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엘 그레코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Skai TV 선정 위대한 그리스인)] ||<-2> '''{{{+1 엘 그레코}}}[br]El Greco'''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l-greco.jpg|width=100%]]}}}[* 자화상으로 추정. 제목은 노인의 초상화다.] || || '''본명'''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br](Δομήνικος Θεοτοκόπουλος) || ||<|2> '''출생''' ||[[1541년]] [[10월 1일]] || ||[[베네치아 공화국]] [[크레타 섬]] [[칸디아]][* 오늘날의 [[그리스]] [[크레타|크레타 섬]] [[이라클리오]]] || ||<|2> '''사망''' ||[[1614년]] [[4월 7일]] (향년 72세) || ||[[스페인]] [[톨레도]] || || '''국적'''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그리스]], [[스페인]] || || '''직업''' ||[[화가]] || || '''사조''' ||[[매너리즘]], 스페인 르네상스|| || '''스승''' ||[[티치아노 베첼리오]] || [목차] [clearfix] == 개요 == [[그리스]] 태생의 [[스페인인]] [[화가]]로,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과 함께 [[근세]]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화가로 꼽힌다. [[17세기]] [[르네상스]] 말기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의 궁중 화가였고, 당시 [[매너리즘]]으로 분류된 그의 화풍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의 화풍은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는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 생애 == [[그리스]] [[크레타 섬]] [[칸디아]]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는 그리스 사람으로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Δομήνικος Θεοτοκόπουλος)인데,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 사실 엘 그레코라는 표현 자체는 약간 비하적인 표현이 섞여있어서 스페인 사람들이 불렀던 의미는 그리스인보다는 '그리스놈'이라는 표현에 더 가깝다. 이사벨 1세 여왕의 레콩키스타 성공과 통일 스페인 왕국 출범 이후 이방인들에게 까칠했던 스페인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는 한 단면인 셈. 또한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공표했으니 그의 출신에 대한 자부심이 들어있기도 하다.]로 불렸다. [[베네치아]]에서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지도를 받고, 틴토레토(자코포 로부스티)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엘 그레코의 초기 화풍은 정확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하였고 베네치아풍의 색채법을 사용하였다. [[베네치아]]에서 화가로서 입지를 굳힌 엘 그레코는 당시 최고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던 [[스페인]]에서 성공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스페인으로 건너갔으며 그가 원하던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궁중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화풍이 펠리페 2세의 마음에 들지 않아 궁중 화가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이 종교화와 [[초상화]]였고 회색빛 [[명암]]과 [[색채]], 비정상적으로 길쭉하고 뒤틀린 [[인체]]묘사로 당시 스페인에서는 [[매너리즘]] [[미술]]로 평가절하되었다. 사후 오랫동안 그의 진가가 묻혀져 있었으나 [[19세기]] 이후 재평가되어 [[폴 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가 등장하면서 그는 미술사에서 신기원으로 이룬 가장 중요한 작가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궁중 화가로서 [[톨레도]]에 정착한 후에 평생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고, 스페인 왕실이 [[마드리드]]로 천도한 뒤에도 톨레도에서 계속 살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 대표 작품 == || [[파일:external/allart.biz/el_greco_opening_of_the_fifth_seal.jpg|width=400]] || ||다섯번째 봉인의 개봉 (1614년, 캔버스에 유화) ||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어두운 단색으로 배경을 표현하여 인물을 강조하고 그 인물들을 10등신에 가깝게 길게 그려서 눈에 띄도록 한 독특하고 파격적인 화풍의 소유자이다. 그 당시에는 실제 사람과 사물을 똑같이 표현하는 [[고전주의]] 사조가 유행하였기 때문에 [[시각장애]]가 있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 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화풍은 [[16세기]] 말에 [[매너리즘]][* 16세기 말 이미 소묘 실력이 정점에 달하면서 미술의 발전은 끝난 것이 아니냐는 생각과 함께 조화와 균형 대신 신체의 특정부분을 과장 왜곡하면서 부자연스러움을 추구하게 되었다.]이라는 사조로 발전한다. 후일 그의 화풍은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에 영향을 준다.[* 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데 집중하는 것 대신에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종교적 열망과 희열-을 표현하기 위해 형태가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내었단 것을 생각한다면 표현주의, 추상주의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400년 정도 앞서갔던 화풍이었던 셈.] || [[파일:external/www.artble.com/the_burial_of_the_count_of_orgaz.jpg|width=400]] ||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8년, 캔버스에 유화) ||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라는 작품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스테판|스테파노]]가 오르가스 [[백작]]의 [[시신]]을 매장하고 있고 그의 [[영혼]]을 [[천사]]가 [[천국]]으로 끌어올리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그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묘사였다. 특히 동시대 인물이 아닌 사람들[*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스테파노와 오르가스 백작, 동네 주민들, 심지어 왼쪽에는 엘 그레코 자신의 모습과 아들을 묘사해놓았다. 왼쪽에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아이가 엘 그레코의 아들이고, 군중들 중에 오른손을 들고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엘 그레코 본인이다. 참고로 수많은 인물들이 그려져있지만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것은 이 두 명 뿐이다.]을 동시에 묘사한 것, 영혼을 실체있는 형상[* 흰색 물결, 천의 형상으로 표현.]으로 표현한 것 때문에 당시 백작의 [[유해]]를 모셨던 산토 토메 성당에서는 이 그림을 [[묘지]] 위에 걸기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그 그림을 보기 위해서 산토 토메를 찾는 관광객이 매우 많아진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오로지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여담으로 이 그림중 백작의 시신이 그려진 부분이 1940년 [[스페인 페세타]] '''지폐 도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기타 == *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에스코리알궁, [[톨레도]]의 미술관과 여러 [[성당]]에 그의 작품이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한 번쯤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 NPC로 등장한다. 단, 해당 게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도시들이 항구도시인만큼, 게임 속 에스파냐의 본거지가 당시 수도였던 톨레도가 아닌 [[세비야]]로 설정이 되어 있어, 엘 그레코 또한 세비야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분류:스페인의 화가]] [[분류:그리스계 스페인인]] [[분류:이라클리오 출신 인물]] [[분류:1541년 출생]] [[분류:1614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