 1453년은 중세와 근세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이처럼 백년전쟁은 오늘날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오랜 악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려 100년이 넘어가는 기간 동안이나 자식세대까지 대를 이어서 오랜 세월동안 전쟁을 했으니 서로간의 국민감정이 좋을 리도 만무하다.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로 하여금 각각 섬나라와 대륙국가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게 하였고, 이들은 서로 대조되는 지정학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유럽 정치사에서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었다. 주된 이미지는 유럽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프랑스 vs 이를 저지하고 유럽의 세력 균형을 맞추려는 영국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양상은 상당히 달라졌지만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는 유럽의 문제를 전적으로 공유하지는 않으려는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프랑스]]는 유럽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 지금까지도 유효한 과제이기에 유럽연합 탈퇴는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여기에 [[중부유럽]] 세력([[독일]])까지 합치면 서유럽의 3강 [[영프독]]이 완성된다. 즉, 백년전쟁은 서유럽 역사의 양대 축을 만든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오면서야 2번의 세계대전 때 공공의 적인 [[나치 독일]]을 상대로 같이 싸웠던 [[연합국]]으로 동맹관계을 맺었고, [[냉전]] 시대에도 같은 서방 진영의 국가들로써 서로 동맹국이 되면서 19세기까지에 비하면 양국간의 사이는 많이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부분적으로 [[축구]] 국가대항전 [[A매치]]나 국제 스포츠대회라도 열리게 되면 '''[[한일전|"다른 국가들은 몰라도 저 국가만큼은 우리가 무조건 꺾어야 된다!"]]'''라면서 서로를 강하게 비방하고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아직도 [[영불관계]]에서 설문조사를 해보면 아니나다를까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싫어하는 국가"'''로 여전히 서로를 지목하는 경우도 간간히 있다. === 봉건적 군사 제도의 종결 === 19세기의 역사학자 찰스 오만은 1898년 출간된 저서에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크레시 전투까지의 1,000년을 '기사의 시대'로 규정하고 백년 전쟁을 '보병의 시대'로의 전환점으로 제시했지만, 100년이 지난 현재의 기준에서는 너무 명백한 오류가 많아서 반박이 불필요할 정도다.[* "It should not be surprising that the crude 'thousand-year rule' stereotype of cavalry dominance can be overturned by a closer study of individual campaigns and periods of warfare." -Matthew Bennett. 'The Myth of the Military Supremacy of Knightly Cavalry' (2006).] 보병대가 중무장 창기병들의 돌격을 막아내고 승리한 사례는 13세기 이전에도 이미 수없이 많았으며, 반대로 15세기 이후에도 전장에서 중기병의 중요성은 중세 후기에 비해 결코 낮지 않았다. 더 깊게 들어가면 모든 중세 기사가 창기병인 것도 아니었고, 11세기 독일 슈바벤 지방의 기사들은 마상전투보다는 말에서 내린 채 보병들 사이에 섞여서 싸우는 전술을 더 자주 썼다. 심지어 모든 기사가 군인이지도 않았다. 기사 계급이 군복무를 기피하고 방패세나 다른 수단으로 의무를 대신하는 현상은 12세기부터 이미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업과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장원제는 12세기부터 해체되기 시작했고 장원의 수익은 계속 감소해왔지만, 14세기 이후에는 그 부족한 수익마저도 중앙집권화된 왕권의 정책에 좌우되기 시작했다. [[맨앳암즈|중무장 전사]]는 여전히 전쟁의 주역이었고 명예로운 지위로 여겨졌으며 상당수는 귀족출신이었지만, 이전과 달리 귀족신분과 동일시되지는 않았다. 예를들어 1393년 샤를 6세의 칙령은 >"전쟁에 복무하며 귀족다운 삶(중무장 전사로서 참전하는 것)을 사는 귀족이 아닌, '''상업에 종사하는 귀족 가계 출신의 귀족'''은 조세에 관한 한 비귀족과 동등하게 취급하여 세금을 면제받지 않는다" 고 포고했다. 군인이 아니더라도 국왕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수 있으면 덜 명예로운 방식이기는 하지만 귀족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 자체는 적어도 12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고, 더 넓게 보면 11세기에서도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백년 전쟁이 없었더라도 기존의 역사와 같이 진행되었을지는 불확실하다. 1350년대 프랑스의 유명한 궁정기사였던 조프루아 드 샤르니(푸아티에 전투에서 전사)는 저서인 《마상창시합, 토너먼트, 그리고 전쟁에 대한 질문들》(Demandes pour la joute, les tournois et la guerre)에서, '개인의 영광을 좇아 지휘관의 명령을 어긴 군인이 계약상의 급료를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를 '''좋은 토론 주제'''로 보았다. 그러나 1380년대 법학자 오노레 보네는 군인은 왕이나 왕이 임명한 지휘관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하며 목숨을 걸고 군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1374년 샤를 5세가 제정한 군사법령에도 이러한 인식이 반영돼 있었다. 잉글랜드의 하층 신사 집안 출신인 존 찬도스는 흑태자의 최측근이자 푸아투의 사령관이 되었고, 브르타뉴의 가난한 최하층 신사 집안 출신 용병대장이었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출신이 불명확한 용병대장 로버트 놀리스는 기사작위를 받기 전부터 기사들을 부하로 거느리고 있었다. 심지어 백년 전쟁을 끝낸 프랑스의 영웅은 [[잔 다르크]]라는 시골 소녀였다. == 여담 == * 이전에도 용병들의 비중이 낮지는 않았으나, 특히 이 전쟁은 유럽 내에서 용병들이 대활약을 시작하는 전쟁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중세시대 최고의 사치품이었던 플랑드르 지방을 지배하면 얼마든지 돈을 뽑아낼 수 있었기에 앞다투어 용병들을 고용했고, 이로 인하여 [[십자군 전쟁]] 이후 호황을 맞이한 용병들이나 가뜩이나 발전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은행업 등 유럽의 자본이동이 더욱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 [[잉글랜드]]는 이걸로 전쟁이 끝이 아니었다. 바로 [[장미전쟁]]으로 이어졌다. * 각종 중세배경의 게임, 소설에 수많은 영감과 이미지를 제공하는 전쟁이다. * 이 시기 [[동유럽]]에서도 급성장하던 [[오스만국]]이 [[발칸반도]]로 침입해 들어옴으로서 이에 대항하는 많은 전투들이 있었다. * [[동로마 제국]]의 [[갈리폴리]]. 대지진 이후, [[오스만 베이국]]에게 점령(1354): 첫 번째 침략. * [[아드리아노폴리스]] 점령(1365): [[오스만 베이국]]의 수도화 * 제1차 [[코소보 전투]](1389): 오스만 승 * [[니코폴리스 전투]](1396): 오스만 승 * [[잔 다르크]]가 화형당한 1431년은 [[블라드 가시공]]이 태어낸 해이다. * [[바르나 전투]](1444) 오스만 승 * [[알바니아]]에서 제르지 카스트리오티(40세)의 반란 시작(1444) * 제2차 [[코소보 전투]](1448): [[오스만 술탄국]] 승 *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 [[오스만 술탄국]] 승 *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에서 손등을 앞으로 해서 V를 만드는 것이 매우 심한 욕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에 만들어지진 속설이다. 우선 장궁을 당길 때는 손가락 2개가 아닌 3개를 사용하고, 백년 전쟁 시기의 기록에는 손가락 세 개(두 개가 아닌)를 자르겠다고 위협한 사례가 단 한 번 등장하며 모욕하기 위해 손가락을 펴 보였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궁수의 손가락을 자르거나 자르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원래 가끔씩 있는 일이었다. 십자군시대 튀르크 군벌인 이마드 앗딘 장기도 항복을 거부한 요새 하나를 점령한 뒤 수비군 궁수들의 엄지를 잘랐다. * 이 전쟁과 비슷한 규모의 전쟁을 치른 두 국가가 동아시아에 있었다. 바로 [[북송|송나라]]와 [[금나라]] 인데, 이 두 국가는 백년전쟁이 일어나기 약 100년 전인 1126년부터 1234년까지 총 108년이라는 위엄을 보여준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스코틀랜드 왕국의 대외전쟁)] [include(틀:잔 다르크)]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