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보두앵 3세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예루살렘 국왕]][[분류:앙주 가문]][[분류:1130년 출생]][[분류:1162년 사망]][[분류:예루살렘 출신 인물]][[분류:이질로 죽은 인물]] [include(틀:역대 예루살렘 왕국 국왕)] |||| [[파일:보두앵 3세.jpg|width=200]] || ||||<:> '''{{{#005ba6 [[예루살렘 왕국]]의 제5대 국왕}}}'''|| ||<#FFD700> '''{{{#005ba6 즉위명}}}''' ||보두앵 3세(Baudouin III) || ||<#FFD700> '''{{{#005ba6 이름}}}''' ||보두앵 당주(Baudouin d'Anjou) || ||<#FFD700> '''{{{#005ba6 출생일}}}''' ||[[1130년]]~[[1131년]] || ||<#FFD700> '''{{{#005ba6 출생지}}}'''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 ||<#FFD700> '''{{{#005ba6 사망일}}}''' ||[[1162년]] [[2월 10일]] (32~33세) || ||<#FFD700> '''{{{#005ba6 사망지}}}''' ||[[예루살렘 왕국]] [[베이루트]] || ||<#FFD700> '''{{{#005ba6 매장지}}}'''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성묘교회]] || ||<#FFD700> '''{{{#005ba6 가문}}}''' ||[[앙주 가문|앙주]] (House of Anjou) || ||<#FFD700> '''{{{#005ba6 부모}}}''' ||[[부친]] [[풀크|풀크 당주]] [br][[모친]] [[멜리장드|멜리장드 드 레텔]] || ||<#FFD700> '''{{{#005ba6 배우자}}}''' ||테오도라 콤니니 (테오도라 콩넨) || ||<#FFD700> '''{{{#005ba6 자녀}}}''' ||-|| ||<#FFD700> '''{{{#005ba6 종교}}}''' ||[[로마 가톨릭]] || ||<#FFD700> '''{{{#005ba6 재위기간}}}''' ||[[1143년]] [[12월 25일]] ~ [[1162년]] [[2월 10일]] (18년 2개월 16일) || 보두앵이 13살 때 아버지 [[풀크]]가 죽자 어머니 [[멜리장드]]와 함께 공동으로 왕국을 다스렸는데 멜리장드는 귀족 중에서 조언자를 구하여 어린 아들을 권력에서 제외했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2세]] 및 풀크 시절과 달리 강력한 군주가 [[십자군 국가]]들을 통솔하지 못하여 북쪽의 십자군 가신국들이 독립할 움직임을 보였고 있었다. [[이슬람]] 측에서는 [[장기 왕조|이마드 앗 딘 장기]]가 [[모술]]과 [[알레포]]를 장악하고 [[다마스쿠스]]를 넘보고 있었다. [[1144년]] [[장기 왕조|이마드 앗 딘 장기]]가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여 멸망시키자 유럽에서는 [[제2차 십자군 원정|제2차 십자군]]이 발흥하게 되었다. [[1147년]] [[장기 왕조|이마드 앗 딘 장기]]가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누르 앗 딘은 계속 다마스쿠스를 노리고 있었다. [[1148년]] [[프랑스]] [[루이 7세]]와 [[신성 로마 제국]] 콘라트 3세가 이끄는 [[제2차 십자군 원정|제2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왔는데 어리석게도 이들은 [[다마스쿠스]]를 공략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원정이 대실패로 끝나자 십자군은 유럽으로 돌아가 버렸고 누르 앗 딘은 [[안티오키아 공국]]을 공격했다. 안티오키아의 레몽[* 보두앵 3세의 이모이자 [[멜리장드]]의 동생 알리스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하여 안티오키아 공작이 되었다. 콩스탕스는 보두앵 3세의 사촌이니 레몽은 보두앵 3세의 사촌 매부인 셈이다.]은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1152년]] 보두앵 3세는 스스로 통치할 나이가 되자 정치에 관여하려 했지만 어머니 [[멜리장드]]를 따르는 귀족들의 반대를 받았다. 보두앵은 어머니에게서 독립하여 단독 대관식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왕국의 귀족회의에 왕국 분할을 요구했다. 보두앵은 갈릴레아 등 북쪽의 빈약한 도시를 받았고 멜리장드는 예루살렘 그 자체를 비롯해 사마리아, 나블루스 등 더 부유한 영지를 분할받았다. 보두앵 3세는 이런 결정에 승복하지 못해 남쪽으로 진격하여 내전을 일으켰다. 나블루스가 보두앵 3세의 손에 떨어지자 예루살렘은 보두앵에게 문을 열었고 왕국의 전권을 주었다. 양측이 합의에 도달해 [[멜리장드]]는 나블루스에 은거하고 보두앵은 간섭하지 않기로 했으며 [[1154년]] 모자는 화해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이 모자 간 내전을 벌이는 동안 누르 앗 딘은 [[다마스쿠스]]를 복속하여 [[시리아]]는 누르 앗 딘의 깃발 아래 통일되었다. 보두앵 3세는 이집트 [[파티마 왕조]]가 약해진 틈을 타 남쪽으로 눈을 돌려 가자를 요새화하고 [[이집트]]를 압박했다. 1153년 보두앵 3세는 아스칼론의 요새를 점령했고 [[1156년]] 누르 앗 딘과 협정을 맺었다. 보두앵 3세는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추구하여 [[마누엘 1세]] 콤니노스의 조카 테오도라 콤니니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 [[1158년]] 결혼했다. [[멜리장드]]는 [[1161년]] 죽었고 보두앵은 [[1162년]] [[트리폴리 백작국|트리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병에 걸려 [[베이루트]]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에는 [[독살]]의 의혹이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보두앵 3세는 [[안티오키아]]에서 시리아 정교회 의사가 준 약을 먹고 나자 곧바로 [[이질(질병)|이질]]에 걸렸다고 한다. 보두앵이 죽었을 때 왕비 테오도라는 아직 16살이었고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 [[아모리 1세|아모리]]가 뒤를 이었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