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백진수(1903)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백진수}}}'''[br]'''白珍守'''}}}}}}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백진수(1903).jpg|width=100%]]}}} || || '''초명''' ||백무기(白武基) || || '''본관''' ||[[수원 백씨]][* 문경공파(文敬公派)-휴암 종중(休庵宗中) 29세 기(基) 항렬. 족보명은 백용기(白龍基).] || ||<|2> '''출생''' ||[[1903년]] [[12월 1일]][* [[음력]] [[10월 13일]]. 수원백씨문경공휴암보 제7권 956쪽에는 10월 20일생으로 등재돼 있다.] || ||[[전라북도]] [[부안군]] 하동면 구운리[br](現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 운기마을[* [[http://www.ibuan.com/news/articleView.html?idxno=7010|2009년 6월 30일 부안독립신문 기사]]. 기사 서두에 첨부된 운기마을 약도를 통해 구운기마을에 "백정기의사생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49번지[* [[http://www.buan114.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94|2021년 10월 20일 부안인터넷신문 기사]]. [[네이버 지도]]의 위성지도를 통해 생가터의 위치가 신운리 149번지임을 알 수 있다.]) || || '''사망''' ||[[1946년]] [[3월 24일]] (향년 42세) || || '''가족''' ||백남일(아버지), 윤문옥(어머니)[br] [[백정기]](형), 백복순, 백복근(누나)[br] 정애자(부인), 백계현, 백재현(아들[* 이 중 장남인 백계현은 자식이 없던 형 [[백정기]]의 양자로 입적됨.]) || || '''묘소'''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백정기]]의 친동생이다. == 생애 == [[1903년]] [[12월 1일]] [[전라북도]] [[부안군]] 하동면 구운리(現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 운기마을 149번지)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백남일(白南一, 1876. 9. 17 ~ 1908. 12. 1)[* 자는 사순(士純).]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문옥(尹文玉, 1872. 10. 2 ~ 1963. 6. 15)[* 윤자신(尹滋臣)의 딸이다.] 부부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한 편에 속했다. 5세 되던 1907년 [[전라북도]] [[정읍시|고부군]] 북부면 갈선리(現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갈선마을 734번지)[* 현재 이 지번에 [[https://naver.me/Ge5IB51M|구파백정기의사고택]]이 남아 있다.]로 [[https://www.kculture.or.kr/oldHome/view/menu/426?kmCode=jbje0007|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했다. 1932년 8월 형 [[백정기]]가 독립운동을 위해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에 처음에는 각지를 전전하며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자, 인쇄공 조명호(趙明鎬)·박창식(朴昌植)·고광직(高光職) 등과 함께 남몰래 [[위조지폐]]를 제작해 인쇄할 것을 협의했다. 이때 인쇄된 위조지폐 500엔은 이후 모종의 경로를 통해 [[만주국]] [[길림성]] 영안현(寧安縣) 해림보(海林堡)[* 現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시(海林市).]에서 활동하던 백정기에게 안전히 전달되었다. 1933년 3월 17일 형 백정기가 중화민국 상하이 홍구(虹口)[* 現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훙커우구]].]의 로쿠산테이(六三亭)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요릿집에서 [[중국 대륙]] 침략의 하수인으로 지목되어 있던 주 중화민국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치자, 이후 가족들과 함께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돼 정읍경찰서에서 형 백정기의 이른바 '여죄(餘罪)'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구금되었다가 10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934년 6월 5일 형 백정기가 [[일본]] [[나가사키현]] 키타타카키군(北高來郡) [[이사하야시|이사하야촌]](諫早村)[* 現 [[일본]]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 노나카정(野中町).]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지병]]인 [[폐결핵]]으로 옥사, 순국한 뒤 이튿날인 6월 6일 형무소장으로부터 형 백정기의 부고를 듣고 홀로 일본 나가사키현으로 건너가 시신을 수습해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mngNo=8883|일본 땅에 안장하고는]]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연명하다가, 1936년 9월 11일 과거 위조지폐를 인쇄해 형 백정기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할 때 동지였던 박창식이 조선 국내에서 당시 인쇄했던 위조지폐의 일부를 사용하려다가 발각되어 조명호·고광직과 함께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뒤 1937년 1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주화위조방조죄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나, 1946년 3월 24일 별세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수원 백씨]][[분류:부안군 출신 인물]][[분류:1903년 출생]][[분류:1946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