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서눌 (r1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고려의 배향공신)] ||<-5> '''[[문하시중|{{{#670000 고려의 문하시중}}}]]''' || || [[강감찬]] || {{{+1 ←}}} || '''{{{#670000 서눌}}}''' || {{{+1 →}}} || [[황주량]] || ||<-3> '''{{{#white {{{+1 이천 서씨 3대 배향공신}}}}}}''' || || '''정민공 [[서필]]''' ||'''장위공 [[서희]]''' ||'''{{{#white 원숙공 서눌}}}''' || ||<-2> '''{{{#white 고려국 중추원 장관[br]고려국 중서문하성 장관[br]{{{+1 서눌}}}}}}''' || || '''{{{#white 시호}}}''' ||간경공(簡敬公) → '''원숙공(元肅公)''' || || '''{{{#white 삼사}}}''' ||'''태사(太師)''' || || '''{{{#white 직위}}}''' ||'''내사령(內司令)''' || || '''{{{#white 본관}}}''' ||[[이천 서씨]] || || '''{{{#white 이름}}}''' ||눌(訥) || || '''{{{#white 아버지}}}''' ||[[서희]] || || '''{{{#white 생몰연도}}}''' ||? ~ 1042년 6월 || == 개요 == [[고려]] 초기 문관. 이천 서씨 [[문벌귀족]] 가문 출신으로, [[서신일]]- [[서필]] - [[서희]] - [[서눌]] - [[서정(고려)|서정]]- [[서균(고려)|서균]] -[[서공(고려)|서공]] 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재상직에 임명된 당대 최고 가문 중 하나다. [[성종(고려)|성종]], [[목종(고려)|목종]], [[현종(고려)|현종]], [[덕종(고려)|덕종]], [[정종(고려 10대)|정종]] 5대 임금을 섬긴 노신(老臣)이기도 하다. == 상세 == 성종 문의대왕 대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친 명재상 서희의 아들이다. 최초의 기록은 상서성 소속인 이부[* 정부 인사를 담당한 부서.]의 차관으로 등장한다. 이후 자신의 딸이 현종 원문대왕과 결혼해 [[원목왕후]][* 원목왕후는 서눌의 첫번째 부인인 이천군대부인(利川郡大夫人) 최씨 소생이다. 두번째 부인은 이천군대군(利川郡大君) 정씨.]가 되자 권력이 더욱 올라가 [[중추원]]의 장관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다. 이후 중추원과 더불어 최고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차관[*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중서문하성의 차관인 평장사엔 네 등급이 있다. 1위는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2위는 중서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3위는 문하시랑평장사, 4위는 중서시랑평장사이다.]이 되었다가 장관[*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직위가 승진하니, 그야말로 [[이천 서씨]]가 가장 권세가 강했을 때였다. 향직 품계 또한 정점을 찍어 1품 2등위인 중대광(重大匡)에서 1품 1등위인 삼중대광(三重大匡)까지 올라갔다. 후에 병을 얻어 퇴직하고 절에서 요양했다. 정종 용혜대왕은 내사령[* 중서문하성 소속의 명목상 최고위직. 고위왕족이나 공신에게만 봉해주던 명예직이며 실질적인 최고위직은 문하시중이다.] 직을 내려 늙은 신하를 대우해주었고, 1042년 4월, 내사령이 죽자 '[[천자]]의 스승'이란 칭호인 태사를 추증하고, 간경공 시호를 주었다. 하지만 [[정종(고려 3대)|정종 문명왕]]의 추가 시호를 올릴 때 간경 시호가 선택되자 원숙 시호로 바꾸었다. [[분류:고려의 배향공신]][[분류:이천 서씨]]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