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요숭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50년 출생]][[분류:721년 사망]][[분류:싼먼샤시 출신 인물]] [include(틀:구당서)] ---- [include(틀:신당서)] ---- ||<-2> '''양문헌공(梁文獻公)[br]{{{+1 姚崇 | 요숭}}}''' || || '''작호''' ||양현후(梁縣侯) → 양국공(梁國工) || || '''시호''' ||문헌(文獻) || || '''성''' ||요(姚) || || '''이름''' ||원숭(元崇) → 원지(元之) → 숭(崇) || || '''자''' ||원지(元之) || || '''생몰''' ||650년 ~ 721년 || || '''출신''' ||합주(陜州) 협석현(硤石縣) || || '''부친''' ||요의(姚懿)[* 자는 선의(善意).] || || '''주군''' ||[[측천무후]][br][[중종(당)|당중종]][br][[예종(당)|당예종]][br][[현종(당)|당현종]]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명재상]]으로 [[현종(당)|현종]]을 보좌했던 [[정치인|정치가]]이다. == 생애 == === 초기 생애 === 650년 합주(陜州) 협석현(硤石縣)에서 요의(姚懿)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래 이름은 원숭(元崇)이었다. 처음에는 [[고종(당)|고종]]의 태자인 [[이홍(당)|이홍]]의 면랑(挽郞)으로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복주(濮州) 사창참군(司倉參軍)을 역임하고 5번 옮겨 하관낭중(夏官郎中)이 되었다. 696년, [[거란]]의 [[손만영]]과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요숭은 조리있게 사무를 처리하여 [[측천무후]]의 신임을 얻었고 하관시랑(夏官侍郞)으로 진급한다. 이윽고 698년에는 동봉각난대평장사(同鳳閣鸞臺平章事)가 되었으며, 이후 봉각시랑으로 전임되고 상왕 이단의 장사가 되었다. 704년, 요숭은 모친이 연로하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주청하여, 측천무후는 요숭을 재상에서 파직시키고 상왕부 장사는 유임시켰다. 측천무후가 요숭에게 하관상서, 동봉각난대삼품을 겸임하도록 명하자, 요숭은 이를 사양하고 춘관상서로 임명되었다. 측천무후의 총신인 [[장역지]]가 장안의 대덕승 10명을 정주(定州)로 옮겨 개인의 절을 세우려하자, 요숭은 장역지의 청탁을 거부하였다. 결국 요숭은 장역지로부터 참소를 당하여 사복경(司僕卿)으로 좌천되었으나 재상의 자리는 지켰다. 이후 영무도(靈武道) 대총관(大總管)으로 부임하기 전에 측천무후에게 [[장간지]]를 추천하고 영무로 떠난다. === 중종, 예종 재위기 === 705년, [[장간지]], [[환언범]], [[경휘]], [[원서기]], [[최현위]] 등의 신료들이 [[신룡정변]]을 일으켜 태자 이현을 다시 제위에 올리니 이가 [[중종(당)|중종]]이다. 요숭은 신룡정변에 참여하여 양현후(梁縣侯)로 책봉되고 실봉 200호를 받았다. 요숭은 이후 박주(亳州) 자사로 전출되었고 송주(宋州), 상주(常州), 월주(越州), 허주(許州) 자사를 역임하였다. 710년, [[당륭정변]]으로 중종의 아우인 상왕 이단이 아들인 임치왕 이융기에 의해 복위하니 이가 [[예종(당)|예종]]이다. 요숭은 병부상서,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으로 임명되고 이윽고 중서령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요숭과 송경은 중종 재위기의 폐단을 혁파하였고 법률을 재정비하여 당시 사람들은 정관, 영휘 연간의 정치를 되찾았다고 여겼다. 한편 조정에서는 [[태평공주]]가 정권을 잡고 기왕(岐王) 이범(李範)과 설왕(薛王) 이업(李業)이 모두 금병을 장악했다. 요숭과 송경은 예종에게 태평공주를 동도로 옮기고 또한 황족들을 자사로 전출시켜서 민심을 안심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태평공주는 요숭이 올린 건의에 분노하여 이융기를 꾸짖었고, 이융기는 요숭과 송경이 형제를 이간시킨다고 예종에게 상주했다. 결국 요숭은 신주(申州) 자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양주(揚州) 장사, 회남(淮南) 안찰사(按察使)로 전임되었으며, 동주(同州) 자사를 역임했다. 요숭은 검소하고 엄숙한 정치를 펼쳐서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 현종 재위기 === 712년, 예종이 이융기에게 재위를 물려주어 태상황으로 물러났고 이융기가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제6대 황제인 [[현종(당)|현종]]이며, 713년에 태평공주 일파를 숙청했다. 같은해 현종이 신풍역(新豐驛)에서 무예를 강습할 때 동주 자사로 있던 요숭을 몰래 불렀다. 요숭은 이때 병부상서, 동중서문하삼품이 되었고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졌으며, 자미령(紫微令)을 역임했다. 또한 이때 연호를 피해 이름을 요원지(姚元之)에서 요숭으로 고쳤다. == 참고자료 == * 『[[구당서]]』 * 『[[신당서]]』 * 『[[자치통감]]』캡챠되돌리기